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1999년 말, 입국한지 얼마 안 된 나는 동생 친구의 소개로 서울대 한 교수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집에는 아기 엄마의 친한 친구이자 큰 아이 선우의 피아노 레슨 선생님이 계셨는데, 한 주에 두 번 씩 다녀가곤 했었다. 그는 갓 입국한 나에게 갈아입을 옷이 변변치 못한 것을 보고 자기가 입던 옷들을 가져다주어서 고맙게 잘 입군 했다.
서울대 교수인 아기 아빠의 안식년을 맞아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는 통에 2년 반 만에 나는 자리를 뜨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피아노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드리지 못 하고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어느 덧 4년이 지났다. 다시 불법체류를 하게 된 나는 마음이 불안하여 취직 신고하였던 집에서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하지만 막상 나오고 보니 직업소개소에서 불법 체류자에겐 직업을 소개 해 주지 않아 취직하기란 쉽지 않았다.
속 태우면서 고민하던 끝에 예전에 있던 서울대 교수의 사모님 선우 엄마가 생각났다. 모 회사의 부사장으로 출근하는 선우 엄마는 원체 교제가 넓었다. 그는 나를 아기를 잘 돌봐 줬다고 나름대로 예쁘게 봐 줬던지라 기대를 갖고 선우 엄마에게 전화로 일자리를 소개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4년 동안 문안 전화 한번 안 하다가 내가 바빠 전화 했는데 고맙게도 전화를 반갑게 받아 주면서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전화가 왔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이모(선우네 집에서 모두 이모라고 불러서 선생님도 그렇게 따라 부르셨다.), 저 피아노 선생님이에요. 선우 엄마에게서 얘기 들었어요. 일자리 구하신다고요? 제가 레슨 다니는 집이 하나 있어요. 애는 둘이고 애들 아빠, 엄마는 착해요. 이모가 그 집에 가셔도 괜찮을 거예요."하고 말했다.
우리의 만남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시작 되었다. 선우 엄마가 바쁘시니깐 피아노 선생님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때 선생님은 피아노 레슨을 그전처럼 업으로 하지 않고 나를 취직 시켜준 집의 큰 딸 소은 외에 몇 명만 가르치시고 옷 가게를 차리고 있었다. 그는 계절에 맞게 새 옷들을 나에게 자주 갖다 주셨다. 돈을 드리려고 하면 빨리 돈 모아서 아들 보러 가라고 했다. 그러시는 선생님이 너무 고마웠다.
어느 하루 저녁, 퇴근하는 소은의 엄마의 뒤에 피아노 선생님이 따라 들어섰다. 선생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나의 앞에 인삼 세 뿌리를 내 놓으면서 "이모, 요즘 몸이 많이 허약해진 것 같아요. 이 삼은 6년생이어서 몸에 좋아요. 꿀에 재웠다가 혼자 드세요. 이 집 식구들은 너무 건강하니깐 안 줘도 돼요. 가실 때 까지 건강하셔야 되지요."라고 말하였다.
인삼 세 뿌리가 나의 건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그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에 코 마루가 찡 해 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타향에서 늘 외롭고 쓸쓸하고 위로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나의 가슴에는 그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난류가 흐르면서 서러움이 북받쳤다
나는 옷소매로 눈 굽을 찍으면서 목멘 소리로 말 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내일 꿀 사다 재워서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아니요. 파는 꿀이 별로 안 좋아요. 저의 집에 좋은 꿀이 있어요. 레슨 다니느라 오늘 못 가져 왔어요. 다음에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인삼을 주신 것 만 해도 감사한데…꿀은 제가 살게요."나는 너무 고마워 어쩔 줄 몰랐다.
이튿날 저녁에 소은의 엄마가 퇴근하면서 꿀 병이 든 종이 백을 들고 집에 들어서면서 "이모"하고 불렀다.(나는 돌아가며 "이모"로 호칭이 된다.) "피아노 선생님이 꿀 보냈어요. 내가 홈 쇼핑으로 배달 시켰다고 해도 말 안 듣고 보내는 거애요. 고집도 어찌나 센지, 흐흐흐."
낮에 홈 쇼핑에서 배달된 부식품속에 꿀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냥 집에서 먹자고 산 줄로 알았는데 나를 주려고 주문했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소은 엄마에게도 연신 고맙다고 인사 드렸다.
