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탐방기]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2)
상태바
[주청룡 탐방기]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2)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12.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두모궁(斗母宮)

두모궁은 태산을 수호한다는 불교의 북두칠성 어머니인 두모 녀신을 모신 도교 사원(寺院)으로서 예전에는 녀자 도사들만 머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원 안에는 8개의 팔을 가진 금빛의 두모 녀신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향을 피우며 절을 하고, 소원이 새겨진 자물쇠를 걸어 소망을 빌고 있다.

두모낭낭(斗母娘娘)
 
두모궁에서 층계를 따라 곧게 중천문으로 오르는 길과 동북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동북쪽으로 약500 m쯤 골짜기를 따라가면 3000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평평한 돌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경석욕(經石峪)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당승이 황제를 따라 태산에 왔다가 도중에 큰 비가 내려서 불경이 비에 젖자 비가 그친 후 이 돌판에서 불경을 말리웠다고 한다. 돌판 우에는 1,400여년전의 "金剛般若波羅蜜經"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金剛般若波羅蜜經"은 신도가 지혜롭게 모든 고뇌를 벗어버리고 극락세계에로 갈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제시한 글이라고 한다. 글자의 크기는 약 50cm쯤 되며 원래 25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1067자 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협곡을 경석욕(經石峪) 이라고 한다. 이는 태산의 불교문화와 석각예술의 진기한 보물이다. 

돌판우에 새겨진 경서

투모궁에서 계속 1.8 km 정도 직진하면 호천각(壶天阁)이 나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라 말 그대로 마치 항아리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호천각(壺天閣)

호천각에서 700 m정도 올라가면 중천문(中天門)인데 해발 847 m라고 한다. 중천문은 말그대로 태산을 오르는 하늘중간의 문으로서 대종방으로부터 돌계단을 걸어 오는 길과 천외천에서 뻐스를 타고 종점에 올라와 만나는 곳이며 남천문으 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의 시발점이다.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계속하여 돌계단을 로 도보로 등산할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등산할수도 있는 곳이다.
 


 중천문(中天門)

중천문에서 800 m쯤 걷다 보면 운보교(云步桥)가 나온다. 이 돌다리는 길이가 12.2m, 넓이가 4.35m, 높이가 6.1m로서 깊은 개울을 동서로 걸쳐져 있다. 안개가 자욱한 날 산우에서 바라보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마치 구름 우로 걷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운교보(雲步橋)

태산에서는 물을 보기 힘든데 계곡을 따라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운보교 북쪽에서 몇 갈래의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로 되여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가을이여서 물량이 더 적은 것 같았다. 비록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폭포라고 그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이 계곡에는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붐비여 계곡으로 물이 흐른다기보다 사람이 흐른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운보교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나니 배가 촐촐한 감이 나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도시락을 풀어놓고 점심을 먹었는데 둘이서 먹자니 술을 마이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너무 조용하여 흥이 나지 않았다. 하여 옆에서 식사를 하는 등산객들을 불러 인사를 나누고 같이 술을 마이면서 이야기 나누었다. 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니 기분이 더욱 좋았고 여럿이 모여서 술을 마이면서 식사를 하니 흥이 났고 맛도 더 좋았다. 


운보교에서 400 m정도 더 가면 오대부송(五大夫松)이 있다.
 
진시황이 태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곳이다. 당시 진시황제이 고마움의 표시로 이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고대 벼슬직위 의 하로서 24작위 (爵位) 중 9번째의 작위이다.) 작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 다 한다.  오대부송은 아무리 소나무일지라도 2천년 이상은 살 수 없음으로 지금 있는 3그루의 소나무는 청의 옹정(雍正) 황제 8년(1730년)에 보식된 것이라고 한다. 

    오대부송(五大夫松)

오대부송 북쪽에는 오송정(五松亭)이 있는데 정자 앞에 오대부송이 있는것으로 하여 오송정이라고 한다.
 


오송정(五松亭)

오송정을 지나면 태산의 등산로에서 제일 험준한 구간이 18반(十八盤)이다. 이 구간은 0.8km의 거리이지만 수직 높이는 400 m이고 1600여개의 돌계단으로 되였으며 량옆에는 손잡이 란간이 있었고 경사도는 70~80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정말 사다리를 놓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때에 조선시대의 문신(文臣)이며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 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 만 높다 하더라”란 시구를 읊고 또 읊으면서 이 가파로운 돌층계를 한층 한층 톱아 올랐다. 이 시구는 우리에게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하늘 아래에 있는 산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을 기어이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씩 톱아 올라간다면 틀림없이 절정에 올라가 세상을 굽어보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하였다.
 
