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과 조선민족 서예
상태바
항일전쟁과 조선민족 서예
  • 서영근
  • 승인 2010.09.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영근의 서예야 놀자]日帝 時期의 조선민족 書藝

▲ 청봉체의 근원이 되는 구호나무 글씨
조선민족이 중국 대륙으로 이주 후 첫 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의 설립으로 전개된 교육열기는 1920년대에 고조에 이르렀다. 1928년 5월에 調査한 僞滿洲國敎育方案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東北三省에 朝鮮民族 사립학교가 470개소에 달하며, 교원이 839명, 학생이 16,929명이었다. 같은 해 延邊地域의 朝鮮民族 사립학교는 201개소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민족 교육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1931년 중국 滿洲地域에서 정변(9.18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강제로 東北三省을 강점하고 1932년에 滿洲國을 세웠다. 日帝는 “100만 밖에 안 되는 朝鮮民族은 새 國家의 憂患이 될 것이다. …解決方法은 그들을…同化시키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滿洲國과 손을 잡고 朝鮮人學校를 정돈하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9.18사변 이전에 710개소가 되던 朝鮮人學校가 1932년에는 377개소로 줄어들었다. 남은 학교들의 교과목도 조선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을 다룬 내용이나 과목이 줄어들었다. 朝鮮語敎育도 폐지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였다. 결국 습자(習字)교육도 그만큼 어렵게 되었다.

日帝가 중국 동북을 강점한 14년간에 朝鮮民族들에게 강요한 植民地奴隸敎育은 첫째, 강제적인 황민화, 둘째, 식민지 예속적 직업화, 셋째, 학교교육의 군사화, 넷째, 軍國主義意識과 植民主義意識의 결합 등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일제는 軍事, 政治, 經濟, 文化 및 敎育 등 諸 분야에서 植民地政策을 강화하여 朝鮮民族을 동화시키려 하였다.

일제는 1932년에 동북 각 학교에 원래 三民主義 입장에서 쓴 민족사상이 짙은 교재를 쓰지 말며, 무릇 黨義와 관련된 교과서를 일률로 폐지하며, 中國 國旗와 中國 地圖를 걸지 말며, 中華란 말과 글을 쓰지 말며, 朝鮮人學校에서 朝鮮歷史를 가르치지 못하며, 太極旗를 걸지 말며, 愛國歌를 부르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일제는 朝鮮民族 反日私立學校를 강제로 합병, 개편, 폐교시켰으며 반일감정이 있는 朝鮮民族 교원과 학생에 대하여 免職, 逮捕, 監禁, 虐殺 등 野蠻的인 진압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9.18사변 전에는 동북에 朝鮮民族 학교가 도합 710개나 있었던 것이 1932년에 이르러서는 377개로 감소되었다. 延邊에는 109개였던 朝鮮族 사립학교가 사변 이후에는 28개로 감소되었으며 宗敎系統의 사립학교도 108개에서 63개가 폐교되었다.

일제의 植民地奴隸敎育方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어를 조선의 국어로 삼아야 하고 일본어는 장차 滿洲國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니 우리나라의 국어라는 신념을 수립하여 일본어에 익숙하도록 힘써야 한다.

▲ 1941년 항일 구호를 쓰고 있는 조선 군인, 中韓이라는 글씨에서 당시에 조선이라는 표현이 아닌 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음을 알수 있다. 서체에서 광개토태왕비체의 풍격을 보아낼수 있다.
이런 교육방침에 따라 日本語를 국어科目으로 하고 시간을 대폭 늘린 반면에 朝鮮語 時間을 대폭 줄였으며, 1941년에 공포된 國民學校規定에 따라 朝鮮語의 사용과 교육을 취소하고 모든 朝鮮民族私立學校를 폐교시켰다.

한글교육과 병행하는 습자교육은 일제강점기에는 있을 수 없었다. 다행히 1934년에 大宗會에서 설립한 大宗學院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書法科目도 개설하고 朝鮮民族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쳤으며 서예교육의 命脈을 이어 갔다. 일제가 設立한 師範學校에서는 일본문화와 일본식교육이 진행되었지만 書道를 중요시한 일본으로서는 習字敎育을 竝行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이 중국 동북부를 강점한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전쟁과 朝鮮民族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시기 중국인과 朝鮮民族의 공동의 적은 일제였다. 특히 1937년 7월 中日戰爭이 발발한 이후 韓中 兩國民은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하였다. 중국 國民黨은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을 支援하였고, 중국 共産黨은 華北朝鮮獨立聯盟과 朝鮮義勇軍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韓國光復軍은 華中․華南戰線에서 國民黨軍隊와 共同作戰을 펼쳤고, 朝鮮義勇軍은 중국 共産黨 八路軍과 함께 華北전선에서 共同作戰을 수행하였다. 朝鮮義勇軍이 抗日武裝鬪爭을 진행한 華北은 중국 이주 朝鮮民族의 中心居住地로서 이 시기에는 孫文의 三民主義가 아닌 共産黨의 革命思想의 影響을 다분히 받게 되었다. 抗日 선전표어를 쓰고 있는 사진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朝鮮이 아닌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획이 곧고 雄壯한 서체에서 〈廣開土太王碑〉의 서풍과 유사함을 보아낼 수 있다.

동북지역 항일전쟁 遊擊地에 中國共産黨이 운영하는 공립 朝鮮民族學校들이 있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東滿과 北滿에 있는 抗日遊擊根據地에서는 中國共産黨의 영도 하에 반일투쟁을 진행하면서 계속 학교를 꾸려 朝鮮民族敎育을 진행하였다. 혁명정부에서는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朝鮮語, 朝鮮歷史, 朝鮮地理, 政治, 漢文 등 교과목을 개설하였는데, 교재는 한글로 된 것이었다. 朝鮮語는 速成方法으로 識字를 마치고 無産階級敎育과 항일교육을 주요내용으로 삼았는데 이를 讀法, 作文, 說話, 書法 등을 가르쳤다. 교원들은 학생들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繼承해 나가도록 잘 가르치는데 모를 박았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적 覺醒을 불러일으키고 혁명의 도리를 가르치고 배운 것을 실천과 결합시키는데 중시를 돌렸다.

이시기에 항일구호나무에 새겨진 구호글씨 즉 청봉체가 산생되었으며 윤동주, 한락연 등과 같은 문인, 예술인들이 문화예술계를 이끌어갔으며, 안중근, 윤봉길과 같은 항일투사들이 남긴 육필도 남아있어 당시 서예사의 중요한 자료로 기록된다.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