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비극에 대한 비망록
상태바
쌍용차 비극에 대한 비망록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1.03.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
지난 주 창비주간 논평(http://weekly.changbi.com/518)에 쌍용차 해고·퇴직 노동자의 비극에 관한 글을 썼다.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수많은 모순부조리가 얽히고 설켜서 터진 비극이라, 창비가 허용하는 지면(200자 원고지 15매 내외)으로는 핵심적인 내용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이 글을 쓴다. 먼저 창비주간논평에 쓴 글.

-------------------------------------------

쌍용차 해고·퇴직 노동자의 비극을 종식시키는 길

청산 위기에 몰린 쌍용자동차가 2,646명의 감원계획이
   
포함된 경영정상화 방안을 내놓은 2009년 4월 6일 이후, 자살과 스트레스성 돌연사(심근경색 등) 등으로 유명을 달리한 쌍용차 해고·퇴직·휴직 노동자와 그 배우자가 총 14명이라고 한다. 그중 5명은 지난 11월 이후 불과 5개월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외에도 자살미수, 정신이상, 신용불량, 이혼 등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정말 '해고는 살인이자 가정파괴'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난 적이 없다.

이에 지난 3월 3일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의원들과 민주노총 등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의 잇단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며 "정부가 희생자에게 사과하고 사태해결에 나설 것"과 "마힌드라(쌍용차 인수업체)는 8·6합의를 이행하고 대화 테이블에 나설 것,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철회하고 정리해고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나도 이런 정치권의 입장에 대체로 공감한다. 하지만 기자회견의 주체들 역시 이 비극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이 겪는 비극을 지켜보다보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의문들이 솟구친다.

그들은 왜 극단적 선택에 내몰렸나

첫째, 경기도, 평택시, 노동부, 회사, 노조, 민주노총 등이 2009년 8·6합의 이후, 특히 고독과 생활고가 뼛속 깊이 파고드는 2010년 초부터 정신적·물질적 충격을 완화할 긴급구호대책으로 무엇을 내놓았느냐는 것이다.

둘째, 수백명의 사무기술직은 접어두고라도 '악' 소리 한번 못 내고 쫓겨난 2,000명 이상의 쌍용차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자동차산업의 전후방 연관효과로 볼 때 모기업 감원 인원보다 수가 더 많고 근로조건은 훨씬 열악했던 수천명의 협력업체 해고·퇴직 노동자의 근황은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이들도 극심한 생활고를 겪긴 했지만 쌍용차 해고·퇴직자 같은 극단적 선택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셋째, 2001년 2월 대우자동차에서 정리해고된 1,750명의 노동자와 쌍용차 해고·퇴직 노동자의 확연한 차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는 점이다. 대우차 노동자들은 2003년 봄부터 2006년 여름까지 몇차례로 나뉘어 복직희망자 전원인 1,609명이 복귀했는데, 복귀 전 몇해 동안 극심한 생활고를 겪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한명의 자살자도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 갈등과 비교하면

넷째, 미국과 한국을 놓고 볼 때 두 나라가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것은 마찬가진데,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 비용 및 후유증에서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동차산업은 원래 경기변동과 차종에 대한 시장의 반응에 따라 부침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해고와 휴폐업이 다반사이다. 수십년간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로 군림하던 GM은 2009년 6월 파산보호를 신청한 후 미국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12개 공장을 폐쇄하고, 희망퇴직이나 정리해고 형식으로 21,000명을 감원했다. 역시 파산보호신청을 한 크라이슬러도 4개 공장을 폐쇄하고 27,000명을 감원했다. 미국 '빅3' 중 유일하게 파산보호를 피했던 포드의 구조조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0년 초에는 GM의 유럽 자회사 오펠(OPEL)이 벨기에(앤트워프) 공장을 폐쇄하고 2,600명을 정리해고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예외없이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항의시위가 벌어진다. 하지만 한국처럼 수십톤의 인화물질이 있는 도장공장을 점거하여 그야말로 결사항전하고, 쇠파이프와 새총이 등장하고 진압 헬기가 뜨는 격렬한 충돌은 없다. 또한 자살 등 구조조정 후유증도 훨씬 덜하다.

