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의 조선민족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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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의 조선민족 서예
  • 서영근
  • 승인 2010.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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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근의 서예야놀자]광복 이후 건국 직전의 서예 현황
1) 光復 직후의 서예 현황
光復 以後 朝鮮族 私立學校는 사라지고 國公立學校들이 개교하기 始作하였다. 朝鮮民族 國公立學校로는 1945년 9월 10일 牧丹江市에 設立된 高麗中學校와 高麗女子中學校이다. 두 학교는 1946년에 合倂하여 高麗中學으로 되었는데 학생 수는 800명 내외였다. 이것이 광복 이후 세워진 첫 朝鮮民族學校이다.
1946년 8월 東北 각 省 대표는 민주정부공동시정강령을 채택하였는데 그 강령 제18항에는 ‘小數民族의 言語, 文字, 宗敎信仰과 풍속을 존중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小數民族은 모든 영역에서 자기의 언어를 사용하고 發展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며 따라서 교육에서도 자기의 言語, 文字로 民族文化敎育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中華人民共和國 창건 전인 1949년까지 朝鮮民族 학교들은 한글, 산술, 습자과목을 개설하고 한국의 교재를 복사하여 사용하였다. 1945년 이전에는 朝鮮語로 부르던 국어를 광복 이후 1947년부터는 ‘한글’이라 칭하였는데 이 명칭은 1952년까지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日本帝國主義가 투항한 후 中國共産黨의 영도 하에 長期間 繼續되었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족평등을 얻게 되었다. 민족평등의 획득은 우리 朝鮮民族에게는 日帝에게 빼앗겼던 자기의 言語文字를 되찾는 것으로써 민족교육을 지켜나갈 수 있는 권리를 찾은 것이었다. 또한 민족 교육도 정상화되어 書藝基礎인 습자교육을 예전처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광복이후의 서예교육 상황에 대하여 중국 朝鮮民族 小說家 徐光億의 증언을 들어보자.


1947년에 나는 延吉縣의 동진 小學校(교장: 김봉춘) 1학년생이었는데, 그 때 우리는 한국의 한글, 산술, 습자 교재를 사용하여 수업하였다. 습자는 한글서예를 배웠으며 붓으로 썼다. 1947년부터 한국의 교재를 가지고 김봉춘 교장 등이 우리 집에 와서 등사를 하여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1949년 초까지 사용하다가, 延邊敎育出版社가 설립 된 후에는 중국에서 출판한 교재를 사용하였는데 그 때부터는 습자과목이 없었다.

위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광복이후부터 새 중국 창건 전까지는 한국의 교재를 사용하여 朝鮮民族 학생들에게 서예의 기초인 습자를 가르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습자 과목을 개설한 것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습자교육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자 습자가 아닌 한글습자임을 알 수 있으며 1957년 池升元의 書體가 宮體와 유사한 것을 보면 이때 교본의 書體는 궁체일 가능성이 크다.
이 후로 중국 朝鮮民族 居住 地域에 軍政大學, 師範大學 등 많은 학교들이 성립되었다.

