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만의 절규, "아저씨, 나는 호로자식이 아님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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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만의 절규, "아저씨, 나는 호로자식이 아님데이"
  • 유대지
  • 승인 201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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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 " 야! 호로자식 놈이 우리애를 때려?"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때인가, 그해 여름날 뒷집에 살던 사십대 김씨 아저씨가 나에게 내뱉은 충격적인,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다. 이 말과 동시에 억센 그분의 팔이 내 등어리를 수차례 내리치고 뺨까지 때렸다. 어린 나는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그날 당하고 말았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오십이년전 일이다.

사건의 발단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분의 둘째 아들은 나보다 세살이 아래였다. 그날 나는 뒷방문쪽으로 누워있었고 그는 우리집 뒷골목을 끼고 자기집으로 가는중에 엉성한 목재울타리 틈새로 나를 보고 놀리면서 자기 집대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손아래 후배가 이렇게 나를 놀리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화가 나서 나는 그를 붙잡으러 뒤쫓아가는 길에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던 그의 아버지를 만나 이렇게 당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아마도 평소 나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던지 사건의 전말도 알아보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그날 아주 화난 얼굴로 나를 그렇게 다구쳤던것이다.그리고 내뱉던 그분의 이말이 이렇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나의 뇌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왜 그분이 그런 막말을 나에게 했을까? 그렇다. 바로 그때 나는 부모가 안계신 아이였고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괜찬다는 그분의 판단 때문일것이다. 그때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과연 그분이 어린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나의 아버지는 경북 경주경찰서 안강 지서장으로 근무하던중 1949년 3월경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면 두류리 전투에서 순직했다. 전사에 따르면 6.25발발 한해전인 그해는 국민들이 죄익,우익으로 나뉘었고 유독 빨치산들의 활동이 심했던 그 당시였다. 선친은 애국청년단 두 명과 관내를 순찰하던 도중에 산속 초갓집에 들려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미 인근 산속의 빨치산과 내통하고 있었던 그 집주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이십여명의 빨치산부대원과 총격중에 장렬히 순직하시고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 경찰 묘역에 잠들어 계신다. 바로 건국의 경찰이신 유귀룡(劉 貴龍,전사당시 27세)경위와 원옥잠(元玉潛)여사 사이에 삼대독자,유복자이고 전몰군경 유자녀로 울산에서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나를 다 키우고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생전에 시간이 있을때미다 나에게 들려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바로 1949년 안강 두류리전투를 말한다. 그 전투로 인하여 경주시 안강면민들의 안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고, 인근에 주둔해있던 군경이 합동으로 그 빨치산들을 모두 토벌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에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시고 나는 할머니 슬하에서 비운의 유년기를 보내게된다.6.25전몰군경유자녀로서 걸어온 내 이야기를 어찌다 할 수 있겠는가? 그 유월전쟁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말할것도 없고 나의 인생도 추락할때까지 추락했다.바로 멸문지화의 가문이 된 것이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얼굴도 모르는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두 장 남은 선친의 흑백사진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남모르게 그리워하고 있다. 이제 내나이도 환갑을 넘겼다. 처와 슬하에 네 딸을 두고 사십년 가까히 공직생활을 접고 이제 보훈처산하 공법단체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워서 나는 1994년부터 휴전선과 38선을 17년째 달리고 달리면서 아버지를 속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6.25발발 50년을 맞이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워싱턴~ 센프란시스코~ LA까지 4,000km,13개주, 북미대륙 38선을 사상 처음으로 자동차로 10일간 달리면서 전세계에 조국의 평화를 알리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그 칠흑같은 어둠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수기집 원고도 완성단계에 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이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바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전쟁의 무서움과 가정의 소중함을 국민과 전후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다. 이제 유월이 다가오면 더욱더 아버지가 오매불망할것이다. 정부는 이번 호국보훈의 달에는 국민들에게 열린 보훈정책으로 다시는 내가 그때 당한 그 비극의 일처럼 우리유자녀들에게 사회적인 편견이 없는 프로그램을 국민들에게 선보여야할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충원에 잠들어 계시는 호국영령들에 대한 국가의 도리가 아닐까.
( 아저씨, 저는 호로자식이 아임데이. 당신과 가족을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의 자식임데이)
그때 외쳐보지 못한 절규를 나는 오십이년만에 이렇게 외치면서 마음의 올가미를 풀어 헤치고 싶다.(유대지  010-6255-9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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