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남여행르포] LA-로스앤젤레스(洛杉矶)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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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남여행르포] LA-로스앤젤레스(洛杉矶)에서(3)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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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우리는 라스베가스의 도박 유혹을 뿌리치고 LA로 향하였다. LA-로스엔젤레스 도시는 미국 전체에서는 둘째, 서부 지역에서는 첫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미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LA는 전 세계의 문화.과학. 기술 국제무역과 고등교육의 중심도시의 하나이다. 특히 영화산업, 방송, 텔레비존, 음악은 국제적인 명성과 함께 세계적인 기초교육의 요람지이다.

▲ LA전경

로스엔젤레스에서 동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지점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놀이동산인 디즈니랜드가 있다. 1955년 개장한 이래 지금까지 약 2억700만 명 이상이 다녀간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세계 모든 어린이들의 꿈과 놀이의 동산이다. 약 25만 평의 광활한 대지 위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건설된 디즈니랜드는 크게 7개 주제공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모험의 나라, 미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 꿈의 나라, 뉴올리언스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스앤젤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할리우드다. 영화를 테마로 한 다양한 놀이기구로 유명한 유니버설 스튜디오 역시도 LA를 거론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다. 항공기· 로케트· 미사일 산업, 전자공업이 발달하였고, 근교의 과일재배는 이 나라 제일을 자랑한다.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여 봄에서 늦은 가을까지는 비가 오지 않고 건조하며 공기가 맑으므로 영화 촬영소가 집중하고, 겨울도 따뜻하여 건강에 좋다. 시가지는 평면적으로 뻗어 있는데, 그 면적의 절반을 도로와 주차장이 차지한 ‘자동차시대의 도시’로서도 유명하다.

2006년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약 385만명이고 ,백인은 로스앤젤레스 인구의 48.7% 이고, 흑인은 9.9%, 인디언은 0.5%, 아시아계 미국인은 10.6%이었다. 그리고 히스패닉과의 혼혈이 인구의 48.5%를 차지했다. 385만 인구 가운데 ‘백만장자’만도 약 25만 명에 이른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만 노숙자가 10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

대량적인 이민으로 도시절반 인구가 이민자인데 구역구역이 자기의 이민자타운을 형성하고 생활하고 있으며 종교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많고 종교 활동이 가장 활발이 진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1973년에는 토머스 브래들리가 로스앤젤레스의 첫 흑인 시장이 되어 20년간 그 직위에 있었으며 2005년에는 안토니오 R.빌라라이고사가 도시의 첫 히스패닉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1994년 1월 17일에는 지진이 일어나 57명의 사람들이 숨졌다.

1932년과 1984년에 하계 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한 도시이다. 또한 유명한 사건으로는 1992년 4월에 벌어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있었는데 이 폭동으로 코리아 타운의 한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었다.

1991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교통 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폭행으로 보이는 무차별 구타가 있었다. 이 경찰관 폭행 사건은 법정에서 배심원들에 의해 가볍게 처리되었다.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로드니 킹을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 백인에 비해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젖어 잠재적 폭발 요인을 안고 있던 빈민층의 흑인 사회(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가 폭발, 시위가 번졌고 급기야는 6일간의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코리아타운을 주로 약탈 타깃으로 삼아 방화를 하는 등 치안부재의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이때의 약탈·방화로 LA 한인 사회는 정신적·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ABC 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1991년 3월 16일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시켜 폭동을 악화시켰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두순자씨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해 말다툼과 몸싸움을 한 끝에 결국 두순자가 라타샤 할린스를 총격해 라타샤 할린스를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순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 판결로 인해 흑인들의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결국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이 흑인들의 주요 폭행 대상이 된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폭동은 주로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진행되었다. 폭동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5천만 딸라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근4억 딸라로 절반에 달한다.

그리피스 천문대

당시 LA 경찰국과 캘리포니아주의 국민병과 수천명의 육군과 해병대가 이 폭동을 진압 하였으며 근 일만 명을 체포하였는데 그중 아프리카인45%,아메리카인44%,백인9%,기타2%이다. 53명이 폭동 중 살해당하였으며 수 백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 53명중 35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8명이 사법단위의 총에 맞아 죽고, 2명이 국민병의 총에 죽고, 6명이 화재로 죽고, 2명이 몽둥이에 맞아죽고, 2명에 칼에 찔리여 죽고, 6명이 교통사고로 한명은 목이 졸려 죽었는데 25명이 아프리카인, 16명이 아메리카인, 8명이 백인, 2명이 아세아인, 알지리아 .인도인 중동인이 각 한명씩 죽었으데 48명이 남성이고 5명의 여성이였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2280여개의 상점이 약탈당하여 90%가 파괴되었다.

