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도르 M. 도스토예프스키 인상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는 아주 특이한 태산(泰山)이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산이 하늘을 뚫듯이 솟아 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들이 산줄기와 뒤얽혀 뻗어 내리고 있다. 곳곳에 기암괴석이 자리하고, 골짜기마다 벼랑과 폭포가 평범(平凡)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쭉쭉 뻗은 수목과 우거진 풀숲 길을 내려오다 별안간 천길 낭떨어지를 만나기도 하여 당황하게 한다. 콸콸 쏟아지는 폭포 물보라에 주변이 온통 파랗게 이끼들이 낀 음습한 곳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멀리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눈높이로 다가오는 곳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러시아 문학기행>은 내게 매우 큰 흥분과 기대를
걸게 하였다. 그 큰 산의 원천과 고향을 실제로 접하면 조금이라도 그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보다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그가 살던 집이며, 기념관에 가서 많은 유품과 자료들을 대하게 되면 그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왜 그런 작품들을 쓰게 되었는가 등을 짐작해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새로 꾸민 푸쉬킨, 그 <▲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중앙 아래가 정문, 성 페테르부르그> 리고 톨스토이․체홉․고골리․파스테르나크 등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들의 생가와 기념간과 묘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더욱 큰 기대와 감동을 갖게 하였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시베리아와 우랄산맥을 넘고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 창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만남은 쉽지가 않았다. 가장 기대를 걸었던 그의 기념관 관람도 이상하게 되어버려 돌아보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관광프로그램의 본사 인쇄물에는 들어 있으나 현지 인쇄물에는 빠졌고, 그냥 찾아간 날은 월요일 정기휴관 일이었으며, 다음날에는 전날 당직자와의 약속이 관장에게 보고가 안 되었는지, 11시 개관 시간부터 캐나다 3개 팀의 관람이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람 예약도 안 해놓다니….” “구두 약속도 예약인데, 보고도 안 했나?” “한국인 홀대야.” 들려오는 말들을 들으며 나는 인연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밖으로 나와 아쉬움 속에 입구 현판과 건물을 비디오와 사진에 담았다. 건물 벽에 동판 부조로 붙여놓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을 이틀 동안 두 차례나 촬영하였다.
그래도 나는 이삭 성당 옆 골목에 서 있는 3층 건물을 사진에 담아왔다. 그가 명성을 떨치게 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창작할 때 살던 집이다. 센나야 광장도 지났다. 『죄와 벌』을 쓸 때 집에서 멀지 않은 여기까지 자주 산책을 했었다는 곳이다. 이 거리를 오가며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실제 모델인 대학생 다닐로프가 고리대금업자 뽀뽀프와 하녀 노르만을 살인한 사건을 심사숙고했던 것이다.
한 대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그가 만리 타국의 외국인일 때 그 깊이와 넓이까지 잘 알기는 어렵다. 그래도 차를 타고 다니며 잠시잠시 보고듣는 식으로라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요 복이다. 문학기행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2.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의 러시아

그 뒤의 황제들 시대에도 문화의 서유럽화는 더욱 진전되어 자유사상이 널리 퍼졌다. 다만 영주에게 예속이 강화된 농노(農奴)들의 지위는 신분제와 관료제를 주축으로 통치하여 더욱 저하되어 노예 지경에 이르렀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그 여파를 두려워하여 강경책을 폈다. 혁명에 대한 공포는 그 뒤의 통치자들에게 더욱 강압적이 되게 하여 개혁을 위험시하였다.
1812년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 사상이 전파되어 국민적 자각과 함께 유럽으로부터 낭만주의․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사상계는 유례없는 활기를 띄었다. 지식층은 국가와 종교의 속박을 벗어나 개성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고, 농노 폐지를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권력을 독점하던 왕권과 귀족 계급의 농노제적(農奴制的) 압정과 자본 착취에 따른 경제적 빈궁 속에서 헤매는 대중들은 점차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때는 러시아의 이러한 사회적 국가적인 변화가 크게 꿈틀대던 시기였다. 낡고 부패한 봉건적 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체제로 대체되는 과도기였다.
