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리 '장정'을 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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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리 '장정'을 하던 날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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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수기

[서울=동북아신문]중국문화대혁명의 특산이라할가 1966년은 전국적으로 홍위병<대장정>열이 일었다。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으러 수천수만의 대중학교 홍위병들이 북경을 향해 대장정을 했는데 그들은 처음엔 도보로 걷다가 후에는 시간이 늦어 미처 접견을  받지못할가봐 아예 자동차나 기차를 갈아타고 북경으로 갔다.

그때 겨우 열두살인 나는 흑룡강성상지현 모아산공사 삼련소학교(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이런 위대한 장정이 우리 소학생홍위병에겐 차례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학교 홍위병들은 그저 부러운 눈길로 한패 또 한패의 홍위병장정대오를 바랠수밖에 없었는데 그야말로 맹랑했다. 그때 마침 누군가 기발한 착상을 내놓았다. 우리는 중학교홍위병들처럼 북경까지 먼거리장정은 못하더라도 가까운곳으로 한번 <장정>을 다녀오자고, 그래도 명색이 홍위병인데 <장정>한번 못해봐서야 되겠는가고? 이에 다들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는데 토론끝에 모아산진에서 30리밖에 떨어진 산골학교인 기풍조선족소학교까지 갔다오되 왕복거리가 60리이므로 이번 장정을 <삼련소학교홍위병60리장정>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이래서 늦가을의 어느날, 우리 30여명 홍위병들로 구성된 장정대오는 남기웅학생과 림영찬학생을 팀장으로 그들의 인솔하에 기풍마을을 향해 장정을 떠났는데 남자선생님 두 분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 동행했다. 명색이 홍위병장정이라 우리는 저마다 가방을 하나씩 어깨에 가로메였는데 가방안에는 점심도시락뿐이여서 별로 무겁지는 않으나 필경 산길을 걷는 먼거리행진이라 애들에게 있어서는 그것도 하나의 짐이였다. 모아산진에서 기풍마을로 가는 길은 대부분이 울퉁불퉁한 산길인데 비록 가파롭지는 않지만 크고작은 산을 몇개나 넘어야 했다. 농촌애들이라지만 필경 평소에 늘 산판에 나다니는 애들이 많지 않고 또 다들 나이가 어리다보니 애들은 절반도 못가서 숨이 차고 힘들어서 헐떡이였다.

특히 여자애들이 더했다. 게다가 아침에 떠날 때는 꽤나 쌀쌀하던 날씨가 한낮이 되자 기온이 오르며 여간 덥지 않았다.적잖은 애들이 날씨가 차다고 아침에 옷을 두툼하게 입고왔다. 그래서 다들 팀장더러 좀 쉬고가자고 졸랐다. 그러자 팀장은 장정인만큼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발양해야한다면서 이번 한번밖에 쉬지 못한다고 딱 다짐을 받았다. 그러자 다들 그 자리에 퍼드리고 앉았는데 나는 앉아서 쉴대신 이애저애한테 다가가서 물병을 넘겨주었다. 그때 나는 작은 아버지가 기풍마을에 살고 계셨기에 이 길을 한해에도 몇번씩 너무 많이 다녔으므로 아주 익숙해 별로 먼줄도 모르고 또 이 산길이 힘든줄도 몰랐다. 때론 한여름에도 이 30리 산길을 별로 무서운줄 모르고 홀로 오갔다.워낙 한번밖에 쉬지 않기로 했지만 결국 그날 우리는 두번을 더 휴식하고서야 기풍마을까지 갈수 있었다.

기풍소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때였는데  간단한 환영식에 이어 인츰 점심식사를 하게 됐다. 내가 간다는것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있던 사촌동생은 환영식이 끝나자마자 나를 자기네 집에 가자고 잡아끌었다. 작은어머니가 이미 점심준비를 다 해놓았다는것이다. 하지만 고지식한 나는 그것을 끝내 거절하고 사촌동생을 떠나보냈다. 떠나올 때 팀장이 점심식사를 통일로 한자리에서 같이 하되 누구도 친척이나 친구네 집에 가서 하면 안되며 점심후에도 개별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딱 을러맸기때문이다. 이로하여 후에 작은아버지네 집에 갔을 때 작은어머니한테 단단히 핀잔을 받았다. 여기까지 와서 작은아버지네집을 놔두고 밖에서 찬밥을 먹는법이 어디 있는가고.. 물론 나는 작은어머니의 나에 대한 그 사랑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다.

그날 우리는 기풍소학교에서 겨우 한시간을 머물고 다시 귀로에 올랐는데 이미 익힌 길이고 또 귀로라서 그런지 걸음도 많이 빨라졌고 또 한번밖에 쉬지 않고도 집에까지 갈수 있었다.물론 그날 집에 돌아가서는 다들 녹초가 되였었지만 이튿날부터 우리는 두고두고 이번 장정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다른 애들에게 들려주었으며 그로하여 자호감을 느껐다. 남들은 하찮게 볼 일이지만 어린 우리에게는 이번 <60리장정>이 하나의 큰 장거였던것이다.

그렇다. 오늘도 우리가 <문화대혁명>을 잊지 못하는것은 열광에 떴던 그 시절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추억거리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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