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吉雨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남한강문학회 회장, 문학의강 문인회 회장, skc663@hanmail.net
『고려사』 열전(列傳) 제9 윤관(尹瓘) 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윤관이 왕(예종)의 명을 받고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비문을 지었는데, 마음에 차지 않아 왕이 김부식(金富軾)에게 다시 짓게 했다. 당시 윤관(1040~1111)은 정승 반열에 있었으니, 예의상 일단 사양할 일이었으나 김부식(1075~1151)은 그러지 않고 곧바로 지었다. 이에 윤관의 아들 윤언이(尹彦頤, ?~1149))가 내심에 분한 마음을 품었다.
인종 11년(1133)에 왕이 국자감에서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의시키고 윤언이에게는 질문을 하게 하였다. 윤언이는 주역에 매우 정통한 터라 이모저모로 따지니, 김부식이 대답하기 곤란하여 이마에 진땀을 흘렸고, 이를 마음에 담았다. 윤언이는 아버지에 대한 옛 무례(無禮)를 잊었어야 했는데 보복한 것이다.
인종 13년(1135)에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원수로, 윤언이는 보좌 장수로 토벌을 나서게 되었다. 윤언이는 여러 공을 세웠고, 난은 김부식의 승리로 평정이 되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윤언이는, 묘청과 같이 모반한 정지상(鄭知常)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왕에게 고하였다. 윤언이가 정지상과 친한 사실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윤언이는 양주(梁州) 방어(防禦)로 강직(降職)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 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김부식은 국자감 주역 강의 때 당한 수모(受侮)를 앙갚음한 것이다.
윤언이는 6년이 지나 인종에게 억울함을 세세하게 글로 올렸다. 같이 처벌을 받은 김정(金精)은 7개월 만에 고관으로 복직되었고, 유충(惟忠)도 강남으로 좌천되었다가 3년 만에 전직에 돌아왔다. 그러나 윤언이는 6년이 지나도 복직이 되지 않았었다. 실권자 김부식의 이전의 원망스러움이 가셔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언이는 아버지 윤관에 대한 김부식의 무례함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교만(驕慢)으로 보복하여 뒤에 관직을 잃고 여생을 괴롭게 사는 불행을 맞았고, 김부식은 자신의 부족한 학식의 수모를 가슴에 담았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의 복수를 내린 것이다.
윤언이는 뒤에 정당문학이 되었다가 의종 3년(1149)에 죽었다.
예의(禮儀) 없는 말이나 행동은 별 생각 없이 행했더라도 겪은 사람은 오래 머리에 새기고, 남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도 당한 사람은 가슴에 원망(怨望)을 담는다. 때로는 원(怨)이나 한(恨)이 되어 보복(報復)이나 복수(復讐)로까지도 번진다.
부모가 당한 일을 자식이 보복하면, 당한 그 자녀가 또 보복을 한다. 자손이 다시 복수를 하면, 그 쪽 자손이 또한 복수를 한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 그러므로, 자식이 부모의 원한을 복수하는 것은 효(孝)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보답(報答)이나 보은(報恩)도 반복될 수 있다. 따뜻한 대우를 받으면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은혜를 입으면 고마움을 가슴에 새긴다. 보답이나 보은도 꼭 당사자나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잊히거나 갚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손들이나 다른 사람이 받기도 한다.
그런데, 보복이나 복수는 서로 원한과 아픔을 갖게 하지만, 보답이나 보은은 서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이루고 이루지 못함을 떠나서 간직한 동안, 하나는 괴로운 악덕(惡德)이 되고 다른 하나는 흐뭇한 미덕(美德)이 되는 것이 다르다. 이 어찌 한 때의 일이요, 지나간 일로 치부하고 말 일인가. 어려서부터 교양과 예의범절을 누누이 강조하는 뜻을 살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