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氷谷
장혜영3장 뜨거운 호수
2
준호가 택시를 타고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5시였다. 택시에서 한잠 잤으나 술기운은 여전히 말끔하게 털어버리지 못했다. 계단을 올라가기가 숨이 차고 걸음이 비틀거렸다.
무심히 미닫이를 열고 방 안에 들어서던 준호는 뜻밖에도 아버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부친은 방 가운데 장승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키가 껑충하고 허리는 구부정했으나 거창한 체구 때문에 방 안이 갑자기 비좁아 보였다. 공사판에서 햇빛과 바람에 꺼멓게 그을고 탄 얼굴, 푸시시 헝클어진 머리카락……. 오늘따라 더욱 낯설어 보였다.
아버지는 냉엄한 눈길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게다가 부친의 장신, 거구가 던지는 그늘은 준호를 덮어버릴 듯 심신마저 짓눌렀다. 벌써 저 그늘 밑에서 진옥의 싱싱하던 청춘이 시들어버렸다. 자식한테 엄하기만 하고 자애롭지 못한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도 부친이 아닌 그냥 당 간부였다. 마주앉기만 하면 훈시뿐이었다. 그렇게 원칙에만 집착하는 아버지여서 싫었다.
“명색이 박사 공부한다는 녀석이 밤새 어딜 쏘다니다가 새벽에야 기어드는 거냐?”
아들의 무절제한 사생활에 추상같이 노한 듯싶다. 그러나 준호는 오늘만큼은 기가 죽지 않았다. 아직도 증발되지 않은, 혈관 속을 누비는 술기운을 빌어 용기를 추슬렀다.
“한종수 노인을 취재하러 갔댔어요!”
“한종수라니?”
최영식은 자리에 앉다 말고 엉거주춤한 채 아들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궐련갑 안에서 담배를 꺼내다가 동작을 멈춘 그의 손은 유난히 거칠고 투박해 보였다.
“아직도 살아있다던 그 한지주의 아들 말이냐?”
“네.”
준호는 며칠 전에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려 주었다. 그때 아버지는 준호더러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꾸짖었다.
“아니 그럼 그 작자가 정말 살아있단 말이냐?”
“네.”
“이런 환장할! 네 할아버진 분명 그 작자가 죽었다고 하셨잖냐. 그런데 살아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저도 아직 사건의 상세한 시말은 모릅니다.”
“그건 그렇고 이 미친 녀석아! 설사 그 작자가 살아있다 해도 그렇지. 네가 왜 그놈을 만난다는 거냐. 그 자식은 우리 가문하고는 철전지 원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 할아버지한테서 피맺힌 과거사를 귀 아프도록 듣고서도 그 영감탱이를 찾아가.”
최영식은 갈고랑이처럼 구부정한 손가락을 펴들고 준호의 얼굴을 찌를 듯이 사납게 삿대질해댔다.
“자료 수집 때문에…….”
“자료는 무슨 썩어빠진 자료 수집이야.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쓰면 될 걸 가지고. 그놈한테서 무슨 들을 말이 있다고.”
최영식은 몇 번이나 라이터를 켜서 겨우 불을 붙인 담배를 몇 모금 뻑뻑 빨아대고는 기침을 쿨룩거리더니 금방 재떨이에 비벼 껐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었던지 담배는 볼품없이 옆구리가 터져 볼품없이 속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전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공정한 책을 쓸 겁니다. 만일 제가 할아버지의 말씀 대로 글을 쓴다면 한종수는 또 자신의 손녀를 시켜 자기가 구술한 대로 글을 쓰도록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방적 기술은 전쟁의 절반 모습밖에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전쟁의 전모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이념을 떠나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재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놈을 만나서 무슨 좋은 소리라도 들었냐?”
“그분도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쓰지 않으면 전쟁담을 들려 줄 수 없다며 취재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울적하던 차 그분 손녀와 술 한 잔 하고 오는 길입니다.”