십팔반(十八盤)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여 남천문에 이르렀다. 남천문은 일천문, 중천문에 이어 삼천문이라고도 하는데 해발 1,460메터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중천문에서 오른 케이블카의 종점인 월관봉(月觀峰)에서 온 유람객, 북천문(北天門)으로 오른 유람객, 돌층계를 따라 올라온 유람객들이 합류하는 곳이다.

 여러 갈래로 올라 온 등산객들이 남천문에서 합류하다
남천문에 오르면 험한 지세는 다 오르고 여기로부터는 평탄한 길도 있고 층계가 있어도 많지 않거니와 가파롭지도 않았다.
 
남천문에서 동쪽으로 벽하사(碧霞祠)까지 0.6 km정도의 구간은 넓고 평탄한 곳인데 이구간을 천가(天街)가라고 한다. 즉 하늘거리 또는 하늘시가(市街)라는 뜻이겠다.

 천가(天街)
 
천가에 들어서면 호텔, 상가(商家)들이 줄줄이 늘어섰는데 여러가지 공예품, 려행기념품들이 진렬되여 있었고 크고 작은 향(香)도 있었는데 어떤것은 삽자루만큼 큰것도 있었다.

   천가에 줄줄이 늘어선 상가들

천가를 거닐면서 보면 상가들이 많거니와 여러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이 남겨 놓은 글들이 많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주은래 동지의 부인이며 생전 전국정협상회의 주석 등영초(鄧颕超) 동지가 80고령에 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 (태산에 올라 조국강산 보니 장려하여라!)란 시구도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 시구를 보면서 당시 등영초 동지의 심정이 태산에 올라 조국의 강산을 내려다 보니 중국 혁명의 성공에 흡족하는 듯한 심정이 아니였게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도 그런 마음에서 그 시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등영초동지의 시구

 

천가의 끝쪽에는 중국고대문화의 대표로 볼 수 있는 고대 건축 군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이 碧霞祠이다.

 벽하사에 오르는 유람객들

     벽하사(碧霞祠)
벽하사는 옥황상제의 딸이자 태산의 녀신 벽하원군(碧霞元君: 도가의 학설에는 남자가 신선이 되면 ‘眞人’이라 하고, 여자가 신선이 되면 ‘元君’이라 한다.) 을 모시는 사원으로서 이 녀신은 태산을 지배하는 태산할머니라고도 한다.
태산할머니께 아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하거나 사업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하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 지는데 소원이 이루어 지면 그것을 보답해야 한다고 한다.
보답하는 방법은 태산에 나무를 심거나 사당을 증축하라고 기금을 하거나 간판을 선물하거나 향을 태우며 제를 지내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정성을 다하여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리념으로 하여 많은 관광객들은 벽하원군에게 마음속 깊은 곳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벽하원군(碧霞元君)

벽하사를 나와 북쪽으로 좀 올라가면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 절벽을 볼수 있다. 절벽의 이름은 대관봉(大观峰)으로 각 시대별로 조성된 석각 비문이 있다. 가장 유명한 석각비문은 세로 12.3 m 가로 5.3 m의 바위에 한 행에 51자씩 24행에 총 1008자가 새겨져 있는 당마애(唐磨崖: 당마애란 당나라때 갈아 만든 절벽이라는 뜻으로 리해된다.)라고 하는데 당나라 현종이 태산에서 봉선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당마애(唐磨崖)

당마애에서 태산의 정상인 옥황봉까지 도보로 몇분 거리에 불과한데 극정에 거의 오를 때에 五岳独尊(오악독존)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있다. 오악은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동악, 산동성의 태산(泰山1,524m), 서악, 섬서성의 화산(華山 2,160m), 남악, 호남성의 형산(衡山1,290m), 북악, 산서성 항산(恒山 2,052m), 중악 하남성의 숭산(嵩山 1,512m)을 말한다. 오악독존은 오악 중 태산이 최고라는 의미로 된다.

 오악독존(五嶽獨尊)

6536개의 돌층계를 톱아 드디여 태산의 극정 옥황정(玉皇頂)에 올랐다. 중국 력대의 제왕들이 봉신(封神)했다는 곳이다. 옥황정은 태산의 주봉인데 도교의 옥황상제를 모시는 사당이다. 정상에 옥황묘가 있다하여 이름을 옥황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태산의 극정에 있는 옥황전(極頂玉皇殿)
사당 중앙에는 옥황대제의 동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며 모든 것이 자의의 뜻대로 되여 줄것을 빌었다. 그리고 옥황상제의 왼쪽엔 관음보살, 오른쪽엔 재물을 부르는 재신(財神)을 모시고 있었다.