우리는 약 5시간을 달려서 저녁에 도착하여 먼저 차이나 타운을 구경하였느데 서울 대림동의 차이나타운보다 작은 규모인것 같았다. 우리는 절강(浙江)판점에서 오리고기로 저녁을 먹었다. 식당은 테이불이 약20개가 있었다. 손님이 2/3까량 되는데 모든 손님이 중국인이였다. 음식 값은 한국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오리탕(한마리)이 세수대야만한 그릇에 담게 나오니 우리는 기타 채소까지 먹다나니 다 먹지를 못하고 주인이 포장하여 주어서 호텔로 가져왔다.

호텔은 3성급정도나 되는 4층집이 였는데 뒤뜰안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어서 영하인 날씨에도 수영하는 호텔 손님이 있는데  우리는 추워서 엄두도 못 내였다.

이튼날 아침 식사는 코리안 타운에서 먹을 겸 코리안 타운을 승용차로 둘러 보았는데 서울 대림동 차이나타운의 2-3배는 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찾아서 간 식당은 아주 조용하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말투를 듣고는 어디에서 왔는 가고 하기에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연변에서 오셨군요. 연변에서 미국에 관광을 오셨어요?”하면서 놀라운 표정이였다. 안해가 딸 보러 왔다가 이렇게 관광을 온 것이라고 하니 “아. 그럼 딸님이 미국에 결혼으로 오셨구만요.” 하기에 나는 매나니 기분이 잡쳐서 다른 데로 가자고 하였다. 딸애가 중국어로 이미 주문을 다해놓은 상태인데 예의가 아니라고 하기에 그냥 눌러 앉아서 밥을 먹으니 무슨 맛인지 모르고 먹었다. 안해는 나의 급한 성질에 무슨 말이 튀여 나올지 몰라 조심스럼게 “이주인은 돈을 버느라 아침 일찍부터 일하는데 우리는 관광을 하니 우리가 더 났지 않는가요”하고 딸애도 조선족이 이곳에서 관광하는 것을 처음 보니 그럴 수 있지 않은가 하면서 첫날 관광을 기분이 잡치지 말자고 하였다.

밥을 다 먹고 딸애가 카드를 꺼내니 첫손님이라 현금을 주면 좋겠다고 하여 현금을 지불하는데 내가 보니 돈을 먹은 것 보다 더 내놓기에 계산이 잘못됐다고 이야기 하니 딸애가 팁이란다.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무조건 팁을 10%-20%를 주는데 법이 아닌 법으로 되였단다. 만약 내놓지 않고 나가면 밖에까지 쫒아 나와서 욕을 한단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밥맛과 기분에 돈을 내는데 일반적으로 저녁에 더 많이 낸단다. 아 이것이 선진문화인가...... 아니면 돈있는 사람들의 자랑인가.... 사실 나는 프랑스.인도 이태리.일본등 음식점을 다닐 때 카드로 계산하니 팁을 주는 것을 몰랐는데 딸애가 항상 추가로 계산하고 싸인을 하였단다.

우리는 승용차로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시내 건물은 모두 3층아래 건물로 10여층 이상 고층건물은 20-30개밖에 없는것 같았다. 지진위험 때문인지 아니면 땅이 넓어서 인지 아무튼 한국이나 중국처럼 고층건물이 적어서 답답하지 않고 탁 트인 기분이 아주 좋았다. 단지 차가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가나 길이 막히여 시간 지체가 많았다. 저녁에는 호텔 부근의 그 유명한 할리우드의 밤거리를 구경하였다. 사위가 호텔을 할리우드 근처에 예약하여서 걸어서 7-8분만에 도착하였는데 그날 저녁은 바람도 불고 유난히 추웠다. 영하 5도에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10도는 되는 것 같았다.

