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동북아신문]친구는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별로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공부와 일을 함께 하고, 밥과 술을 같이 먹으며, 놀거나 여행을 더불어 다녔지만, 정작 위급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같이 고통을 나누거나 함께 극복하고자 하는 친구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라야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말 신돈(辛旽)의 횡포에 큰 화를 입게 되어 피신해온 친구 부자를 4년 동안 숨겨 주고, 도중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묘 아래의 자기 묘 자리에 몰래 장례까지 치러준 사람이 있다. 이집과 최원도의 이야기이다.

증 영의정 이지직(李之直)은 선생의 아들이고,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 그 손자이다. 증손 첫째는 영의정 이극배(李克培), 둘째가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셋째는 병조판서 이극증(李克增), 넷째는 병조·호조판서 이극돈(李克墩), 다섯째가 이조판서 이극균(李克均)이다. 조정 회의에는 사촌인 이극규(李克圭), 이극기(李克基), 이극견(李克堅)까지 무려 8명의 광주이씨 ‘克’자 형제들이 참석하여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까지도 생겨난 집안이 되었다.
저서 『둔촌잡영(遁村雜詠)』은 태종 10년(1410)에 간행되었는데, 보물 1218호로 지정되었다. 상하 2권 1책으로 하륜(河崙, 1347~1416)이 서문(序文)을 썼다.
공민왕 17년(1368) 이집 선생이 개성 용수산(龍首山) 밑에서 신돈의 측근인 채(蔡) 판서와 한동네에서 살았는데, 당시 최고의 세도가인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서 큰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의 강동구 둔촌동으로 피신하여 1년 정도 살았다.
둔촌은 다시 피신하러 경북 영천에 사는 친구인 최원도(崔元道)를 찾아갔다. 동년급제한 최원도는 사간원 간의대부로 있을 때 신돈에 대하여 여러 차례 직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있었다. 둔촌은 연로한 부친을 업고서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다. 마침 천곡의 집에서는 그의 생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천곡을 찾았다. 그런데 천곡은 반기기는커녕, 성을 내며 큰 소리쳐 내쫓았다.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왜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 까지 왔단 말인가.”
둔촌은 별수 없이 늙은 아버지를 다시 등에 업고 그곳을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던 자리는 없애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던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둔촌은 걸으면서 천곡이 자신을 진심으로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 가지 않고 길 옆 산으로 들어가 밤을 보내려 하였다.
천곡은 둔촌이 멀리 가지 못 했으리라 생각하고,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찾아 나섰다. 천곡은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밤이 깊은 후에 산에서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하여 둔촌은 4년동안 천곡의 다락방에서 피신생활을 시작하였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달라 해서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대소변도 방안에서 보아 갖다 내버렸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수상하게 여긴 여종이 염탐하여 다락에 두 사람을 숨기고 주인이 그들을 섬기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마님에게 말했다. 사태는 심각해졌으나 함구령 이외에는 별수가 없었다. 만약 이 비밀이 새어나가는 날에는 두 집안이 멸문(滅門)이 되리라는 것은 뻔한 것이었다.
부인은 이 비밀이 밖에 알려질까 걱정을 하다가 스스로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었다. 여종은 목을 매어 자결함으로써 주인댁의 비밀을 영원히 묻었다. 그 뒤에 천곡의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부인은 말을 못하고, 마을 사람들은 천곡이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대로 증언하여 무사히 모면하였다.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작고했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입혀 자신이 묻힐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곳이 광주(廣州) 이씨 시조인 이당의 무덤이다. 이에 얽힌 사연은 지난 2001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생활의 길잡이’(이호연과 최원도의 우정이야기)에 실려 있다. 일제 때 교과서에 ‘진우(眞友)’란 제목으로 둔촌과 천곡의 이야기가 실렸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실각하여 주살된 후에, 둔촌은 개경으로 돌아왔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다.
慷慨傷時淚滿襟 流離孝懇達幽陰
漢山超諦雲烟沮 羅峴盤回草樹深
天點後先雙馬鬱 誰知君我兩人心
願吉世世長如此 須使交情利斷金
의분과 슬픔으로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집 떠나 헤매면서도 효성은 저승까지 다달았네.
한산 땅은 멀고멀어 구름안개에 막혀 있고
나현 땅은 회돌아서 풀과 나무가 깊구나.
하늘이 선후로 두 무덤을 점지하였으니
누가 그대와 나 이 둘의 마음을 알겠는가.
바라건대 세세로 길이길이 이와 같이 하여
모름지기 정을 주고받음으로 쇠라도 끊게 하세나.

둔촌은 그 후 여주 천녕현으로 와서 살다가 작고했다. 둔촌의 후손들이 영천 선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보은당(報恩堂)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
해마다 음력 10월 10일이면 영천시 북안면 나현(羅峴)에서 두 집안의 자손들이 묘제를 지내는데,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를 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여종 연아의 무덤에는 ‘연아총(燕娥塚)’이라 묘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최원도는 영천(永川) 최씨로, 자는 백상(伯常), 호는 천곡(泉谷)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전의시사(判典醫侍事) 최유진(崔有珍)의 아들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충목왕 3년(1347)에 진사,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간의대부를 지냈다. 조선 태조에 대사간을 내리고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불사하고 영천에서 살았다. 유고집 『천곡집』이 있다.
장자(莊子)는 친구를 사귀는 일은 물과 같이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득이 있을 때는 달게 굴고 없어지면 돌아서 버리는 것은 소인들이 하는 짓이다. 군자는 의(義)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하였다.
자고로 우의(友誼)의 도타움을 말할 때면 관포(管鮑)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과 천곡의 우정은 그보다 높다고 하겠다. 진정한 친구는 어찌해야 하며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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