도대체 쌍용차는 뭐가 잘못된 것일까? 사회안전망이 취약해서? 그러면 쌍용차 생산직(노조원)에 비해 처우수준이 훨씬 열악하고 퇴직금조차 없기 십상이며 고용보험 혜택에서도 더 철저히 소외된 비정규직과 협력업체 노동자는 원래 가난과 불안을 잘 견디는 별종 인간인가? 게다가 사회안전망에 관한 한, 한국 못지않게 열악한 미국에서 비교적 가벼운 후유증을 겪고 넘어갔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문간 임금격차 낮추고 사회안전망 강화해야

쌍용차 해고·퇴직 노동자가 겪는 처절한 비극의 비밀은 자동차회사 생산직(정규직)의 고용임금 수준이 수많은 협력업체를 포함한 제조업 노동시장의 그것과 엄청난 격차가 난다는 점에 있다. 미국, 유럽, 일본의 비교적 가벼운 구조조정 후유증은 튼실한 사회안전망 덕분이라기보다는, 완성차회사와 외부 노동시장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이는 해고·퇴직 노동자가 다른 기업, 산업으로 어렵지 않게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원청대기업과 하청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엄청난 격차는 노동의 양과 질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기업의 수익성 및 노조 교섭력의 산물인 것이다.

1인당 GDP를 기준으로 선진국과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가치생산 사슬을 비교해보면, 한국은 협력업체의 임금수준이 너무 낮다기보다는 완성차회사의 임금수준이 너무 높다. 당연히 상향평준화는 해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향평준화도 해법이 아니다. 사회임금의 상향은 필요하지만 근본 해법은 아니다. 요컨대 이 크고 부당한 격차를, 연대임금제와 중향평준화 개념으로 줄이지 않고서는 대기업 정리해고는 '살인이자 가정파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쌍용차 비극의 근본 해법은 명확하다. 기업(부문) 간의 고용임금 격차를 줄이고, 임금수준은 노동의 양·질을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전반적 임금수준을 높이고, 시장수준에 비해 임금이 너무 높은 곳은 연대정신을 발휘하여 최소한 상승률이라도 낮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산별노조가 필요하다. 어쩌면 노조의 파업찬반 투표시 다른 이해관계자에게도 투표권을 주어야 할지 모른다. 정당이 당원이 아닌 지지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듯이. 이와 더불어 사회임금과 사회안전망을 상향조정해야 한다.

당장 필요한 것은 복직의 희망이다

그런데 지금 쌍용차 해고·퇴직 노동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근본대책이 아니라 긴급대책이다. 핵심은 노사정이 합심하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가난, 고독, 불안이 극심해서가 아니라 희망의 빛을 찾지 못해서 무너지는 법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보여주어야 할 희망은 대우차(GM대우) 노사의 사례처럼 회사가 정상화하면 순차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경영정상화가 다소 미흡하더라도, 살아남은 임직원들이 십시일반을 해서라도 8·6합의에 따라 소규모라도 무급휴직자의 복귀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두번째로 보여주어야 할 희망은 노사관계가 환골탈태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는 노사가 서로의 고뇌를 이해하고 관용하는 자세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쌍용차 정리해고사태를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 먹튀투기자본의 소행이자 자본과 노동의 대리전으로 간주하는 한, 노사관계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칼자루를 쥔 사측의 관용도, 살아남은 임직원들의 연대정신도 발휘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쌍용차 노사와 평택시는 GM대우차 노사와 인천시로부터 배워야 한다. 특히 노조는 민주노총의 투쟁노선과 갈등을 빚으면서도 노사간 신뢰를 쌓아 끝내 정리해고자 전원 복직의 쾌거를 이뤄낸 대우차 이성재 노조집행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2011.3.9 ⓒ 창비주간논평