▲ LA부자동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였으며 절반이상이 우리와 같은 관광객이여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여m되는  영화거리에 진짜 사람이 얼굴을 칠하고 로봇처럼 서서 움직이는데 사람들이 그 로봇과 함께 사진을 찍고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었다. 거리 양옆 인행도 바닥에는  50cm*50Cm좌우의 銅(동)으로 주물 된 동판에 세계 유명한 연예인들의 이름이1m간격으로 박혀 있었는데 나는 내가 아는 중국 무술배우 이소룡과 마이클 젝슨의 이름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다. 영화관 앞에는 연예인들이 싸인한 필적과 손바닥 발바닥을 찍어놓은 콩크리트 바닥이 장식되여 있었다. 칸영화제 시상식을 하는 영화관은 아주 큰 줄 알았는데 중국의 작은 시내의 영화관 만한 크기였다.

LA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는데  코리아 타운은 케니디 대통령이 거리 유세를 하다가 암살자의 총에 맞아 Tm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침에 애들이 관광명소로 특히 박물관을 많이 소개하였다.

(1).그리피스 천문대; 우주의 신비를 보여주는 3차원의 천체쇼를 상영하는곳. (2). LA카운티 뮤지엄;흔히 라크마(LACMA)로 불리는 LA를 대표하는 국제 규모의 대형 미술관. (3).페이지 매모스 화석 박물관; 끈적한 타르지대에 빠져들어 자연화석이 돼버린 홍적세 시대의 각종 동물 화석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데 박물관 위치가 바로 이 타르지대다. 수 만 년전 매모스에서 원시인에 이르기까지 이곳 타르에 빠져든 옛 생명체의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4).게티센터 (5).게티 빌라(6).흔히 '모카'로 애칭되는 현대미술관이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현대미술 매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LA 다운타운 한복판인 2가와 3가 사이의 그랜드 애비뉴 선상에 위치해 있다. (7).캘리포니아 사이언스센터 자연사박물관 USC 대학 캠퍼스 인근인 엑스포지션 파크 내에 각각 자리 잡고 있는 이 두 곳은 과학을 주제로 한 전문 박물관이다.

애들은 열이 나서 소개를 하면서 하루에 한곳밖에는 볼 수 없단다. 우리는 들어도 잘 모르기에 애들보고 선택을 하라고 하니 게티 센타로 가잔다.

게티센타란 1983년에 j.폴 게티 트러스트라는 석유 재벌이 몇10억$을 투자하여 산타모니카 산기슭에 있는 750에이커 상당의 부지를 구매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 설계사 리처드 마이어를 선정하여 현대적인 건축과 j.폴 게트의 과거에 대한 뿌리와 미래에 대한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독보적인 스타일과 고전적인 재료를 결합하여 건축된 건물로 1997년12월에 개관되였다.

우리는 차를 산밑 주차장에 놓고 박물관까지 전문 경전철을 이용하여 올라갔다. 산 정상에 오르니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시내는 삼면이 산으로 에워싸이고 한면이 바다와 있대여 있는 옛날 같으면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풍수로 봐도 명당이였다. 건너편 산등성에는 할리우드란 큰 간판이 우뚝 서 있고 그 밑으로 산밑까지 주위가 온통 별장인데 대부분이 할리우드 명배우들과 부자들의  주택이란다.

박물관의 모든 건물의 외벽은 흰 돌로 건축되였는데 이 흰돌은 몇 만년 전의 화석으로 돌 자체가 나뭇잎 무늬와 동물의 뼈 무늬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돌 자체가 박물관였다.
 
박물관의 5개 전시관은 영구 소장품과 대규모 국제 대여 전시품으로 구성된 소규모 주제와 특정주제 전시 및 순환 전시를 제공한다. 전시품은 그리스·로마시대나 비잔틴시대의 희귀 문서와 장식·예술물로 가득 찾으며 각 나라의 당시 역사를 그림으로 반영하였는데 구라파의 것은 대부분 화려하고 뜻 깊은 전설이 있는데 반해 아세아의 것은 일본 한국을 포함해 동남아의 것들도 대부분 사진으로 반영하였다. 특히 중국의 것은 19세기 중국의 어두운 면과 문화혁명기간의 사진으로 장식 되었는데 한 중학교의 여자동창 16명의 집체 사진과 30여년이 지난 후 한사람도 빠짐없이 각자가 똑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였다. 또한 중국인들은 돈밖에 모른다는 중국을 멸시하는 사진이 많이 있었다. 박물관을 참관하는데 온 근 하루가 걸렸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이튼날 장장 8시간을 달려야 하므로 휴식을 취하면서 내일의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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