지난겨울에 피아노 선생님이 겨울 코트를 주셨다. 추운 겨울이 지나자 올 봄에 또 정장식 봄코트를 갖다 주셨다. 값진 옷 같아서 부담이 됐다. 이 옷 대가로 무었을 드려야하는지, 혹시 뭔가를 부탁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옷을 주시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나는 전화로 "전 드릴 것이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해서 미안해요."하고 말 했다.
피오노 선생님은 "미안 해 할 것 없어요. 그냥 주고 싶어서 드리는 거 얘요. 부담 갖지 마세요. 정 부담이 되신다면 인젠 안 드릴게요."라고 말 했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에 또 옷 몇 견지 씩 가져다 주셨다. 나는 그냥 받았다. 왠지 모르게 선생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나는 선생님이 주시는 대로 나를 코팅하였다. 보는 사람마다 옷이 예쁘고 좋다고들 했다. 나는 옷의 가격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주는 대로 입었다.
얼마 전에 한 옷 가게에서 종업원이 내가 벗어 놓은 봄 코트를 보더니 "좋은 옷을 사셨네요."라고 하면서 "백화점에서 6~7십 만원씩은 팔리는 옷"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비싼 옷 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몰라주고 도리어 부담 갖고 의심한 자신이 민망하고 미안했다.
이전에 내가 미안해 할 때마다 소은의 엄마는 "미안 해 하지 마세요. 이모에게만 드리는 게 아니 얘요.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옷을 잘 갖다 줘요. 선생님은 본래 그래요. 자기는 잘 살지도 못 하면서…"라고 원망조로 말하곤 했다.
선생님의 남편은 과외 선생이시고 미국으로 유학 간 딸 뒤 바라지를 하며 또 시어머니의 잦은 병시중으로 선생님의 살림이 별로 넉넉하지 못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입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을 걱정하는 말들이 자주 흘러 나왔다.
선우네 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선생님은 선우 엄마를 찾아 와서, "영아, 우리 교회에 진짜 도와 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나 돈이 모자라. 네가 도와주면 안 되겠니?"하고 말했다.
이에 선우 엄마는 별로 주저 없이 바로 "얼마면 돼?"하고 묻자 선생님이 "백만 원이면 될 것 같아."라고 하니 선우 엄마가 "알았어. 백만 원 입금 해 줄게."하고 말했었다.
그들의 대화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쉽게 잘 통하였다. 갓 입국하여 세상물정 모르는 나는 그 두 여인을 신기 해 하면서 존경의 눈길로 다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나밖에 모르는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단체가 아닌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니 참 살기 좋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면역력이 다 떨어진 노인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는 병을 하고 있었다. 소은엄마에게서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또 전화를 걸어 왔다.
"이모, 어때요? 괜찮으세요? 이모가 꿈이 없어 그래요. 윤혁(내가 돌보는 작은 아이)이 어릴 때는 바삐 보내시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윤혁이가 커서 여유가 있으니깐 긴장을 풀고 맥을 놓아 그래요. 전 나중에 작은 커피 점 하나 꾸리려고 교육 받으러 다녀요. 저는 이제 남은 인생을 자그마한 커피 점을 꾸리고 버는 돈으로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저는 매일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어요. 이모가 윤형이가 좀 더 크면 그 집에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 집에서 일 그만 두면 저하고 같이 일 해요. 저는 이모하고 일 하려고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시간이 되는대로 컴퓨터에 들어가서 커피에 관한 것들을 많이 보세요. 저는 이모를 친구로 생각해요. 전 친구들에게 중국 친구가 있다고 자랑해요. 우린 동갑이니 친구 맞죠?"
친구! 나는 눈물이 났다. 그가 나의 친구로 되어준다면 나야 더 없는 행운이지! 지금 까지 나에게 잘 해주신 것은 그 무엇을 바래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고 우정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삼스레 느꼈다.
나는 여태 것 그의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 놓인 것 같아 그에게 별로 정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성씨가 "우"이고 명함이 "순선"이라는 것도 2년 전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지금 알고 보니 그 보이지 않는 장벽은 내가 쌓아 놓은 것이었다. 선생님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렇게, 선생님은 비록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지만 항상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며 사는 멋진 사람이기에 나는 정말 그를 존경한다. 나도 주위 사람들과 나누며, 봉사하며, 정말 인정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피아노 선생님, 아니, 나의 소중한 친구 우순선 씨와 손잡고 함께 멋진 일을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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