 

 옥황대제(玉皇大帝)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재신(財神)

정원에는 泰山極頂(태산극정) 1545米라고 새겨진 표지석(標識石)이 있었다. 신 화사전이나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모두 태산의 해발고도가 1524 m로 되여 있는데 표지석의 1545 m는 어느 때에 측량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측량수준으로 1545 m였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태산의 극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구름과 뭇 산봉우리들이 발 밑에 있었고 소박한 감정으로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이 시각 가습 뿌듯이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만 높다 하더라.” 란 시구를 다시 한번 읊었다. 오악독존의 절정에 오른 그 마음 어찌 흐뭇하지 않으랴. 그 흐뭇한 마음의 표현을 “不到长城 非好汉”(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란 모택동의 시구로써 하늘 높이웨치고 또 “不登泰山 非好汉!” “태산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 하며 하늘 높이 웨치고 또 웨치였다.

 옥황전(玉皇殿)

1545m 극정석 주위에는 붉은 리본들이 매여 있었는데 온 가족에 복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고 헤아릴수 없는 자물쇠들이 잠겨 있는것은 옥황상제에 빈 복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말라는 뜻이란다. 붉은 리본을 매고 누른 자물쇠를 잠그어 놓은것이 이곳뿐만 아니라 태산의 모든 사당에 다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온 가족에 복을 가져온다는 붉은 리본

태산이 높다하는것은 그의 해발고도가 높아서 높다는것이 아니다. 태산의 주봉 인 옥황정의 해발고도는 1,524m 이지만 장백산주봉인 백두봉의 해발고도는 2,749m 로서 태산의 해발고도보다 1,225m나 더 높다. 장백산은 절대고도는 높지만 상대고도가 태산에 비해 그리 높지 않기에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지만 우리의 시각으로는 매우 높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예로부터 무엇을 높이에 비길때 태산에 비하지 장백산에 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산은 해발50m이하의 화북 평원에서 해발 1,524m 의 높이로 우뚝솟아 절대고도는 높지 않지만 상대고도가 높기에 아주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옥황전 서북쪽에는 송신탑과 방송국 호텔이 있었다. 

  방송국호텔(電臺賓館)

  정상일대와 천가에 줄줄이 늘어선 호텔과 상가들
정상 옥황정 바로 밑에 공등암(孔登岩)이란 석각이 있다. 공자가 태산 정상을 오른 것을 기념한 표지석이다.
 
 공등암(孔登岩)
옥황전 바로 밑에는 또 공자묘(孔子廟)가 있었다. 우리는 옥황정에서 천하절승경 개를 마음껏 흔상한다음 내려오면서 공자묘를 들러 보았다. 공자묘 입구에는 “공자묘”라고 쓴 커다란 패방(牌坊)이 있었다
 .
공자묘 패방(孔子廟牌坊)
패방에 들어서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공자묘이다.
 
 공자묘(孔子廟)
 

묘안에는 공자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
   공자소상(孔子塑像)


 공자묘에서 다시 벽하사까지 내려와서 동쪽으로 좀 가면 해돋이를 본다는 일 관봉(日觀峰)이 있다. 일관봉으로 가는 길 왼쪽에 雄峙天東(웅치천동, 즉 떳떳하 게 하늘 동쪽에 우뚝 솟았다 란 뜻이겠다.)란 비석과 함께 孔子小天下處 란 비석이 있었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登泰山而小天下(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자가 이런 말을 한데 대하여 지금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는 거의 비슷하였다. 즉 공자가 당시 자기의 사상과 포부를 세상에 떨쳐 보이고 싶었지만 그것을 받아줄 군왕이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하였단다. 즉 너희들이 권력으로 천하를 지배하지만 내 보기에는 그저 고만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군왕을 비하하며 자신을 위로 하였다고 한다.  

 공자소천하(孔子小天下處)
이곳에서 동쪽으로 좀 더 가면 일관봉이며 일관봉에는 태산기상관측소, 8.1호텔, 일관봉호텔이 있었다.

 일관봉(日觀峰)  일관봉에 있는 태산기상관측소
일관봉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망망대해였다. 즉 구름이 태산의 중턱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일관봉에서 내려다 본 운해(雲海)
일관봉에서 태산기상관측소, 태산의 운해까지 구경하고 나니 해님이 옥황정 서쪽에서 얼굴은 가리우기 시작하였다. 좀 지나 해가 구름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서쪽하늘이 여러가지 색갈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카메라를 들고 이 아름다운 경치를 렌즈에 닮았다.

