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예와 문학작품의 표현 매체는 모두 문자이다. 즉 문자를 떠나서는 서예작품은 물론 문학작품도 있을 수 없다. 물론 구전문학도 있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 졌다.
서예는 문자의 형태를 먹의 짙고 옅음, 획의 굵고 가늠, 선의 길고 짧음 등의 변화와 독특한 구도로 그 조형성과 예술성을 표현하고 문학에서는 충분한 문자조절과 글 구성에 수요 되는 단어, 구절, 형상 등을 통하여 작가의 사상과 예술성을 표달 한다.
문학에 있어서 예술작품에 묘사된 인간생활의 화폭을 형상이라고 한다. 문학가는 생활을 묘사하면서 생활에 대한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며, 형상의 도움을 받아 각이한 환경에서의 사람들의 행동과 자연현상에 대한 자기의 감수를 밝히며 그것들을 작품에서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그것들에 대한 자기의 감수와 동일한 감수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곧 문학작품 창작이다. 그러나 형상을 떠난 문학작품은 있을 수 없으며 형상사유가 없이는 문학작품을 써낼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문학부를 졸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문학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형상을 창조할 줄 모르기에 아무리 써도 그저 통신이나 사건기록에 해당할 뿐 문학작품으로 되기에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들이 형상사유를 진행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서예작품 창작도 역시 형상사유를 떠날 수 없다. 한폭의 서예작품에서도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 서예가의 사상감정 등 형상이 존재한다. 이런 형상을 창조하려면 맹목적인 연습만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형상사유를 진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예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형상사유를 진행할 것인가?
명제작문을 지을 때 작가들은 그 제목을 보고 어떤 사건, 어떤 환경에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것인가를 구상한다. 서예가들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내용을 어떤 풍격의 서체를 어떤 배열로 쓰면 더욱 예술적이겠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곧 사유과정인 것이다.
문학가들은 무의식간에 영감이 떠올라 걸작을 써내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천부적인 기질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다년간 주동적으로, 경상적으로 형상사유를 진행한 노력이 있다.
서예가들도 서예의 조형성과 예술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글씨의 구조라든가 독득한 풍격의 구성 등 형상이 가끔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 사유를 따라 맨손으로 공간에 그 형상을 그려본다. 그 형상이 머릿속에 환하고 손에 익었을 때 붓을 잡으면 단필에 성공적인 서예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단천 선생의 작품 <범>, <학> 등은 이와 같이 창작한 작품이라 사료된다. 본인의 작품 <길>(1994년 작)의 창작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하루 고향의 산길을 거니다보니 구불구불 뻗어간 길과 함께 우리글 “길”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떠오른 자연의 길과 우리글 “길”의 형상은 그렇게도 유사하였다. 가까운 곳은 넓고 멀어지면서 점점 좁아지고 또 구불구불한 산길은 가도가도 끝없고 곡절 많은 인생길에 입각시키고 붓을 날린다면 훌륭한 서예작품이 탄생시킬 것 같았다. 서실에 돌아와 머릿속의 형상을 화선지에 옮겼더니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창작하였고, 국제현대서법대전에 출품한 결과 “은상”을 받았으며 필자의 대표작을 낳았던 것이다.
문학작품 중에서도 시작품은 고급 예술이다. 시를 읊는 사람은 시인의 뜻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하여 먼저 시를 반복적으로 읽어보면서 시인의 감정을 포착하고, 그 다음 읊을 때에는 시인의 감정을 본인의 감정과 일치 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즉 억양의 높고 낮음, 음량의 굵고 가늠, 읊기 속도 등의 변화를 통하여 시인이 표현하려고 하는 사상감정을 그대로 표달하기위하여 노력한다. 이것은 시인의 감정을 소리로써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서예가들은 문자로써 시인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예작품을 보고 서예가의 감정뿐만 아니라 시인이 표달 하려는 사상감정까지도 찾아볼 수 있어야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정포착을 잘 하는 것이다. 시를 읊는 사람이 읊기 전에 먼저 시작품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시인의 감정을 자기의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예가들도 시를 외우면서 자기의 시인의 입장이 되어 감정을 포착해야 한다. 그 다음 감정을 그대로 필묵에 담아 화선지에 옮기면 된다. 즉 격정이 흘러넘치는 부분은 먹의 짙고 옅음, 획의 굵고 가늠, 등의 변화를 크게 주고 평온한 부분에서는 강약을 적게 넣고, 허무하고 쓸쓸한 감정 부분에서는 먹색을 메마르게 하며, 여운을 남기는 부분은 끝선을 좀 길게 긋는 등의 변화를 줄 수 있다. 또한 속도 조절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렇게 쓴 작품은 시인의 감정을 그대로 찾아 볼 수 있기에 진정한 예술성이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작시로 창작한 서예작품은 그 예술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서예가인 동시에 시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감정이 아닌 본인의 감정을 직접 필묵에 담기 때문에, 즉 타인의 감정을 포착하는 과정이 필요 없이 100%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옛 서예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시인 혹은 작가였다. 그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천하제일행서 작품 <난정서>는 그가 직접 쓴 시집 서문이었고, 소동파의 <적벽부> 역시 소식이 직접 쓴 시이다.
현대 서예인들은 대부분 남의 시나 문학작품의 명구를 옮겨 적는데, 그것도 기계적으로 복사하듯이 쓰므로 예술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서예가들이 시인이 되어 자기감정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자작시를 창작하고 서예작품으로 슨다면 <난정서>와 같은 훌륭한 작품이 또다시 탄생할 수 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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