술 한 잔이 평소 말수가 적은 그더러 횡설수설 수다를 떨게 했다.
“그놈 손녀하고는 또 어떤 관계냐? 진작부터 알고 있던 사이냐?”
나와 유리가 어떤 사이인가?
준호 자신도 아리송했다. 두 번을 만났고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했다. 술도 마셨고 호수공원에서 이인용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도, 성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저 그것뿐이다. 유리가 아닌 다른 어떤 인연 있는 아가씨와도 가능할 수 있었던 그런 관계일 뿐이다.
아니다. 준호는 유리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 남다르다는 걸 그녀와 만났던 그 첫 순간부터 느꼈다. 두 번의 만남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준호의 기억 속에 그녀의 모습을 깊숙이 심어 놓았다. 육교를 내려가는 계단 위에서 있었던, 그 순간의 접촉은 유리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 분명 유리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또 아직까지는 호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설마 좋아하는 사이는 아니겠지?”
아버지의 누렇게 뜨고 핏발이 선 눈길이 준호의 표정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종수와 아들의 관계가 취재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 손녀와의 애정관계로 비약할까봐 두려운 모양이다. 원수가 사돈이 되고…….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수락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다시는 한종수의 손녀와 만나면 안 된다. 그 애의 할아비는 네 큰할아버지를 죽인 원수란 말이다. 그러니…….”
당 간부다운 아버지 특유의 훈시가 또 시작된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념과 사랑은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되는 원칙문제이다. 입당 연령 30년, 당 간부경력 15년이라는 그 기나긴 조직생활은 아버지에게 인생과 사회문제는 물론이고 가정의 대소사와 사생활까지도 당의 원칙을 척도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주었다. 당에 대한 이러한 절대적 충성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과 적대시로부터 시작되고 연장될 수밖에 없다.
“난 한국을 조상의 땅이라는 의미에서는, 동포의 나라라는 의미에서는 애착을 느끼지만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모방한데 대해서는 저주한다. 소수의 자본가들만의 천국이 아니냐. 노동자는 개, 돼지보다 못한 천대와 학대를 받고. 넌 아마 공사 현장에 가보지 못해 모를 거다. 이 애비랑 돈 있는 놈들에게 어떤 수모와 천대를 당하는지 알기나 하느냐.”
당 생활에서 몸에 밴 아버지의 교육과 비판은 언제부터인가 준호에게 강요와 세뇌로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준호의 인생관, 가치관은 아버지보다 세련되고 성숙된 만큼 교육을 받을 쪽은 준호가 아니라 당연히 아버지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권좌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 신분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냐. 할아버진 인민군 출신이고 아버진 당 간부이고 너 또한 나라에서 육성해낸 대학생이고 국비유학까지 나온 볼셰비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 전 정말 신분이라는 올가미에 목매어 근시안이 되고 싶지 않아요.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를 위해 뭔가를 기여하고 싶습니다.”
“되지도 않을 소린 그만해라. 계급을 떠난 인류란 있을 수 없어. 정녕 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등지고 조국과 신념을 배반할 수 있겠니. 그건 효도와 애국을 동시에 포기하는 행위다.”
“우리의 조국은 이곳일 수도 있잖습니까.”
“조국이 뭔데. 조상의 땅이냐 출생한 땅이냐. 아니면 이념과 신념을 함께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냐.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조국이냐? 남북이 같은 조국이 아니어서 분열되고 6.25전쟁을 치렀냐. 조상이 같다는 것보다 이념이 같다는 게 더 중요한거야.”
이념을 같이 한다. 그러고 보면 6.25는 피보다는 이념을 더 중히 여겨 발발한 전쟁임이 틀림없다.
아버지의 이런 고정불변의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 때문에 준호는 진옥이와 아픈 이별을 해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이념이 이별의 구실이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포라는 사실도 결코 이념보다 가치가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 꼭 한종수 노인을 취재할 거예요. 그래서 6.25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릴 거예요.”
