中 조선족 초가집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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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조선족 초가집의 변천사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1.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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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시조선족문화예술관 리윤선

[서울=동북아신문]벼짚으로 이영을 잇는 전통초가집을 언제부터 짓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3천년 정도는 되였을것으로 추정된다.

유관자료에 의하면 벼 농경문명은 2만여년의 력사가 있다. 1993년 중미련합고고팀이 중국 호남성 도현 옥섬암에서 발견한 고대의 재배벼는 지금으로부터 14,000~18,000년전의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껏 발견된 가운데서 세계상 최초로 되는 인공재배벼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여년전 은나라와 주나라가 교체되는 시기 중국의 벼가 북으로는 조선, 일본으로 전해졌고 남으로는 윁남에 전해졌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조선반도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부터 벼짚으로 이영을 엮어 지붕을 잇는 초가를 지었다고 추측할수 있다.  벼짚이 없었을 때는 움막집이나 귀틀집, 돌집을 짓는 등 지역에 따라 부동했을것이고 지붕은 띠, 억새, 나무판자, 나무껍질, 해초 등 자지방에서 쉽게 해결할수 있는 재료로 얹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료녕성 관전현 하로하 삼도하촌의 평안도풍격 초가(20세기 50년대 건축)

  생산력이 락후하고 물질자료가 결핍하던 먼 옛날에 사람들은 벼농사를 지어 알곡을 걷어들인후 남은 벼짚을 리용하여 불을 때면 열이 생기고 밥도 지을수 있으며 이영을 엮어 지붕을 덮으면 여름에는 비물이 새여들지 않고 겨울에는 눈과 추위를 막을수 있다는것, 이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벼짚을 많이 리용할수 있다는것을 발견하였다.

  19세기중엽에 조선이주민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수전을 개발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동북지역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수전을 개발한후 벼짚이영을 씌운 초가집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볼수 있다. 동북지역의 초기 이주민들은 한족이나 만족들의 집에 세들어 살기도 하였고 간이형 초막 혹는 귀틀집을 지어 거주하다가 점차 전통적인 조선족가옥을 짓고 살았다. 가정생활이 넉넉한 집들에선 전통적인 기와집을 짓기도 하였다. 조선족초가집은 지방에 따라 다른 특색을 보였으며 시대에 따라 이러한 전통가옥들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재산중의 하나인 가옥은 한 가정의 경제기반을 족히 나타냈다. 례를 들면 20세기 50년대 이전의 료녕지역 조선족들의 집은 대부분이 전통적인 초가집들이였다. 전통적인 초가집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와 석가래를 얹었다. 그리고 수수대, 갈대 혹은 나무가지 등으로 발처럼 엮어 그우에 흙을 바르고 마른 다음 벼짚이영을 덮었으며 용마루에는 곱새를 틀어 얹었다. 우진각지붕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배집지붕이였다. 벽체는 수수대나 갈대 혹은 나무가지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문의 위치를 내놓고) 외를 얽은후 량쪽으로 흙줴기를 붙이고 겉에 진흙을 발라 세웠다. 초가집들은 모두 낮았고 문이 작았으며 부엌간은 움푹하였다. 방안은 통구들을 놓았는데 넓적하고 얇은 돌들로 구들을 놓았으며 흙을 발라 말리운 다음 그 우에 삿자리를 폈다. 부엌에는 구들과 잇닿은 간막이벽밑에 부뚜막을 쌓고 솥은 보통 두세개 걸었으며 아궁이에 불을 때면 불길과 연기가 방안의 구들고래를 지나 바깥 굴뚝으로 빠지게 하였다. 하여 밥도 짓고 구들도 덥힐수 있었다. 방안은 아래간과 웃간으로 나누었으며 중간에 미닫이문을 달거나 혹은 흙담을 쌓고 작은문을 내여 드나들수 있게 하였다. 바깥쪽으로는 살문을 만들어 달고 문풍지를 발랐으며 밖에서 신을 벗고 방안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문밖에는 마당보다 약간 높은 흙마루나 널마루를 만들기도 하였다. 집이나 마당 혹은 터밭주위에는 나무가지, 널판자, 옥수수대 등으로 울타리를 세우거나 흙담이나 돌담을 둘러 경계를 짓는 한편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철령시 쌍정자 굉의촌의 변화된 조선족초가(20세기 70년대 건축)

  후에는 벼짚을 3~5센치메터쯤 되게 썰어 진흙과 함께 반죽하여 벽체를 두텁고도 높이 쌓아올렸으며 또는 흙을 빚어 벽돌처럼 만든 토피로 담을 쌓기도 하였다. 그리고 벼짚으로 이영을 엮어 지붕에 씌웠고 용마루에는 곱새를 틀어 얹었는데 지붕의 물매도가 원래보다 커졌다. 대부분이 앞, 뒤 량쪽에만 처마가 달린 배집지붕이였다.