------------------------------------------

여기까지가 창비주간논평에 실은 내용이다. 아래 글은 지면제한으로 인해 우겨넣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1. 앞에서 대우자동차 이성재 노조집행부의 유연한 노선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이성재 집행부조차도 공식적인 정리해고자(1752명) 중에서 복직 희망자(1609명)만 복직시켰을 뿐이다. 나는 이를 근거로 이성재집행부의 성과가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업적임이 분명하다. 다만 나는 한국 노조운동의 역사적 한계와 사회에 널리 퍼진 상식의 맹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2. 대우자동차 경영실패-부도-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정리해고자만이 아니었다. 정리해고 사태(2001.2.16) 직전까지 대우자동차 내에서 일하다가 ‘악’소리도 못 내고 떨려나간 수천 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정리해고나 다름없는 희망퇴직 형식으로 떠나간 7,000명이 넘는 사무직, 생산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외에도 모기업의 잘못(경영 부실, 파괴적인 구조조정 관련 갈등)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으로 잘려나간 수만 명의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있었다. 특히 협력업체와 사내 비정규직의 처지는 정리해고자들보다 훨씬 열악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국가(사회)도, 언론도, 이성재집행부도, 회사도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3.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를 약방의 감초처럼 내 놓는 노조의 평소 행태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무관심은 여간 아이러니가 아니다. 종종 노동자의 연대의식이 공장(단위 기업)의 담벼락을 못 넘는다는 비판이 들끓는데, 이건 정리해고자라는 울타리조차 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노동조합원인 희망퇴직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배려는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노조 지침에 따르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대 노총과 재벌의 합의에 의해 계속 연장된) 복수노조 금지조항으로 인해 2001년 당시 독자 노조를 만들지 못한 사무기술직과 대우차 완성차 라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노조 차원의 무관심과 무배려는 변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만약 노동자의 연대의식이 공장의 울타리를 넘어선다면 정리해고자들보다 더 열악한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고통; 즉 열악한 근로조건, 더 강력한 구조조정 충격, 더 취약한 사회안전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노조의 핵심적인 고민이 되어야 마땅하다.

4. 그런데 이런 얘기는 아주 생뚱맞게 들릴 것 같다. 마치 관청 여자 노비들에게 100일의 출산휴가를 허용한 세종대왕에게 노비 해방과 신분 제도 철폐를 달성 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처럼, 사회역사적 한계를 너무 초월한 황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여 질 것 같다. 하지만 진보의 전범이자 기준으로 통하는 OECD 주요국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결코 황당한 비판이 아니다. 한국 진보가 모범으로 삼는 유럽 노조들은 태동기부터 산업/직종별 노조와 산업/직종 차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추구해 왔다. 또한 힘 있는 한 사람(기업별 노조)이 열 걸음을 가려고 하지 않고, 열 사람(산업 종사자)이 한걸음 가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산업, 업종, 국가의 생산력 수준에 조응하는 근로조건과 복지제도를 만들어왔다. 그러므로 노조의 울타리와 공장의 담벼락을 넘어선 연대의식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라는 내 얘기는 결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얘기가 아니다.