‘그래 어디 네 맘대로 해 보거라. 고얀 놈!“
최영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옷걸이에서 때 묻은 점퍼를 와락 벗겨 입는다.
“아니, 식사나 하고 가세요.”
“몸이 불편해서 며칠 휴식하려고 왔다만 네가 하는 꼬락서니가 눈꼴사나워 못 있겠다.”
“아버지.”
최영식은 팔소매를 잡은 아들의 손을 사정없이 뿌리치고는 우락부락 밖으로 나가버렸다. 원칙 앞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아버지다. 쿵덕쿵덕, 계단이 구둣발에 짓밟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준호는 밖에까지 나와 언덕을 내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꾸부정한 등에 허름한 공사판 가방을 둘러멘 아버지는 거구인데도 불구하고 왜소해 보였다. 아버지의 인생은 당신의 신념 때문에 가치 있는 것만큼 또 신념 때문에 고달플 것이다. 아버지가 걸어 내려가는 골목에는 아직 햇빛도 들지 않았고 행인도 드물었다.
준호는 술에 녹초가 된 몸뚱이를 간신히 이끌고 3층으로 올라왔다.
지은이는 지난밤에도 외박한 모양인지 미닫이문만 반쯤 열려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방에 들어오자 이부자리를 펴고 자리에 누웠다. 조반이고 뭐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눈을 감았으나 자꾸만 텅 빈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안쓰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밥은 지어드렸어야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인간적으로는 거짓과 가식을 모르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양심에 미안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정치 인생은 그분을 이념의 조종을 받는 하나의 기계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의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자연 환경, 경제 환경, 사회 환경, 문화 환경(종교, 풍습), 정치 환경, 계급 환경, 이념 환경……. 일단 자신에게만 주어진 이러한 환경을 이탈하여 다른 환경의 영역에 진입하기만 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부심리 또는 반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거부반응과 반감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잠시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도 적응되는 양 만큼 그러한 반응들도 감소된다. 준호도 처음엔 한국의 자본주의 생활방식이 눈에 거슬렸고 거부심리와 반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이념투쟁의 목적의식이 희미해질 만큼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되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아버진 그분이 배워온 ‘썩어빠진 자본주의사회’에 적응하기에는 너무나 힘들 만큼 당신만의 울타리 안에 굳게 갇혀있다. 마치 열대식물이 남극에서는 살 수 없듯이. 그렇다고 열대가 덥다는 사실이 북극이나 남극의 추위를 비난할 이유로는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북극이나 남극은 혹한을 이유로 열대 혹서를 평가절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다만 인간은 섭리에도 없는 이념을 만들어내어 인류사회를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고 있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념을 위한 희생물이 되고 있는가. 어쩌면 이념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요 제물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지금 적응이 아니라 반항하고 있다. 이념과 신념의 타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아버지…….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진옥이와 유리가 꿈속에 나타났고 망연한 표정을 지은 아버지의 구겨진 모습도 지나갔고 술에 취한 지은의 얼굴도 보였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전화벨소리에 잠을 깬 준호는 벽시계부터 쳐다보았다. 오후 2시 12분 42초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가 천근같이 무겁고 띵하고 두통이 극심했다.
“오빠!”
오빠라는 호칭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여동생도 없는 준호다. 그를 오빠라고 스스럼없이 불러 주었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진옥 한 사람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의 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유리 씨!
아니, 유리는 아직 한 번도 그를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준호 씨’라고 정중하게 불렀다. 오빠라는 호칭 때문에 혹시라도 넘을 수 있는 친분의 경계를 준호 씨라는 점잖은 호칭으로 절제하려는 뜻일까. 아무튼 유리는 두 번의 만남으로, 커피 한 잔과 술 몇 잔으로 호칭을 비약하는 그런 속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도 너무 보수적이었다.
“저예요. 비둘기.”