젊은 작가로 명성을 얻은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변화와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6세인 1847년 봄부터 그는 혁명가 페트라셰프스키와 교유하며 프리에의 사회주의운동에 흥미를 느껴 서클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비판과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푸리에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강연도 듣고, 1849년 1월부터는 금요일마다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의 영향이 맹렬한 기세로 유럽에 퍼져나가자, 이를 두려워하고 있던 러시아 정부는 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을 감시하여 오다 1849년 봄에 이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특사로 4년여의 시베리아 유형이란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다.
3.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
P. M.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그레고리력 11월 11일)에 모스크바에서 빈민구제병원 외과의사의 5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엄격한 성격에 성을 잘 냈고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아들이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용돈도 안 주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교육에만은 최선을 다해 주었다.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명랑 쾌활한 성품으로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있었다. 아버지가 귀족 신분이었지만 생계는 어려웠다.
16살 때인 1837년 2월 27일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작고하고, 1839년 6월 6일에는 시골에 은퇴하여 살던 아버지가 농민들에게 피살되었다. 양친의 잇따른 죽음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간질 증세는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다.
1838년 1월 16일에 육군공병학교에 입학하여 하사관․소위보를 거쳐 육군소위가 되고, 1843년 8월에 공병학교를 졸업하여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하다가 10월 19일에 제대하였다. 그는 봉급과 아버지 토지의 수입으로 방탕생활을 하여 많은 빚으로 어려워지자 유산 관리인에게 일시금을 받고 토지와 농노 상속권을 포기하였다.
1843년 12월에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하여 호평을 받자 작가의 길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제대 전에 쓴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써서 24세 때인 1845년 5월에 친구인 그리고로비치에게 읽어주자, 그가 네끄라소프에게 달려가 보이니 “새로운 고골리의 출현”이라고 열광하였다. 다음날 당시 평론가 벨린스키(V.G.Belinskii)에게 보여 크게 인정을 받았다. 이 처녀작은 1846년 1월 24일에 『뻬쩨르부르그 선집』에 발표되어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은 내 생애 중 가장 감격적인 한순간이었다. 유형 시절에도 이때의 일을 회상하고는 용기를 얻어 힘을 내곤 하였다”고 말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5세 젊은 나이에 등단하여 유명해지자, 강한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자제력을 잃고, 작품 선금을 받아 방탕생활을 하였다. 계속해서 발표한 10여 편의 평가는 좋지 않았고, 벨린스키도 무절제한 생활과 함께 비판하였다.
1848년에 혁명가 페트라셰프스키와 교유하여 그들의 서클에 참여하였다. 그는 왕정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골리를 비난하는 내용의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1849년 4월 23일 새벽에 일당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1월 13일 벨린스키의 편지를 퍼뜨린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2일 세묘노프스키 형 집행장에서 황제의 특사로 강제노동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1850년 1월 23일 옴스크에서 가서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4년간 겪었다. 1854년 2월에 출옥하여 3월 2일 시베리아 세미팔라친스크 제7대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교유하고, 그로 말미암아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유형생활을 한 것은 그의 생애를 크게 바꾸어놓았고, 사상과 작품 창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장편 『백치』에, 옥중생활은 『죽음의 집의 기록』에 반영되었다.
7대대에서 검찰관 브란겔 남작을 알게 되고, 세무관의 아내인 이사예프 부인을 보고는 반해버렸다. 브란겔은 페테르부르그에 돌아가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사면을 위해 활동하였고,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이사예프 부인은 1855년 8월 남편이 사망한 뒤, 1856년 11월 26일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36세 때인 1857년 2월 6일에 결혼하였다.
이사예프는 의심이 많고 변덕스러웠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급하면서 화를 잘 내는 성격이어서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간질도 심해져서 12월에는 군복무를 계속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859년 3월 18일 제대하고, 7월 2일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나 8월 19일 뜨베리로 가서 형과 함께 지내다가, 허가를 받아 12월에 10년만에 페테르부르그로 귀환하였다.
