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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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주성
  • 푸른언덕
  • 승인 2005.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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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이 낳은 세계적지휘자 주성
윤이상의 제자 독일서 활약

 

   

작곡자는 곡을 세상에 태여나게 하고 연주가는 곡을 세상에 알린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음악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을 누군가가 박자를 넣어주고 또 박자와 속도의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지휘자이다.

고전음악의 진원지는 독일, 독일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벨, 슈만, 브람스 등 세계정상의 작곡가들을 배출시킨 음악의 나라, 바로 독일의 악단들에서 지휘봉을 잡고 독일악사들의 연주를 지휘하는 중국 조선족출신 지휘자가 있다. 그가 바로 주성(49살)이다.

독일 베를린교향악단 객원지휘, 독일라이헌바흐교향악단 상임지희, 조선국립교향악단 객원지휘, 조선윤이상교향악단 수석지휘, 중국 광주성해음악대학 지휘과 교수, 심양음악학원 지휘과 교수... 주성은 두터운 실력과 뛰여난 재간으로 이미 세계적인 지휘자로 당당히 올라섰다.

윤이상선생과의 아름다운 인연

“윤이상선생은 우리 민족이 낳은 걸출한 작곡가일뿐만아니라 세계현대음악의 거장입니다. 윤이상선생이 공연장에 나타자면 독일관중들이 전부 기립하여 박수를 치고 공연이 끝나면 모두들 그 자리에 서서 윤이상선생이 먼저 공연장을 나가기를 기다리군 했지요. 그만큼 윤이상선생은 독일에서 높이 추앙받는분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주성씨는 얼굴에는 스승인 윤이상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물결쳤다.

주성씨가 윤이상과 만난 것은 1986년 11월, 당시 윤이상은 문화부의 초청을 받고 중국에 와 특강을 하였다. 어느날 윤이상이 문화부의 관계일군에게 중국조선족가운데 지휘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문화부 관계일군은 당시 중앙민족가무단에서 지휘로 있던 주성을 추천했다. 윤이상은 주성과 커피를 마시면서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이상은 그 자리에서 자기의 “제1교향곡”과 실내악작품총보를 보여주었다. 이튿날 주성도 자기의 “제1고향악”, 4중주곡, 피아노곡, 현악 등 작품들을 윤이상에게 보였다. 윤이상은 주성을 보고 자기와 음악어조가 비슷하다고 하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인이라고 치하해주었다. 윤이상이 북경에 체류하던 한달간 주성은 매일 저녁 호텔로 윤이상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윤이상은 주성이 독일로 오겠다고 자기가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어 주성은 독일행을 하게 되었고 독일에서 음악지휘공부를 하면서 윤이상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주성은 윤이상이 1995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와 한동네에서 가까이살았다.

평범하지 않은 음악가정

연길현문공단에서 악사로 있다가 연변농학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은 주성의 부친 주영수씨는 피아노를 조립할수 있을 정도로 악기제조장인인데 자체로 첼로 80대, 피아노 한 대를 제조해내였다. 또 주성의 할머니도 음악교원, 독일제피아노를 가지고 있어 그 피아노로 귿르 형제들이 음악을 배웠다. 결과 맏이인 주성과 밑으로 네 남동생, 우로 누나가 모두 음악인이 되었거나 음악교원 음악관련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시기 11살나던 해 주영수일가는 연변탄광에 쫓겨가 로동개조를 해야 했고 아버지주영수는 또 억울한 감투까지 쓰고 감방에 갇혀 주성이는 아버지의 밥을 나르군 했다. 어느 한번 바이올린줄을 맞출줄 몰라 밥과 함께 바이올린을 가지고 아버지한테로 갔다. 홍위병들이 그게 무슨 물건이냐고 물어왔다. 바이올린이라고 하자 켜보라고 했다. 줄을 맞추어야 켠다고 하자 그럼 그러라고 해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바이올린줄을 맞추어 주었다. 주성은 아버지의 감방에서 나아 홍위병들앞에서 바이올린을 켰다. 홍위병들은 듣기 좋다면서 다음에 올 때도 바이올린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후부터 홍위병들은 주성이와 그의 아버지를 잘 대해주었다.

“아버지는 한평생 음악인의 량심으로 살아온분입니다. 아버지는 음악인이라면 사람이 성실해야 하고 곁눈을 팔지 말고 음악에 몰두해야 한다고 지금도 저를 가르치고있습니다.”

주성이가 오늘 세계급지휘자로 된데는 아버지 주영수씨의 영향이 컸다.

주성은 지금 500여페지되는 총보를 소화해내여 총보를 스탠드우에 놓지 않고 지휘한다. 총보암기로 비상한 기억력을 키운 주성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방금 독일에 갔을 때였다. 운전면허시험을 필답으로 쳐야 하는데 독일어를 미처 배우지 못한 그는 49페지되는 문제자료집을 몽땅 암기내벼렸다. 필답시험을 마치고 나와 기다리는데 시험관이 “축하한다. 합격이다”라고 독일말로 했다. 그런데 주성은 그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음악인으로 악기까지 만들던 아버지의 장인정신이 주성이가 지휘로 될 수 있는 첫째조건인 비상한 기억력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음악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주성은 연변가무단에서 플류트연주자로 3년간 있다가 시험을 쳐 심양음악학원 작곡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작곡을 배우는 한편 지휘학부 시험에 합격되여 지휘도 배웠다. 이 기간 그가 창작한 “현악4중주”가 료녕성실내악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읊다”는 전국실내악콩클에서 수상했다. 심양음악학원을 졸업한 주성은 중앙민족가무단의 지휘로 되었다. 독일에 간 주성은 드러이스던음악대학에서 지휘과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음악대학에서 가극지휘공부를 했다. 그의 선생은 카라얀의 조수이며 오페라지휘의 일인자인 라이터너교수였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학생이 모두 13명, 박사과정을 모두 마친 사람은 주성 한사람이였다.

주성은 페리나오케스트라, 리에자교향악단의 지휘로 있었고 드러이스던교향악단에서도 객원지휘를 맡았다. 또 조선국립오케스트라교향악단, 조선윤이상교향악단 수석지휘로 활약하면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23회친선의 봄축제에서 교향악지휘분야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대도시들의 축제들에 초청되여 지휘를 맡군 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는 이제 오는 4월 독일 함부르그음악대학의 지휘과 교수초청을 받아들일 타산이다.

연변에 브랜드로 교향악단 있어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휘도 맡고 교수도 하고있는 주성씨는 연변의 브랜드로 교향악단이 있었으며 좋겠다고 했다. 축구가 연변의 가무와 더불어 전국에 연변을 널리 알리는 작용을 잘해냈지만 이제는 차원을 높여 교향악단이 탄생했으며 좋겠다고 했다. 연변에 전국 나아가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고향악단이 설립되면 음악인재들이 외지나 외국에 가지 않을것이라고 주성씨는 못박았다. 또 이름있는 지휘가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으면 꿀통에 벌이 모이듯 재간있는 음악인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고향악단이 더 잘 꾸려지게 될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음악은 시민자질제고에 음뜸이라면서 경제상황이 어려울수록 장래를 내다보고 교향악단을 꾸리는 등 문화차원을 높이고 따라서 문화소비시장을 적극 개척하여야 한다고 했다. 주성은 자기는 지금 독일국적이지만 연변이 고향인만큼 연변에서 교향악단을 꾸리련다면 자기가 적극 도와나서겠다고 했다.

연변일보 김인선기자 0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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