아, 비둘기! 그래 진옥이 말고도 나를 오빠라고 불러준 지은이가 또 있었지. 그런데 너무 쉽게 얻은 칭호여서인지 마음속에 각별한 의미로 와 닿지는 않는다.
“어디 계세요?”
어딘가 말마디들이 부서진 느낌이다. 과음 때문일 것이다.
“깜박 잠이 들었네요.”
“공부하신다는 분이 낮잠 자고 잘 하시네요. 부친도 함께 계세요?”
“우리 아버지가 오신 걸 어떻게 알고?”
“어제 오셨는데……. 오빠도 집에 안 계시기에 대신 식사 한 끼 대접하려니까 단마디로 거절하시던 걸요.”
“아, 그러셨군요. 아침에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럼 잘 됐네요. 지금 여기로 오세요.”
‘오실 수가 있어요?’ 하는 식의 예의바른 말은 지은에게서는 아예 기대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의 의사나 편의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수요가 무엇보다 우선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거기가 어딘 데요?”
“대학로예요. 르시엘카페. 혜화전철역에서 내려 카톨릭대학 쪽으로 오세요. 기다릴게요.”
통화는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이건 정중한 초대가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한 강요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건 그녀 특유의 호의라 이해하고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나갔다. 이도 닦고 세면도 했다. 반듯한 예의로 사람을 대하는 유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성격이라는 생각을 건지며 준호는 집을 나섰다. 그녀의 이런 스스럼없는 접근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큼도 그녀는 진중하지 못한 존재였다.
문화의 거리, 예술의 거리, 젊은이의 거리답게 낭만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대학로를 걸어 그녀가 기다린다는 르시엘카페로 갔다.
지은은 프랑스풍으로 장식한 스탠드바에 마주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표현한 특이하고 우아한 천장 디자인 아래에 앉아 6층 창 밖으로 대학로를 부감하며 칵테일을 마시는 지은의 모습은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대학로의 젊음과 낭만을 독차지하고 마음껏 농락하는 탕녀처럼도 보였다. 그 모습이 왜 멋스럽게 보이지?
“오빠, 어서 이리 와 앉으세요. 오늘은 제 지갑이 두둑하거든요. 한턱 쏠 테니까 우리 실컷 즐겨요.”
“어제 아침에 차려준 조반상이 고마워서 나왔습니다.”
절대로 호출에 응한 이유를 달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점수 따기 쉬운 걸 보니 오빤 착한 분이시네요.”
가까이에 앉아 자세히 보니 그녀의 웃는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그늘이 비껴 있다. 백옥같이 눈부신 하얀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녀가 거느린 전체적인 낭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버님께서 아마 저 때문에 화나셨을 거예요. 한국에 와본 소감이 어떠세요, 하고 물으니까 내가 미국 땅에 온 건지 일본 땅에 온 건지 헷갈리신다며, 무슨 놈의 나라가 이 꼴이냐, 돈만 많으면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 같아야지, 이러시는 게 아니겠어요. 한국에 대한 인상이 나쁘셨던가 봐요. 말씀을 하실 때 면부근육을 떨고 계셨거든요.”
준호는 우선 진토닉을 조금 마시고 그 맛을 음미했다. 연예인들도 자주 찾는다는 소문난 이름에 걸맞게 은은한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대신 체리와 레몬을 술 위에 띄운 카카오를 마시는 지은은 사치스러워 보인다. 준호도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사회상은 저 열악한 환경 속의 공사현장과 그 현장 속에서 고역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일용직노동자 즉 ‘노가다’들뿐입니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겠지요. 게다가 아버지는 중국에 사실 때 30년 당 생활 경력을 가진 볼셰비키였고 당 간부였습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아버진 이념의 포로입니다.󰡑라고 말했다가 한 달간이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준호는 그 말을 하면서 진옥을 생각했다. 아버지 때문에 진옥을 잃었다는 슬픔이 분노로 변해 이성을 잃은 말들을 마구 내뱉었던 것이다.
