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비는 조선시대 초의 유명한 스님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조선후기의 유명한 금석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년 순조 16년(1816)과 그 이듬해 비봉에 올라 비문을 판독함으로써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비의 좌측면에는 당시 김정희가 이곳을 방문하여 비문을 판독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김정희의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실려있다. 비석은 직육면체의 화강암으로 자연 암반 위에 새긴 2단의 얕은 괴임에 세워졌다. 비석 상단에는 덮개돌을 끼우는 부분이 있으나 덮개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972년 8월 25일 비의 보존을 위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은 모두 11줄로 각 줄에 22자 정도 새겨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마멸되어 반 이상이 판독되지 않는데, 대략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고 이 지역을 순수한 사실과 당시 지명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건립 연대는 비문에 연호(年號)나 간지(干支)가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흥왕 16년(555) 왕이 북한산에 왔다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비의 건립은 그보다 뒤인 것으로 보고 있다. 대개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로서 경상남도 창녕에 세워졌던 561년의 <창녕비(昌寧碑)>와 함경남도 함흥에 세워졌던 568년의 <황초령비(黃草嶺碑)>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진흥왕의 영토 확장 사실을 밝혀주는 석문(石文)으로서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기초사료로써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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