5. 적지 않은 쌍용차 해고자들은 공장 정문에서 출퇴근 투쟁을 1주에 한번이라도 5년이고 10년이고 하면 틀림없이 복직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실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물론 나도 이 기대가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이런 기대와 희망의 숨구멍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십시일반이라도 해서 터주어야 자살, 가정파괴의 비극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것도 뒷맛은 그리 개운치 않다. 무엇보다도 이는 협력업체, 비정규직, 희망퇴직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기대와 희망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가 30~40대 해고자라면 공장 안팎의 크나큰 근로조건 격차에 비추어 볼 때, 노가다 뛰고 중소기업 다니는 것보다, 5년이고 10년이고 복직 투쟁을 해서라도 쌍용차에 재입사하여 정년까지 근무하는 것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리해고가 용납 못할 불의라면, 5년이고 10년이고 복직 투쟁을 하는 것이 정의다.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면 근로 생애 전체의 득실을 따져 설사 적자가 나오더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필요하면 대를 이어서라도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경영실패로 인해 청산 위기에 몰린 회사의 정리해고가 용납 못할 불의가 맞는가? 협력업체의 정리해고와 무엇이 다른가? 왜 협력업체 정리해고자들은 5~10년에 걸친 복직투쟁을 하지 않는가? 원청대기업 해고노동자들이 하청중소기업에 거의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원청대기업 노동자들은 육식동물이고, 하청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초식동물처럼 아예 (계급이 아니라) 종이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6. 2001년을 전후한 대우자동차의 상황에서, 부도 후 법정관리로 자칫 청산 가능성조차 있던 대우자동차가 새로운 투자자=인수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임금 삭감은 물론이고, 인력, 사업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사회의 상식이었다. (물론 세상을 노동과 자본의 대결 구도로 보는 사람들은 이를 단지 자본의 상식이자 자본의 순리라고 말하겠지만......) 그런 점에서 희망퇴직자의 상당수는 사회의 보편 상식 내지 순리를 따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노조 우산 아래 끝까지 버티다가 2월 16일에 공식적으로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들은 거기에 역행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대우자동차 현장직 희망퇴직자들의 상당수는 순리에 따라 회사가 살아나면 복직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소박한 기대는 결코 충족되지 않았다. 결국 노조 우산 아래서 최후까지 버티다가 정리해고라는 형식을 밟은 사람만 복직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태의 결말은 오로지 노조의 힘과 투쟁만이 노동자, 정확히 말하면 노조원이 살 길이라는 것을 교훈이자 상식으로 남겼다고도 할 수 있다.