“아, 그러셨구나.”
두 사람은 잠시 동안을 비우고 창 밖의 대학로를 부감했다. 젊은이들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녔다. 그들의 밝은 표정만 봐서는 이 세상엔 도대체 눈물이나 슬픔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참, 오빠. 저한테 말 놓아요. 그래야 나도 편하고, 우리 오늘부터 남매처럼 친하게 지내요.”
“그래도 될까?”
준호는 어린애처럼 천진한 표정을 짓는 지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제의를 해올 수도 없겠지만 설령 꺼냈다 하더라도 그 상대가 유리였다면 준호는 선뜻 응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옥이와는 소꿉시절부터 친구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말을 트고 지낸 사이였으므로 그것이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은은 이제 만난 지 몇 번 안 되는데도 준호는 그녀의 청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빠, 지금 「6.25 참전자 실록」을 쓰고 있다면서? 머리 아프게 그런 글 왜 써. 이쪽저쪽 다 걸릴 텐데. 난 전쟁이요 정치요 하는 것들이 딱 질색인데 말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준호를 쳐다본다.
“6.25가 승부가 없는 비극적인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나의 호기심을 끌게 되었어. 지금까지 6.25전쟁에 대한 남북한 이론계의 쟁점이 누가 먼저 전쟁을 도발했는가, 하는 문제에 국한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어. 전쟁은, 특히 내전은 선제도발을 정의, 비정의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승리한 자에게 정의가 있다는 새로운 기준을 택할 필요가 있어. 적어도 승리한 자는 국방력과 경제력이 강하며 민심을 대변하고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순응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니까. 고려에 의한 3국통일, 진시황에 의한 중원통일이 그러한 훌륭한 실례라 할 수 있겠지.”
준호는 금방 술기운이 오르며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승부는 그 원인이 쌍방의 어느 쪽에도 명분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잖아.”
“그렇지. 6.25전쟁은 영토완정과 민족 정체성보다는 이념의 통일, 체제의 통일을 시도했기 때문에 명분을 얻지 못한 거야. 명분을 잃으면 힘을 잃게 돼. 남북한은 외세에 의해 자주권을 상실했어. 이념적으로는 그들의 총알받이, 꼭두각시 전쟁을 한 셈이 되었지. 전쟁의 발발도 강대국의 간섭이 원인이 되었고 전쟁의 무승부 역시 강대국의 간섭이 원인이 되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어. 강대국의 간섭이 없었다면 설령 명분 없는 (어떤 체제와 이념 자체가 정의가 될 수 있는 만큼) 전쟁이었을지라도 승부는 결판났을 것이고 통일은 되었을 거야. 남북한 쌍방은 다 진정한 영토완정과 민족화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부가 나지 않았던 거지. 그건 강대국도 원하지 않았어. 남북한은 물론 강대국들에게도 이념과 체제의 보존이 통일보다 더 중요했던 거야. 누구도 그 앞에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 민족은 이념과 체제를 위해 분단의 아픔을 앓는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로 되고 말았어.”
사람들의 눈길이 이따금 포연이 자옥한 이쪽으로 쏠리며 그들의 화제에 귀를 기울였지만 준호는 그런 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이런 우아한 곳에서 전쟁과 같은 살벌한 화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미 도화선에는 불이 달린 뒤여서 중단하기는 어려웠다.
“정말이지 이념과 체제를 떠난 사회와 인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질식할 것만 같아. 인간이 왜 이념의 노예가 돼야지? 우리 이런 골치 아픈 말은 그만하고 자리를 옮겨 기분전환 하는 게 어때?”
“어딜 또 간다고?”
“따라 와보면 알거 아냐.”