1858년 9월 30일에 형 미하일이 잡지 <시대>의 출판 허가를 받고, 1860년 가을에 형과 함께 문학서클 <편집자들의 모임>을 결성했는데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죽음의 집의 기록」과 장편 「학대받는 사람들」을 발표하였다. 잡지가 잘 되자 형에게 맡기고, 1862년 6월 7일 외국여행을 떠나 베를린․푸랑크푸르트․쾰른․파리․런던 등을 여행하고,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갔다.
귀국하여 작가 지망생인 폴리나 수슬로바와 사랑에 빠졌다. 1863년 5월에 <시대>지가 출판금지를 당하자, 간질 치료를 핑계로 비스바덴에 가서 도박하다가 8월에 파리로 가서 미리 와 있는 애인 수슬로바를 만났다. 9월에 둘이서 바덴바덴에 갔다가 제네바․로마․리보르노로 여행하고 10월에 나폴리에 체류하였다. 10월에 수슬로바와 헤어지고, 함부르크로 가서 도박으로 탕진하자 러시아로 돌아왔다.
1864년 1월 형이 <세기>지 출판 허가를 받아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발표했다. 4월 15일에 아내가 죽었다. 4월말에 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갔는데, 7월 10일에 형이 사망하자 <세기>지의 계속 발간 허가를 받았다. 연말부터 연초까지 마르타 브라운과 연애했다.
1865년 4월 뒤에 유명한 수학자가 된 소피야 꼬발레프스까야와 사귀다가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6월에 재정난으로 <세기>를 발행 중단하고, 여름에 출판업자 스쩰로프스키와 계약했다. 자신의 모든 작품을 양도하고 3000루불을 받고서 1866년 11월 1일까지 일정량의 새 소설을 탈고하며,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보조금 지급 없이 이후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넘기기로 하였다.
도스토에프스키는 7월말에 수슬로바를 만나러 비스바덴에 가서 지내다가 10월에 코펜하겐을 거쳐 15일에 페테르부르그로 귀국하였다. 11월 2일 수스로바에게 다시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시기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여러 가지 고통이 연속되었다. 수스로바와의 사랑 행각, 도박으로 탕진, 아내와 형의 죽음, 청혼 실패, 운영난으로 잡지 발행 중단…. 여기에 모든 저작권을 걸고 작품을 쓰기로 한 계약 기일이 임박하자 그는 절박감에 싸이게 되었다.
이때 속기사로 찾아온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뜨키나(Anna Grigorievna Snitkina), 그는 10월 3일에 오자마자 채용하고 그 다음날부터 구술을 시작하여 26일만에 「도박자」를 완성하였다. 「죄와 벌」도 <러시아 통보>에 1866년 1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하여 12월호로 완료하였다.
젊은 속기사 스니뜨키나, 그녀는 그에게 있어 구원의 천사와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여 1867년 2월 15일에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재혼하였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46세였고, 안나는 20세의 젊은 처녀였다. 그러나, 사업 실패에 형의 유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심각한 경제난으로 그들은 신혼을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안나의 결단으로 이들을 떠나 외국에 가서 집필 생활에 힘쓰기로 하였다.
1868년 3월 30일 모스크바로 갔다가, 4월 14일 부부는 외국으로 떠나 바덴바덴․제네바로 갔다. 9월에 밀라노, 11월에 피렌체로 가서 겨울을 났다. 1869년 8월에 드레스덴에 가서 살았다. 9월 14일에 딸 류보프가 태어났다. 그의 생활은 어려웠다. <러시아 통보>에서 보내오는 선불 원고료로 근근히 지냈다. <여명>지 편집장인 친구 스뜨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삶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선불을 받지 않고 내 작품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작가입니다. 누구든지 내 작품을 원한다면 선불금을 먼저 지불해야만 합니다.”
1871년 1월에 <러시아 통보>에 「악령」연재를 시작하고, 4월에 비스바덴에 가서 도박으로 탕진하자 50세인 그는 7월 5일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왔다. 7월 16일 아들 표도르가 태어났다.
