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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하문화원 정인갑 원장 |
[인터뷰=중국동포타운신문 김용필 편집국장] 중국 북경대학에 중문학과가 설립된 때는 1959년. 중문학과는 한 해 10명 정도만 뽑는다. 그래서 북경대 중문학과 출신은 현재까지 300여명에 불과하며, 그 중 전공을 살려 중문학자로 활동하는 학자는 150여명 뿐. 이는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 13억 인구 중 고대문헌으로부터 현대의 한문학에 능통한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북경대 중문학과를 졸업한 조선족 학자는 정인갑 교수가 유일하다.
이런 능력자가 지난 7월 인천 송도 국제도시 밀레니엄빌딩 713호에 황하문화원을 설립하고 "족보 번역•정리 사업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한다. 지난 10월 12일 정인갑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정인갑 교수는 10년간 알고 지낸 한국인과 함께 올해 7월,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황하문화원을 설립하고 족보의 정리와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단지 족보 번역 수준이 아니다. 한문으로 된 자료중에는 번역되지 않은 자료들이 수 만 가지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초서(흘림체)로 쓴 서간자료들이다. 당시 시대적 생활상은 당시 지식인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 상당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것은 그 집안의 내력 뿐만 아니라 시대적 정서와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문헌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서신 내용 대부분이 해서(정자체)가 아닌 초서(간략 흘림체)로 되어 있어 웬만한 사람들이 이해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인갑 교수는 누구? |
북경대 중문학과 졸업한 유일한 조선족 학자 황하문화원 원장 1947년 중국 요녕성 무순에서 출생한 정 교수는 조선족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원래 수학천재로 불리울 만큼 수학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지만 그가 전공과 무관한 중문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시대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
정인갑 교수는 10년간 알고 지낸 한국인과 함께 올해 7월,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황하문화원을 설립하고 족보의 정리와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단지 족보 번역 수준이 아니다. 한문으로 된 자료중에는 번역되지 않은 자료들이 수 만 가지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초서(흘림체)로 쓴 서간자료들이다. 당시 시대적 생활상은 당시 지식인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 상당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것은 그 집안의 내력 뿐만 아니라 시대적 정서와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문헌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서신 내용 대부분이 해서(정자체)가 아닌 초서(간략 흘림체)로 되어 있어 웬만한 사람들이 이해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은 간자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한문학을 공부한 학자가 한국에서 공부한 한문학자보다 초서를 이해하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기 마련입니다. 중국어 간자체는 한문의 초서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인갑 교수의 설명이다. 현재 정 교수는 한 양반집에 소장하고 있는 천여편의 서간집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서간집은 500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집안 대대로 온 서신을 모아 놓은 것인데, 그 대부분이 초서로 되어 있다.
지난 8월달부터 이 서간집을 번역해 온 정 교수는 100편을 번역하면서 초서에 대해 많은 공부도 하게 되고, 또 알지 못했던 초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여러 문헌을 비교해 보고 찾아내면서 마치 보물을 찾는 기분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정인갑 교수가 ‘족보’에 대한 애착은 뿌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준다.
"한문학자로서 남은 평생을 족보를 번역 정리하는 일에 바치겠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황하문화원을 설립하고, 문화원 공동설립자가 지난 20여년간 수집한 족보를 번역•정리해 인터넷사이트에 올리는 인명족보사전을 구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개개인이 家承(가승)을 만들어 간직하면 좋을 것입니다. 가승은 족보와 다른 것이 자기의 직계 조상에 대해 모든 정보를 정리해낸 책이죠."
정교수는 그 표본으로 어느 李씨 성을 가진 조선족 지인에게 만들어준 延安李氏(연안이씨) 가승 소책자를 보여주었다. 이 책은 연안 이씨 성을 가진 조선족의 가문 내력을 정리한 손바닥 크기만한 80여페이지 되는 책자였다. 연안이씨에 대한 상세한 소개 및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 그리고 연안이씨 직계 조상 중에서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 알려주고 주요 문헌도 수록해 놓았다. 이 책자를 보면 나의 조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고 내가 누구인지 알도록 해주는 책인 것이다.
정 교수는 "조선족이 조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정체성이 흔들릴 때 족보를 정리하고 후손들이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면서 그 예를 들려준다.
“1982년의 김계월(金桂月)이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제가 조선족이라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초청하였던 것인데, 그 분이 말하길 저는 비록 만족(滿族)으로 돼 있지만 사실은 조선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혁 때 없어진 우리집 족보에‘사르호 김씨, 원래는 조선 정주인이다(薩爾湖金氏, 其先朝鮮定州人也)’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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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현재 정인갑 교수가 해독하고 있는 초서로 작성된 서간집 일부이다. 초서는 급하게 써서 보낸 편지체로 흘림체로 써서 글자 의미를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들뿐만 아니라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체가 많다고 한다. |
그러면서 그는 족보가 없어진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정교수에게 눈물을 흘리며 “만약 족보가 남아 있으면 대대손손 우리 가족의 뿌리를 전하련만…” 말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한 예는 북경 모 대학의 박씨 성을 가진 학생을 만난 경험담이다. 그 학생은 본관이 북경이며 조선족이 아니라고 우겼다. 정 교수가 “필연 조선족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니 물어보아라”라고 하였다. 며칠 후 그가 다시 정교수에게 찾아와 “과연 조선족이더라. 우리 가족은 북경에 산지 몇백년 되고 증조부까지 대대손손 향산(香山)의 문직이를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자신이 조선족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후세가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정교수는 "금년은 한일합방 100주년이다. 중국 조선족의 경우 100년이면 4세며, 5세가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가승 정도는 만들어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교수는 "2001년 한국의 종묘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재로 등록되었다."면서 "종친문화는 우리민족 문화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것을 잘 정리하면 우리민족의 문화를 보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에 대한 공헌하는 일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아있는 족보는 모두 한문으로 씌어져 있으며 현재 사람들이 터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인갑 교수는 ‘수학천재’가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갈고 닦은 한문실력으로 족보를 번역정리하고 가승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일을 하도록 한 하늘의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 제185호 2010년 10월 2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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