지은이가 준호를 데리고 간 곳은 롯데월드였다. 민속박물관을 대충 관람하고는 놀이동산으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 위에 매달려 돌아가는 풍선차도 타고 낙차가 큰 경사면을 굴러 떨어진 뒤 구불구불한 인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쪽배도 탔다. 지은은 잠시도 쉬지 않고 뭐라고 재잘거리고 깔깔거렸다. 때로는 준호의 팔을 끼기도 하고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교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녀는 호화롭고 사치스럽고 즐거운 놀이장의 환락 속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이렇게 맘껏 즐기는 거야. 무엇 때문에 이념과 체제로 자신을 구속하고 전쟁을 해야 하는 거지.”
쪽배가 가파른 낙차에서 급강하하며 사람을 아찔한 공포 속에 빠뜨리는 순간 지은은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지르며 준호의 품안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날 육교의 계단에서 비틀거리다가 그의 품에 안겼던 유리처럼. 그러나 그때와 너무나 흡사한 상황이건만 다가오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지은은 어느 모로 보아도, 지금처럼 이렇게 그녀를 품에 안고서도 동생처럼 보였다. 웬일인지 이성으로는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녀가 결코 유리보다 몸매가 섹시하지 못하다거나 미모에서 뒤져서가 아니었다. 지은의 몸매는 유리보다 오히려 더 날씬하고 섹시했다. 미모도 막상막하였다. 그런데도 여자로 느껴진 쪽은 유리였다.
지은이 역시 남자의 품에 안기고서도 쑥스러워하는 기색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그녀도 준호를 오빠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 쑥스러움의 원인으로 되는, 유리에게만 있을 법한 그 순결함이 이미 어딘가로 증발되어서일까? 그만큼 남자들을 많이 겪어보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유리를 품에 안았을 때의 그 떨림은 아직도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순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온갖 놀이기구를 죄다 타보며 즐겼다. 준호는 중반부터 벌써 즐거움보다는 피로를 느꼈지만 지은은 이런 생활에 인이 박힌 듯 도저히 지칠 줄을 모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놀이동산을 나설 때까지도 명랑함이 시들지 않았다.
“어때? 까짓 이념이요 전쟁이요 하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쌓인 스트레스 확 풀렸지?”
“즐기는 것도 도를 넘으면 고통인 것 같아. 체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지은의 사유는 세상에 대한 싫증과 체념 때문에 얼핏 경박해 보이기 쉬운 겉모습과는 달리 가끔씩은 예리한 판단력으로 지적인 순발력을 보일 때가 있었다.
“오빠 말대로라면 전쟁의 고통도 어떤 의미에서는 즐길 수 있다는 거네.”
“어떤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다는 말이지. 그들에게는 전쟁이 이념게임 같은 거라고나 할까?”
“오빤 전쟁이나 이념이 아니면 할 말이 없나 봐. 제발 오늘 하루만은 그 말을 하지 말고 나랑 화끈하게 놀아 줘. 부탁이야.”
“그만큼 놀고도 아직 소원을 끄지 못했어.”
“아직 초저녁이잖아. 오늘 하루만 나한테 오빨 빌려주라.”
지은은 그를 데리고 민속관 저잣거리로 들어갔다. 옛날 저잣거리를 재현시킨 식당가는 곳곳에 천막과 대나무울타리를 둘러막고 정원에는 멍석과 평상까지 놓여있었다. 구석에서는 손님들을 향수에 젖게 하는 물레방아가 철써덕철써덕 돌아갔다.
누엣골주막으로 들어가 높직한 평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줌마, 홍어회 이인분하고 안동소주 한 병요.”
지은은 단골인 듯 메뉴판도 보지 않고 얼음 위에 박밀 듯이 음식을 주문했다.
그녀가 인생을 물질적으로 향수한다면 유리는 정신적으로 향수한다는 데 차이점이 있었다. 자취방 살림을 엿봐선 자금줄이 굵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호화로운 곳의 단골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긴 사람의 능력이란 제각각이서 알 수가 없지만.
“안동소주는 육회를 안주 삼아 밥뚜껑으로 마셔야 제 맛이 난대. 예로부터 이 안동소주와 안동포는 안동의 특산물이잖아. 45도 순 곡주인데 은은한 향기가 좋아 이전에는 일본과 만주까지 소문이 널리 퍼졌대.”