 저녁노을에 비낀 옥황정과 송신탑
태산의 저녁노을까지 흔상 하였으니 이제는 숙소를 잡는것이였다. 태산에는 대묘로부터 시작하여 일천문, 중천문, 남천문, 천가, 옥항정, 일관봉 등 곳에 여러 개의 호텔들이 있었는데 신계호텔(神憩賓館)은 태산극정에서 유일한 3성급 대외개방 호텔이였다. 신계호텔은 벽하사(碧霞祀)를 앞에 두고 옥황정(玉皇頂)을 뒤로 하고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일관봉(日觀峰) 있다. 호텔은 태산벽하원군(泰山 碧霞元君)의 후침궁(后寢宮)인 신계궁 (神憩宮) 원래의 위치에 건축하였다하여 신계호텔(神憩賓館) 이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주숙처를 신계호텔에 잡았다.  

  신계호텔(神憩賓館)
호텔복도에는 일출시각표를 커다랗게 붙여 놓았는데 10월 10일의 일출시간은 6시 6분이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일출시간을 놓칠세라 명심하여 일어났는데 시간을 보니 5시가 좀 넘었다. 신계호텔에서 일관봉까지는 걸어서 몇분 정도의 거리기에 우리는 천천히 일관봉으로 향하였다. 일관봉에는 일출을 구경하려 나온 유람객들로 붐비였는데 10월의 태산의 새벽 기온이 너무 차기에 모두 호텔에서 빌려주는 초록색 솜외투를 입고 일제히 동녘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6시가 거의 될 무렵 동녘하늘이 훤히 밝아 오더니 차츰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남색 등 여러가지 색깔로 바뀌면서 하늘을 물들였다. 텔레비죤에서만 감상할수 있었던 아름다운 장면을 오늘 대자연에서 직접 감상하게 되였다. 이 시각 나는 미리 주비하였던 카메라로 이 아름다운 정경을 렌즈에 담았다.

  태산의 려명
6시 6분이 되여 해님이 구름속으로부터 서서히 얼굴을 올리 밀기 시작하자 남색, 보라색은 다 사라지고 붉은색, 귤색, 황색으로 동녘 하늘을 물들였으며 우리의 발 밑은 잔잔하게 파도 이는 망망대해로 변하였다. 마침 마술사가 요술은 피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될수 있는 이 장면을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려고 사진촬영사와 미리 약속이 있었는지라 사진사는 우리를 촬영 하기 좋은 위치에 세워놓고 찰각찰각 샤타를 눌렀다. 몇분 후에 사진이 나왔는데 참 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태산의 일출은 바다의 일출과 매우 흡사하였는데 다른 점이라면 바다의 일출은 노을 빛이 바다물에 빛껴 대칭으로 물들어 똑 같은 영상이 수평선의 아래 우에 나타나는데 태산의 일출은 대칭영상이 없었다. 우리의 이번 태산려행은 참 운수가 좋았다. 태산 일군들의 말을 들으면 태산에서 이런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는 드물다고 한다. 태산의 기상조건을 보면 높은 산이여서 구름이 많거나 흐린 날씨가 많기에 가시거리가 작아 태산유람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가는 유람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헌데 우리의 려행은 10월의 가을날씨여서 그런지 모든 기상조건 다 우리의 요구를 만족 시키였다. 참으로 행운인 것 같았다.
  일출구경을 나온 유람객들

 려명을 맞은 옥황정
태산의 일출까지 흔상하고 보면 우리의 태산려행은 원만히 결속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이번 태산려행이 우리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옥황정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 보고싶은 생각을 억제할수 없었다. 하여 우리는 다시 옥황정에 올라 태산의 정경을 다시 한번 흔상하였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람객들도 우리와 마찬가지 심정으로 태산의 일출을 구경한다음 다시 옥황정에 올랐다.

  일출을 구경한 유람객들 옥황정에 오르다
다음 우리는 호텔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태산 천가(天街)의 상가(商街)를 거닐면서  여러가지 관광상품들을 구경도 하고 기념으로 될만한것들을 사면서 남천문까지 왔다.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의 전경을 구경하는것도 또 다른 멋이라 내려올 때에는 도보로 하산하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였다.

   케이블카 남대문역
케이블카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마침 10월 한창의 단풍계절이여서 태산의 경치는 울긋불긋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자못 아름다웠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태산
중천문에서 도보로 남천문까지 오르는데 네시간이 거의 걸렸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중천문 케이블카 표지석
   중천문 뻐스정류소

중천문에서 다시 셔틀뻐스를 타고 천외천(天外村)으로 내려오면서 보니 경사도가 너무 강하여 갈지(之)자를 이루며 내려왔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도보로 등산할때에는 남천문까찌 7시간 더 걸렸지만 내려올 때에는 케이블카와 셔틀뻐스를 타니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태산려행을 기꺼이 다 마친 우리는 태산역에 와서 다시 북경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