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의 나라 돈화를 가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도읍지…정작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다니…◇ 신의 계시로 가는 발해의 땅

연길에서 돈화를 가는데는 2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연변공산당에서 마련해 준 승용차를 타고 가려했으나 대설이 내려 버스로 가게 되었다. 기치를 타고 가려했으나 하루에 한번뿐인 기차시각이 맞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연길시가지로 나서니 마침 간밤 눈이 와서 천지가 새 세상으로 바뀌었다. 하늘은 익히 알고서 백의의 흰눈을 내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매서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연길역 옆의 시외버스터미날로 향했다. 연변조선족 여류시인 심예란과 신조선족 조민호시인 등과 시외버스에 몸을 실어 백색의 산고개 하나를 넘으니 더욱 흰눈이 내린 풍경은 우리의 옛고향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흰 나무줄기로 유난히 수화화 냄새를 풍기는 봇나무 가로수 물결이 길을 열어주었는데 꼭 겨울신부가 흰눈의 면사포를 쓰고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발해의 나라를 가는 기분은 상쾌했다.
거기 가면 분명 머리채 뒤로 묶어 감아올린 아릿다운 조선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충동을 느끼며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2천년이 지난 세월의 역사의 뒤안길이 아니라 2천년 후 앞날을 열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가 오라해서 가는 것도 아니며 어느 누가 여비를 선뜻 대어주어서 가는 것도 더더욱 아닌, 한 가난한 한국시인이 이 머나먼 만주땅 대조영의 나라 발해땅 가고있는 것은 신의 계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 버스는 길가에 멈취서며 쉬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땅은 아직 휴게소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길가에 세워놓고 간이음식점을 이용하는게 고작이며 화장실 시설도 물론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여자 할 것 없이 나무판자로 대충 가려놓은 길옆 누추한 집 뒤로 가서 볼일을 보면 되는 것이었다. 구데기가 우글거리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풍경 다름아니었다.
◇ 외국인에게 절대 공개 안되는 육정산

일행은 돈화역으로 먼저 가서 돌아오는 기차시각을 알아보았다. 역시 시각이 여의치 않아 추위에 몸도 좀 녹일 겸 부근의 식당에 들어가 요기를 먼저 했다. 난감한 것은 택시기사에게 물어봐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곳은 동모산이 아닌 육정산이었다. 육정산에 버스가 도착했을 때 풍광이 아주 뛰어난 강을 배경으로 날아갈 듯 우람한 사찰이 금박을 두르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알고보니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유명 사찰 정각사였다.
봉우리가 6개라서 육정산이라 불리우는 이곳 산기슭 고분군의 제1묘구에서 발해시조 대조영의 증손녀이자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貞惠公主) 묘가 1949년 발견됨으로써 발해 첫도읍임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었으며 이 지역이 발해의 첫 도읍지였다는 사실은 동북으로 10키로미터 정도에 있는 발해왕족과 평민들의 고분군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확실해졌다.
그러나 발해의 무덤들이 있는 육정산 전체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고구려에 이어 발해까지를 포함시킨 동북공정으로 철제울타리로 둘러싸고 막아 놓아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이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누구에게도 개방이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특히 외국인에게는 개방이 안된다고 했는데 외국인은 한국인을 두고 일컫는 말이었다.
육정산 아래에서 씁쓸한 입맛을 씻을 길 없이 버스기사에게 물어 다시 택시 한 대를 잡아 미끄러운 눈길을 가고 있었는데 바로 성산자마을이었다. 이미 오후의 햇살은 저녁햇살로 바뀌어 있었다. 멀리서 보니 꼭 봉긋솟은 봉우리가 누이의 젖가슴같이 포근해 보였다. 우리 일행은 '아. 저기다! 저게 동모산이다!'하고 택시 안에서 소리를 질러대었다. 큰길에서 멀리 않는 곳에 동모산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현재의 주민들이 살아가는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낮아서 조용한 풍경이었다.
◇ 동모산 산성이 있는 마을인 성산자

동모산 동쪽 4키로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고 또 동모산의 북쪽을 끼고는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는데 목단강과 합류해 흘러간다. 목단강은 홀한하로, 대석하는 오루하라 불리는데 넓은 벌판과 강이 비옥한 땅을 형성하고 있기에 동모산을 정점으로 대조영이 이곳에 정착해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영주(營州)부근으로 강제 이민당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 유민을 이끌고 30년만에 돌아와 성을 쌓고 수도로 삼은 59년간 발해의 첫도읍이었던 것이다. 대조영이 데리고 온 병사와 유민의 수가 40만명에 이르렀다 한다. 북쪽으로 러시아 연해주 및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을 포함하고 서쪽으로는 요녕성,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지역에 이르는 드넓은 영역을 229년간 지배했던 거대제국 발해국이었던 것이다. 발해가 이곳에서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긴 시기는 대개 제3대 문왕 19년인 755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수도 시기는 약 59년 정도로 추정된다.
동모산으로 불리는 성산자산성은 어쩌면 홀로 외로이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저 산이 1300여년의 험난한 역사를 껴안고 있다는 말인가. 고구려유민이 당나라에 의해 요하 서쪽인 영주(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인근)로 강제 이주된 뒤 천신만고 끝에 30년만에 돌아와 나라를 세운 곳이라는 생각을 해보니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 산성 입구에 1980년 4월 20일 중국 길림성 인민정부가 길림성 문물보호단위(우리의 지정 문화유적에 해당)로 공포하고 돈화시인민정부가 세운 비석이 2개 서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어로, 다른 하나는 조선어로 적혀 있었다. 비석 내용은 '성산자산성은 당나라 발해국 초기 성지로 발해 제1대 왕 대조영이 자리를 잡았다고 한 동모산으로 고증되었다……'로 씌어져 있었다.
저녁햇살은 동모산의 이마를 비추이며 뉘엿뉘엿 서녘 벌판 너머로 붉은 홍당무가 되어 무작정 지고 있었는데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라는 우리 고유민요 아리랑이 생각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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