지은의 지혜는 평범한 일상 속에 묻혀 사라져가고 있는 문화를 상기시키는 데서 나름대로 그 특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또 술이야. 간단히 식사나 하고 말지.”
“안 돼.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활력소를 갖고 있거든. 술이 없이는 나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어.”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안 준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좀 고통스럽더라도 덕을 쌓는다 생각하고 참아주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그녀를 위해, 그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은이네 부모는 부잔가 봐. 돈을 이렇게 물 쓰 듯 하니 말이야.”
남의 집 경제사정을 캐묻는다는 게 결례인줄 알면서도 아까부터 그림자처럼 의식을 쫓는 호기심을 끝내는 떨쳐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수익의 다소는 곧 능력의 차이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가장 쉽게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예민한 문제였다. 그러나 지은이라면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부자냐고? 호호호……”
그녀는 갑자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더니 생각할수록 더 우스운 모양인지 이번에는 아예 식탁 위에 머리를 떨어트리고 손으로 준호의 어깨까지 치며 웃어댔다. 주위 사람들의 못마땅한 눈길들이 이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준호는 그만 당혹스러워졌다.
“왜 이래? 남들이 다 보잖아.”
“볼 테면 보라지. 누가 뭐 훔쳐 먹기라도 했어.”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마디들을 웃음으로 둘둘 말아냈다.
“오빠도 정말 웃기네. 부자가 뭐 따로 있나, 부자처럼 살 줄 아는 사람이 부자잖아. 부자라도 거지같은 사람이 있고. 그잖아.”
그 말에는 동감이다. 돈 앞에서는 벌벌 떠는 인색한들이 어디 한둘인가?
지은은 웃음을 그치고 준호의 잔에 그 유명하다는 안동소주를 쪼록쪼록 따랐다. 하얀 색깔의 특제 자기병의 볼록한 곡면에 『안동소주』라는 고딕체 브랜드가 선명했다. 정말이지 명주를 따르고 있는 지은은 이 순간 부자처럼 보였다.
“내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면 오빤 믿을 거야?”
“글쎄?”
전혀 예상 밖의 말에 준호는 처음엔 장난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지나쳤다.
“울 엄마가 노래와 춤을 팔다가 가다오다 만난 탕아와 뒹굴어서 낳은 아이라면 오빤 믿을 거냐고?”
“지은아…….”
준호는 지은의 음성에서 굴러 나오는 웃음소리가 떨리며 축축하게 젖어듦을 느끼고 다시 한 번 당황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가슴 깊숙이 묻혀 있던 어떤 불행과 슬픔의 상처를 건드린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꿈틀거렸다.
“그래 난 아빠가 누군지도 몰라. 게다가 서출이고. 그런데는 어쨌다는 거야. 난 외조부를 보지도 못했어. 보지도 못한 외조부가 빨갱이라는 오명 때문에 온갖 사회적 소외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했어. 보지도 못한 외조부가 인민군인데 내가 왜 이 사회의 외면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지. 왜?”
그녀는 취해있었다. 그런데도 준호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지은의 말에는 뜻밖에 깊은 한이 서려있었다. 그녀가 전쟁과 이념을 질색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엄마는 나를 낳았다 뿐이지 엄마로서의 책임을 진적은 한 번도 없었어. 돈 한 푼 보내 주지 않았어. 도리어 내가 엄마한테 조금씩이나마 용돈을 부쳐주고 있어.”
“너한테 무슨 돈이 있어서?”
호기심은 결례쯤은 안중에도 없이 의식의 하늘에 군림한다. 본의 아니게 준호는 강력한 호기심에 떠밀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잔인한, 아픔 때문에 신음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할 만큼 잔인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러한 지독함이 마음속에 있는 한 그 역시 이념을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전율했다.