귀국 후 10년 동안은 그의 생애 중 가장 안정된 행복한 시기였다. 1873년 1월 1일에 편집장으로 <시민>을 창간하였다. 아내가 자비로 『악령』을 3권의 단행본으로 출판하여 호평을 받았다. 1874년 1월에 『백치』가 2권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1875년 8월에 아들 알렉세이가 태어나고, 12월 31일 잡지 <작가 일기>의 발행 허가가 나왔다. <작가 일기>에 게재한 시사문들이 호평을 받아 스스로 예언자연하며 열렬한 슬라브주의자가 되었다. 1876년에 『죽음의 집의 기록』제4판이 2권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1877년 7월에 『안나 까레리나』8부가 단행본으로 나왔다.
1878년 5월 16일 아들 알렉세이가 갑자기 간질 발작으로 사망했다. 아들을 잃은 뒤 그는 블라지미르 솔로비요프를 자주 만나고, 함께 옵찌나 수도원을 찾아가 암브로시 장로와 대화하였는데, 그에게서 「가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영감을 얻었다. 1879년에 『가라마조프네 형제들』(3부 제4권까지)이 <러시아 통보>에서 나왔다.
6월 6일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슬라브 자선단체 대표로 푸시킨에 대한 기념연설을 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9월 26일 톨스토이가 스뜨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 “「죽음의 집의 기록」은 새로운 모든 문학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도스도예프스키 묘> 책”이라고 칭찬하였다.
<러시아 통보> 11월호에 완결한 『가라마조프네 형제들』을 단행본으로 내자 몇 일만에 매진이 되었다.
나이 60세 때인 1881년 1월 26일 여동생이 찾아와 상속 문제로 다투고 간 뒤 각혈을 시작하여, 1월 28일 오후 8시 38분에 폐동맥 파열의 악화로 그는 페테르부르그에서 작고하였다. 1월 31일 알렉산드 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4. 말을 맺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남다른 경험과 기구한 운명으로 일생을 보냈다. 평생을 괴롭힌 간질, 화를 잘 내는 성격, 조기 명성으로 키워진 자존심과 자부심, 광적인 도박벽, 여기에 십대의 조실부모, 애정 행각, 투옥과 사형 직전의 특사, 긴 시베리아 유형, 끝없는 가난 등. 박복하고 불행한 생애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들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난과 고통들을 모두 견디어내고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삶과 정신을 통하여 세상을 꿰뚫어보고 새로운 인간상을 탐구해내어 초시대적인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이지(理智)의 세계와 정열(情熱)의 세계, 그리고 이지와 정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평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를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사실주의 문학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모순(矛盾)과 상극(相剋)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에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 놓았다. 인간 탐구와 개성의 추구를 통하여 그는 현대의 문학과 사상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는 크게 양립된다. 퇴폐적이고 저항하는 반동사상가란 주장과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목표로 행동하려는 작가란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주로 그의 삶에 관점을 둔 것이고, 후자는 그의 작품세계에 주목한 것이다.
그의 삶이 결코 모범적이고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대단한 의지와 열정으로 끊임없이 인생을 탐구하여 훌륭한 작품들을 창작해냈다는 사실은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이나 여건과 타고난 재능보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으며, 무엇을 탐구하고 어떻게 남겨놓아 깨닫게 하였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작품을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달을 수가 있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현실적 관심 속에 문제되는 경우가 많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인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그가 던져준 인간 탐구의 문제는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의욕 상실에 자폐적(自閉的)이고 자살까지 흔히 행하는 현대인의 고독과 자기상실감을 그는 이미 꿰뚫어보고 다루었던 것이다. 『가라마조프네 형제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우리들 가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늘날에도 위대한 작가로 남아 있다. 평범과 순탄한 삶 속에서가 아니라 남다른 고난과 고통 속에서 새롭게 인간을 탐구하고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서 그는 더욱 위대한 작가로 살고 있는 것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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