  1960년대 전후부터는 집을 지을 때 먼저 돌로 담을 쌓다가 그우로 토담을 이어 쌓았으며 혹은 돌담을 쌓은 우에 벽돌로 담을 쌓고 그 우에 계속 토담을 쌓기도 하였다. 집이 원래보다 높아졌고 지붕의 물매도도 더 커졌다. 문도 그전보다 커졌으며 유리를 달아 방안에 해가 들게 하였다. 그리고 밖에서 신을 벗고 방안에 들어가던것을 집안에 들어가 신을 벗도록 작은 봉당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만족이나 한족 가옥의 영향을 받아 방안면적의 절반 혹은 3분의 2 정도로 구들을 놓고 봉당을 더 넓히기도 하였다. 연통도 원래의 나무연통, 토관연통으로부터 벽돌로 연통을 높이 쌓아올려 아궁이에 불이 내지 않도록 하였으며 몇년은 손을 대지 않아도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연길시 조양천의 함경도풍격 초가집(20세기 50년대에 건축한것으로 추정)

  20세기 70~80년대 이후로는 대부분이 벽돌기와집을 짓거나 또는 벽돌콩크리트집(지붕이 평평한 집)을 지으면서 조선족의 전통가옥풍격이 거의 사라지고 한족들의 가옥과 별반 다름없게 되였다. 이처럼 전통가옥이 변화되는것은 시대의 발전과 지역 건축풍격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볼수 있다. 또한 사람들의 새로운 사유방식, 편리한 생활 추구 및 건축기술, 건축재료 등의 발전에 따라 조선족의 가옥문화가 변화, 발전되는것도 필연적인 현상이였다. 그러나 조선족가옥의 부뚜막구조만은 원래의 격식을 보류하였다.

  다른 한편 한족이나 만족들이 살던 집에 거주하거나 토지개혁때 지주의 집을 분배받은 조선족가정에서는 원래 지붕에 씌워있던 기와 혹은 우라초, 억새, 조짚 등으로 이은  만족, 한족식의 지붕을 벗겨버리고 조선족식 이영을 엮어 올린 집도 볼수 있었다. 만족, 한족식의 초가지붕은 상대적으로 조선족초가집과 대비하면 현저하게 다른바 물매도가 더욱 컸으며 우라초 혹은 억새, 조짚을 똑같은 길이로 잘라 지붕에 비스듬히 차곡차곡 재여놓아 비가 새지 않고 흘러내리게 하였다. 어떤 집은 원래의 이영을 벗겨버리고 기와를 올리기도 했으며 또는 이영우에 기와를 덧씌우기도 하였다.

  조사에 의하면 관전만족자치현 하로하조선족향 삼도하촌의 3간 배지붕초가집은 1950년대에 지은 전통적인 평안도풍격이다. 지금도 외부나 내부의 구조가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있어 전통가옥연구에 아주 유리한 실물을 제공하고있다.


                   료녕지역의 보편적인 부엌일각(20세기 50년대)

  연변지역의 조선족전통가옥들은 지방특색이 비교적 농후하였다. 20세기 50~60 년대 이전의 초가집들은 보편적으로 지붕이 앞, 뒤, 좌, 우 네개 면으로 되였고 처마가 낮으며 지붕의 물매도가 작았다. 담벽은 수수대나 나무가지 등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외를 얽고 량쪽으로 흙줴기를 붙인후 진흙을 발라 벽을 만드는 료녕의 조선족전통초가집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부엌구조는 료녕지역의 초가집부엌과 현저하게 부동하였다. 부엌에는 움처럼 작은구덩이를 파고 그안에 아궁이를 설치하여 불을 때며 부뚜막은 구들높이와 같았다. 부뚜막과 구들 사이에 간막이가 따로없고 구들우에서 밥과 료리를 할수 있게 하였다. 불을 때는 시간외에는 아궁이가 있는 곳에 구들 높이와 같이 나무널판자를 깔면 마루방처럼 된다. 방안은 미닫이문을 달아 아래간과 웃간으로 나누고 집의 한쪽켠에 창고 혹은 외양간을 잇달아 짓기도 하였다. 연통은 대부분 나무판자로 만들었거나 구새먹은 통나무를 리용하였다. 70~80년대 이후로는 벽돌기와집을 지으면서 전통가옥풍격이 변화되였지만 팔각지붕으로 연변지역 조선족가옥특색을 돌출하게 하였다.


           연변지역의 보편적인 부엌일각(20세기 50년대)

  길림성 연길시 조양천의 한 4간 초가집은 지붕이 앞, 뒤, 좌, 우 네개 면으로 된 우진각지붕인 함경도풍격으로 볼수 있다. 집주인을 만나지 못해 료해하지는 못했지만 외부구조와 건축재료 및 가옥풍격을 살펴볼 때 약 40~50년대에 건축한것으로 추정되는데 보존상태가 량호하여 역시 전통가옥을 연구하는데 훌륭한 실물이다.

  몇년전에 동북3성의 조선족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니 조선족의 초가집이 기본상 사라지고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이 비여있지 않으면 무너져가고있었다. 그리고 일부분 한족들이 조선족초가집에 살면서 대문에 주련을 붙였는가하면 조선족들도 한족들과 같이 대문에 주련을 붙여 집주인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조선족이 사는 집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많은 조선족들은 벽돌기와집이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있고 경제조건이 차한 극히 개별적인 가정에서만 낡은초가집에서 살고있는 원인으로 아직은 조선족 초가집을 볼수 있다. 경제발전이 빠른 지역일수록 초가집이 빨리 사라졌다. 가옥은 한 지역의 경제발전 그리고 한 가정의 경제상황과 밀접한 련계가 있다. 조선족의 가옥문화가 점차 현대화의 문화주택으로 변화하고있는것은 그 지역 조선족의 경제발전과 물질, 문화 생활이 제고되였음을 충분히 말해주고있다.

  조선족초가집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후세에 남겨준 건축예술작품이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이 거주하며 살아왔던 조선족전통초가집이 점차 사라져가는 지금 전형적인 조선족전통초가집을 선정하여 유형문화유산으로 영구히 보존, 보호해나갈수는 없을가고 생각해본다. 인터넷요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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