“돈 있는 날에는 포식하고 없는 날에는 굶고 이렇게 되는 대로 사는 거지 뭐.”
“혹시 아르바이트라도?”
지은은 고개를 잔뜩 쳐들고 준호의 얼굴을 쳐다본다. 과음으로 그녀의 눈은 이미 흐물흐물 풀려있었다.
“그래. 알바인 겨, 알바허는 겨. 돈 이따 만큼 버는 알바인겨. 키득키득.”
웃는지 우는지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틀어박고 어깨를 들먹였다. 술에만 취하면 나오는 충청도사투리도 서서히 포문을 열기 시작이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집에 가자.”
준호는 계산을 하려고 평상에서 내려와 카운터로 걸어갔다.
“안 되능 겨. 오늘은 안 되는 겨. 오늘은 내가 쏘는 날인 겨. 내 성의를 무시하지 말어유.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자존심을 꺾지 말혀.”
지은은 준호의 팔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그녀는 예의를 넘어 거의 애걸하고 있었다. 오늘의 계산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만큼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할 만한 수많은 가치 있는 것들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라도 그녀의 존재의미를 살려줄 수 있다니 준호는 꺼내들었던 현금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적어도 그녀의 존재가 준호를 위해서 의미가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이 측은했다.
“우리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폭탄주를 마시는 게 어뗘?”
“제발 술은 그만 해. 몸 가누기도 어려워하면서.”
지은은 준호의 팔을 꼈으나 걸음을 비틀거렸다.
“그랴. 대학로에 다시 가는 겨. 「오감도」라는 레스토랑이 있구먼유. 분위기가 괜찮녀유. 맥주 한 잔씩만 더…….”
“됐다니까. 다음날 또 마셔. 그날은 내가 살게.”
“얼레. 오늘은 내 맘대로 해야 혀. 오늘 오빠가 불 지른 이념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밤거리를 이 비둘기가 평화의 씨앗을 파종헐 거구먼유.”
무작정 택시를 불러 탔다.
들어간 곳은 「오감도」가 아니라 「부리도」라는 웨스턴 바였다. 맥주 두 컵과 마른안주 한 접시를 시켰으나 두 사람은 이미 술이 과했던지라 마시지는 못하고 지루한 화제만 늘어놓았다.
“난 이념이요 정치요 국가요 전쟁이요 하는 말들이 죄다 싫여. 자유와 민주도 싫고 독재와 평등도 싫여. 아니 인간자체가 싫은 겨. 진정한 자유는 자기 맘대로 사는 게 아니겠어유. 오빠, 그지?”
“그건 극단적인 염세주의이고 퇴폐이고 타락이야.”
“오빤, 몰러 멀 몰러. 그래도 권세가, 정치가들의 드러운 비리보담은 나을 거여.”
지은은 이미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했다.
준호는 거의 강제이다시피 그녀를 부축해 세웠다. 안주는 젓가락하나 대지 않은 채였다. 카운터에 가서 계산하려고 했으나 지은은 한사코 오늘은 자신이 계산한다고 우긴다. 그러나 그녀의 지갑은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달랑 천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백 원짜리 동전 대여섯 개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녀는 준호를 계산하지 못하게 막아 나서며 그녀만의 특유한 계산법을 써먹으려 했다. 핸드백 안에서 주민등록증과 휴대폰을 부스럭부스럭 뒤졌다.
준호는 그녀의 등 뒤에서 직원에게 눈짓하여 우선 받아두게 했다. 그러나 밖에 나온 다음 라이터를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카드를 긁고 휴대폰과 주민등록증을 찾아내왔다.
택시에 앉자마자 그녀는 금방 잠이 들었다. 준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코까지 가볍게 골았다.
오늘 지은이가 쓴 돈은 과연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일까? 자꾸만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지은은 왜 이처럼 타락했을까? 오늘 그녀가 우연하게 들려준 그녀의 출신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갈수록 그녀가 신비해졌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