7. 하지만 노조의 상식이 진보가 맞긴 맞을까? 노조는 쌍용차 투쟁을 통해서 대기업에서 인력사업 구조조정은 회사의 존망을 걸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있다. 이런 상식내지 교훈이 널리 공유된다면 대기업은 기존의 고용보호에 주력하고, 유사시 구조조정이 힘든 사업, 부문, 인력을 결코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꼭 필요하면 비정규직을 쓸 것이고,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 공정을 분할하여 일부 공정을 공장 담벼락 밖으로 가져갈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것을 막는 방법이나 논리는 없을 것이다. 정말 불확실성으로 인해 투자를 기피하고 고용을 두려워하는 자본에게 투자와 고용을 강제하는 것은, 단란하게 잘 살아가는 가정에게 강제로 고아 한 두명을 입양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대기업 종사자의 수는 점차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쌍용차 노조가 옥쇄투쟁으로 세상에 던진 메시지는 기존에 대기업 종사자들의 이해관계는 확실히 대변했을지 모르지만, 후세대와 국민들의 이해관계는 제대로 대변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8. 유럽이나 미국 자동차 회사가 대우차 같은 위기를 겪었다면 대체로 노조와 회사의 협의를 통하여 구조조정(인력 감원 등) 기준을 세우고 집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조가 이런 협의에 응한다는 것 자체가, 구조조정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절대로 이 협의에 응하지 않을 것이고, 당연히 회사는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일방성=폭력성은 투쟁의 불길을 더 거세게 타오르게 하는 기름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대기업 구조조정의 폭력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노조가 순순히 구조조정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노조의 오랜 신념과 관행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균형(안정성과 유연성, 기존 고용 보호와 새로운 고용 가능성 제고 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노조라도 제대로 된 방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9. 거듭 말하지만 쌍용차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은 당사자에게는 매우 합리적인 투쟁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장 안팎의 크고 불합리한 근로조건 격차의 산물이자, 대기업에서의 정리해고를 무슨 극악한 불의로 여기는 한국 노조운동의 이념적 편향성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해는 하지만 박수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고, 다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투쟁인 것이다. (대우차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쌍용차 해고자 가정에 들이닥친 극심한 가정불화의 원인 중에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내들과 한국 노조운동의 극단적 이념에 이끌리는 남편들 간의 큰 견해차도 있지 않을까 한다.)
쌍용차 노조와 민주노총이 유연했다면, 그래서 분노한 강경파 조합원들에게 집행부가 멱살을 잡히고 불신임 당할 것을 각오했다면, 옥쇄투쟁으로 거의 모든 노조 역량을 말아먹고, ‘대기업에서 정리해고는 안 된다’는 교훈 하나 확실히 남기는 쪽으로 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유연한 노조는 정리해고를 수용하더라도, 노조 역량도 상당 정도 보존하고, 지금 대책 없이 내팽개쳐진 해고.퇴직자에 대한 각종 보호 장치도 가동하면서, 경영정상화 후 순차적으로 확실히 복직시키는 노선을 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쌍용차 해고,퇴직자들의 비극은 지금보다 훨씬 덜했을 것이다. 쌍용차 해고퇴직자들의 비극은 노조에게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노조의 경직된 투쟁 노선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10. 한국 노조와 진보는 지나치게 대립, 갈등지향적인 노사관계의 파괴력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대우자동차 부도(2000.11.8)-구조조정-대규모 정리해고 등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 노조집행부의 노선과 대응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쓴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사회평론, 2001)에 서술되어 있다) 대우자동차 정리해고는 지나치게 대립, 갈등지향적인 대우차 노사관계와 노조에 만연한 어떤 정서/경향/관성을 일변시켜 보겠다는 대우차 경영자들의 결단인 측면이 강했다. 당연히 노조원이 아닌 다른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사무기술직, 협력업체 등)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나는 이 의외의 사태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쌍용차 사태가 극단으로 치달은 이유는 대우차와 그 뿌리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판단이 맞는다면 노사관계의 환골탈태 비전은 해고・퇴직자의 복직의 규모와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유연한 노선을 취했던 이성재노조집행부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1. 내가 아는 한 한국 진보의 주류는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경직성과 시대착오성에 대해서 혀를 찬다. 리비아 가다피,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정권들도 한때는 그 나라, 그 시대의 요구에 그런대로 잘 부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나 환경이 크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재미를 보던 방식(시스템, 권력 주체, 통치방식 등)을 계속 고집하면서, 시스템과 리더십의 모순이 심화되었고, 그로 인해 저항이 터져 나왔고, 이를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과정에서 극악한 폭군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바뀐 시대의 요구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교조를 읊조리고 이를 경직되게 실천하는 존재들은 누구나 김정일, 가다피가 될 수밖에 없다. 나중에 유신 독재로 내달린 박정희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빛나는 성공 신화가 있는 한국 진보 혹은 보수는 제2의 가다피, 제2의 박정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있을까?

12. 나는 북한, 남한 진보, 남한 보수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뜯어보다보면 한국인에게는 어떤 근본주의, 극단주의, 좌익맹동주의 유전자가 있지 않나 의심이 들 때가 많다. 그 뿌리에는 현실에 대한 무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인정(억압), 힘에 비해 과도한 권력(헤게모니) 욕, 적(시장, 미국, 북한 등)에 대한 과도한 공포 등이 있지 않나 싶다.

만동묘-갑신정변-위정척사-사분오열의 독립운동-분단과 내전-한국전쟁-유신독재와 수령독재,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철지난 NL(북한 모델)-PD(소련 모델)의 득세와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그 징표가 아닐까 한다. 한때는 진보 혁신의 기수였다가, 좌절하고 보수로 넘어가서 (안보 보수의 환심을 사고자) 극단으로 치닫는 뉴라이트의 행태도, 이른바 ‘안보 보수’의 행태도, 신자유주의 주적론과 북유럽 모델론을 양대 지주로 삼는 진보 일각의 행태도, 쌍용차 노조의 노선도 극단주의, 근본주의에 너무 쉽게 쏠리는 뿌리깊은 이념적, 심리적 전통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끝-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

[저작권자(c) 평화와 희망을 만들어가는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