1947年 3월24일에는 전국에서 첫 民族出版社인 延邊敎育出版社 設立하여 朝鮮民族學校의 교재를 출판하여 민족교육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49년 4월 1일에 延邊大學이 창립되었는데 전국에서 최초의 小數民族 大學으로서 민족의 言語 文字를 敎學用語로 사용하여 朝鮮民族 문화를 보급하였다. 7월에는 延邊師範學校 설립하여 朝鮮民族소學校 교원을 양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1949년 4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중국 朝鮮民族 소학교가 1500개소에 달하였으며 학생 수는 18만 명이었고, 중학교는 70개소에 학생 550명이었다.
광복이후부터 새 중국 창건 전까지는 한국의 교재를 사용하여 朝鮮民族 학생들에서 서예의 기초인 한글과 습자를 가르쳤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습자과목을 개설한 것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習字敎育을 중요시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2) 文化藝術界와 書藝
革命戰爭時期에 朝鮮民族 지역에서는 각종 新聞雜誌를 발간하였다. 1935년에 발행한 『東方雜誌』의 표지글씨는 아주 精巧한 漢文 小篆體로 쓴 글씨인데 가로획 오른쪽을 약간 기울게 쓴 것이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첫 朝鮮語放送은 1938년 4월 1일 延吉에서 誕生되었다. 1943년에 延吉放送局을 間島放送局으로 改稱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도망가면서 기계 설비를 파괴하였다. 광복 직후 延吉放送局은 蘇聯軍의 보호 하에 1946년 1월 3일 방송을 회복하고 延吉市新華放送局으로 改稱하였다.
1945년 9월 18일에 韓民日報가 延吉에서 창간되었다. 이는 광복 이후 延邊에서 제일 처음 창간된 朝鮮民族 신문이다. 11월 4일에 폐간되고 이를 토대로 11월 5일 延邊民報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 역시 104호를 발간하고 1946년 11월 24일 폐간되었다.
人民新報는 1945년 10월 16일에 창간되었는데 어려운 北間島에서 朝鮮民族을 政治 文化的으로 계몽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吉東日報 한글판은 1946년 5월 4일에 創刊되었는데 후에 1945년 10월에 창간된 人民日報와 合倂하여 吉林日報 한글판으로 改編되어 吉林省委 機關誌로 되었다. 1948년 3월에 吉林日報가 폐간되자 그해 4월 1일에 延邊黨委의 機關誌로 延邊日報로 재 創刊되었다. 이때의 社長은 崔采, 총편은 林民鎬였다.
全 東北이 해방된 후 延吉의 延邊日報, 哈爾濱의 民主日報, 沈陽의 團結日報를 合倂하여 1949년 4월 1일에 東北朝鮮人民報를 발간하였다. 당시 발행부수는 29,923부였고, 1,583호를 내고 정간하였다.
광복 이후 한글잡지인 불꽃, 大衆, 少年兒童, 敎育通信, 延邊文化, 文化, 解放, 新建設 등을 刊行하여 朝鮮民族 言語文字의 보급과 발전에 촉진작용을 하였다.
이 시기의 신문이나 잡지의 표지 글은 대개 美術體로 쓴 것이거나 집자한 것이었다. 延邊日報의 전신인 東北朝鮮人民報의 표제도 毛澤東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었다. 延邊日報로 개칭된 이후에도 毛澤東의 한문 글씨를 사용하다가 1956년부터 池升元의 한글 글씨를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동북 朝鮮民族들은 자발적으로 延邊勞動靑年總同盟을 결성하였으며 하얼빈, 목단강, 통화지역 朝鮮民族들도 선후하여 民主同盟, 民主聯盟 등 대중적 조직을 건립하였다. 1946년 3월 17일 朝鮮人民 民主同盟에서는 音樂, 美術, 演劇, 文學 부분을 망라한 東北新興藝術協會를 創立하였다. 성립대회에서는 김예삼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美術部 책임자로는 신용검, 정미정, 위기명을 추천하였다. 이 협회의 결성을 시작으로 조직적인 書法·美術 전시가 시작되었다.

1946년 10월 9일에 吉林省民主聯盟에서는 訓民正音頒布 500周年을 紀念하여 大會를 召集하고 한글연구회를 창립 발기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自己의 겨레들에게 자기 民族 言語文字의 科學性, 優秀性을 普及, 發展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3) 대표 서예가
이 시기의 대표적 화가이며 서예가는 韓樂然이다. 韓樂然의 원명은 光宇이며 1898년에 중국 吉林省 龍井村의 한 開拓貧民家庭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가장 일찍 共産主義 각오를 갖추고 프랑스 유학을 간 예술가의 한사람으로서 중국 근대미술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은 朝鮮民族의 걸출한 예술가이다.
1919년 3월 朝鮮獨立宣言文이 전해지자 反日民族獨立運動에 同參하였다. 1924년에 上海美術專科學校를 卒業하고 중국 共産黨의 파견으로 심양에 가게 되었다. 그때 韓樂然으로 이름을 고쳤다. 연후에 그는 沈陽에서 美術專科學校를 創立하였다.
1929년 가을 프랑스로 유학 가서 油畵工夫를 하게 된다. 美術工夫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46년 4월에 신강의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5월 초 韓樂然은 투루판으로부터 숭금대에 가서 당조 시기의 동굴절을 고찰하고 또 고창국의 옛 지역을 고찰하였다.
후에 그는 이번 發掘事業을 총결하여 「新疆 文化寶物庫의 새 발견-옛 고창구자 예술탐사기」라는 글을 써서 新疆日報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신강 古代文化유지인 고창국의 文化보물고를 世上에 알려준 것이다. 또한 그가 신강 천불동에 남긴 題記의 필체는 방형을 이루면서 웅장하면서도 골기가 살아있어 <廣開土太王碑>의 서체와 아주 흡사한 예서이다.

이 시기 한문 서예의 경우 앞에서 제시한 한락연의 서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廣開土太王碑> 서체가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고, 小篆과 行書, 草書 등 다양하면서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글씨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체계적으로 공부한 서예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혁명 시기에 항일 투사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많아도 서예는 관심 밖의 일이었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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