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서기전 69∼서기 4(혁거세거서간 61). 신라의 건국시조이며 박씨(朴氏)의 시조이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로 지칭한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 6촌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였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이 하늘로 날아가자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런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아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또한, 그 광채로 인해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 길렀다.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존경하였다. 나이 13세가 되자 이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 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다.
또한,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서라벌·서벌,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 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3년(혁거세거서간 5)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설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이전에 나뉘어 살았던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 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이들은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가 신라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干支)가 참위설의 갑자혁명설(甲子革命說)에 입각한 듯 하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서기전 37년 경주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또한, 서기전 32년에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다.
그러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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