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3대 음악가 정율성은 '한국인' 이었다
중국 國歌 만큼 유명한 '팔로군 행진곡' 작곡
광주서 태어나 19살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루쉰과 함께'신중국 영웅 100인'에 뽑히기도
◇중국인민해방군가 작곡가 정율성

정율성은 누구인가.
한국인보다 중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의 작곡가다. 1990년 9월22일 베이징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힘찬 연주로 시작됐다. 300만 중국군이 아침저녁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주요 국가행사 때 어김없이 연주되는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인 것이다. 이 곡은 중국 국가(國歌)인 '의용군 행진곡' 다음으로 널리 연주된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에 와서 정율성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가 한국에서 태어난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유능한 인재는 조국땅에서 조국의 이름으로 빛을 발하면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2009년, 10월1일은 중국의 국경절이었다.
그러니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국경절이지만 그 의미가 남달랐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한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을 선정, 후세에 기리도록 했는데 여기에 중국의 대문호 루쉰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선인이 포함돼 있으니 그가 바로 정율성이다.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본명이 정부은으로, 19세때인 1933년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의 항일투쟁간부양성소인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조선혁명당원으로서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중 상해에서 레닌그라드 음대교수 출신인 저명한 음악가 크리노와를 만나게 된다. 이름을 '부은'에서 '율성'으로 개명한 것도 이 때로, 약 2년간 크리노와에게 성악과 음악이론을 배웠는데 자연스레 정율성의 마음속엔 혁명음악의 꿈이 무르익게 된 것이다.
1936년, 정율성은 김산 등이 결성한 한·중연합전선을 통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추구하던 공산주의 계열단체인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한다.
1937년 그는 바이올린 하나를 둘러메고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향했다. 연안에 당도한 정율성은 곧 루쉰문예학원에 입학해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고 졸업 후 이 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그는 중국인의 아리랑이라 일컫는 '연안송'과 오늘날의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불리고 있는 '팔로군행진곡' 등 대작들을 쏟아낸 것이다. 1949년 동북과 화북지역에서 국민당 군대를 연파한 인민해방군은 북경의 자금성으로 행진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조국의 대지 위에 / 민족의 희망을 안은 / 우리 힘을 막을 자 그 누구냐? / 우리는 싸움의 전위 / 우리는 민중의 무장 / 두려움 없이 굴함 없이 영용하게 싸워 / 왜놈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자 /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아, 나팔소리 울린다. /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 동무들 발을 맞춰 적들의 후방으로 / 앞으로, 앞으로 우리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 밖으로!
◇ 군가에서 탈피 노동자의 생활상 노래도 작곡

6·25전쟁의 현실을 등 뒤로 하고 북한에서 다시 중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정율성.
그는 '생활속에는 투쟁만 있고 붉은 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도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유쾌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조국산천도 노래하여야 한다'고 음악가로서의 마음을 다지곤 했다. 52년 그는 눈덮인 만주땅 북녘 흥안령의 생활상을 통해 '벌목가'와 '흥안령에 눈 내리네'를 작곡했다. 흰눈 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벌목노동자들과 둘러 앉아 '노동 속에서 산출된 음악이 진정한 민간의 음악'이라며 그들과 어울리며 향기로운 술에 취한 듯 즐거워하곤 했다며 중국인 아내 정설송이 정율성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회고했다.
하지만 반우파투쟁과 60년대 모택동의 친위쿠데타라 할 수 있는 문화대혁명 등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정치적인 광풍에 휩싸이면서 평생 존경했던 주은래가 76년 봄 사망하고 몇 달 뒤 모택동마저 사망하자 10여년간 철저한 감시와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76년 복권되었으나 그해 12월 고혈압으로 이역땅 중국에서 숨을 거둔다. 중국 국립묘지인 팔보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중국의 3대 음악가(섭이, 선성해, 정율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그는 무려 360곡이 넘는 많은 노래를 남겼다.
◇ 광주에 이는 정율성 신드롬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서자 그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한다. 광주에서는 2004년부터 '음악가 정율성기념 국제학술대회'와 2005년부터는 '광주 정율성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광주의 정율성 생가를 2년간 7천여명 가량의 중국인 관광객이 방문차 광주를 찾았다고 한다. 정율성이 사망한 지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중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여전하여 하얼빈에서 '정율성 평생사적관'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으며 2002년에는 정율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양을 향해 달린다(원제 走向太陽·주향태양)'도 나왔다.
중국 문화부장과 함께 8번이나 내한한 정율성의 외동딸 딩샤오디(丁小提·63·베이징 바로크합창단장)여사는 "아버지와 관련해 많은 기억이 있다"며 "성품을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낙관적이고 마음이 넓으셨고, 항상 천진난만하게 소년처럼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현재 정율성의 고향 광주에서는 정율성의 생가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남구 양림동 79번지라고도 하고, 히딩크호텔 터인 동구 불로동 163번지라고 하기도 한다. 광주 남구청에서는 양림동 79번지 도로 이름을 '정율성로'로 바꾸고 남광주 청년회의소 측에서는 정율성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는가 하면 동구 불로동 163번지 히딩크호텔 앞마당에는 기념비와 우물 등을 복원해 놓았다.92년 한·중 수교 이후 정율성에 대한 일부가 기사로 다뤄졌지만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서자 그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한다. 광주에서는 2004년부터 '음악가 정율성기념 국제학술대회'와 2005년부터는 '광주 정율성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광주의 정율성 생가를 2년간 7천여명 가량의 중국인 관광객이 방문차 광주를 찾았다고 한다. 정율성이 사망한 지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중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여전하여 하얼빈에서 '정율성 평생사적관'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으며 2002년에는 정율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양을 향해 달린다(원제 走向太陽·주향태양)'도 나왔다. 중국 문화부장과 함께 8번이나 내한한 정율성의 외동딸 딩샤오디(丁小提·63·베이징 바로크합창단장)여사는 "아버지와 관련해 많은 기억이 있다"며 "성품을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낙관적이고 마음이 넓으셨고, 항상 천진난만하게 소년처럼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1·2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찾아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할 때도 정율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이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다. 중국의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軍歌)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정율성의 고향 광주에서는 정율성의 생가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남구 양림동 79번지라고도 하고, 히딩크호텔 터인 동구 불로동 163번지라고 하기도 한다. 광주 남구청에서는 양림동 79번지 도로 이름을 '정율성로'로 바꾸고 남광주 청년회의소 측에서는 정율성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는가 하면 동구 불로동 163번지 히딩크호텔 앞마당에는 기념비와 우물 등을 복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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