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와 한국의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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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와 한국의 모세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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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10만명 구출한 현봉학 <신길우의 수필 187>

   1950년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은 여러 가지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함경도 장진호 쪽의 미국 해병 제1사단과 미국 육군 7사단이 후퇴해 왔고, 두만강 쪽의 한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도 함흥으로 철수해 왔다. 각종 장비와 보급품을 공급하던 원산의 병참부대에 쌓인 군수물자도 그 분량이 대단히 많았다. 10만여 명이나 되는 군인과 50만 톤의 장비들을 철수시켜야 했다.

   상황도 매우 급박했다. 인해전술로 포위하다시피 하며 몰아붙이는 중공군의 공격을 막으며 함선으로 철수시켜야 하였다. 더구나 12월의 눈보라와 매서운 추위는 처음 맞은 미군은 물론 장병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곤경을 겪게 하였다. 엎친 데에 덮친 격이었다.

   그런데, 흥남부두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철수하는 미군 군함을 타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계속 몰려왔다. 그 인원수만도 10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 미군 군단장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던 28세의 현봉학은 구름떼처럼 몰려든 피난민들을 보고 놀랐다. 공산 치하를 벗어나려고, 자유를 찾아 무작정 몰려온 그 엄청난 열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들을 군함에 태우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함정은 미군과 한국군을 수송하기에도 부족했다. 상선까지 동원하면서 철수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알몬드 군단장에게 피난민 수송을 끈질기게 건의하고 요청하였다.

   “이 중에 게릴라가 폭탄이라도 들고 탈 수 있는게 아니요?”

   거절하는 태도에 그는, 그대로 두고 철수하면 그들은 모두 처형될 수밖에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인명이 더 귀하다며 장비를 줄이자고 간청하였다. 흥남 항구의 총책임자인 미국 해병 포니 대령도 그의 열정과 유창한 영어에 감동하였다.

   “1,000명이 타는 LST 상륙정에 10,000명을 승선시키자.”

   남아서 죽으나 침몰해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다.

   1950년 12월 초부터 24일 사이에 전개된 흥남철수작전에서, 철수한 유엔군과 한국군 병력은 10만 5000명이었다. 차량 1만 7500대와 연료 2만 9000여 톤을 포함한 35만 톤의 화물이 해상으로 수송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수시킨 피난 민간인은 9만 8000명이었다. 통역관 현봉학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한국의 쉰들러’로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오히려,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이산가족이 됐다”고 미안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쉰들러는 1200명을 구출했지만, 현봉학은 10만 명을 철수시켰다. 거의 100배, 비교가 안 되는 수효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강사랑 작사에 박시춘이 1968년에 작곡하여 널리 불려진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때의 상황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알몬드 소장은 이 인명구조 흥남철수작전의 공으로 중장으로 승진되었다. 헌신적으로 도와준 포니 대령이 죽었을 때 현 박사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구해냈다. 빅토리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출한 세계 기록’으로 2004년도에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현봉학 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4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고문과 미국 10군단 사령관(알몬드 장군) 민사부 고문으로 근무했다.

   정전 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9년에 펜실베니아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펜실베니아의대, 버지니아주립의대, 뉴저지주립의대, 토마스제퍼슨의대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귀국하여 아주대 교수로 있다가, 2007년 11월 25일 미국 뉴저지 주 뮐렌버그 병원에서 86세로 타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문회고록을 쓴 문필가 피터 현과 호국인물 현시학 해군제독이 친동생이다. 현 박사가 작고한 뮐렌버그 병원에는 1988년에 선생을 기념하여 <현봉학 병리검사실>이 명명되었다.

   현봉학 박사는 서재필기념재단 초대이사장을 비롯하여, 안창호․안중근․윤동주․장기려 등을 기리는 사업을 주도했다. 특히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1984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윤동주의 묘를 찾아다녔다. 1985년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발견해내자, 1988년에 자금을 내어 묘소를 수선했다. 중국 중등학생들의 창작 발표작품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윤동주 문학상>의 재정 후원도 해 왔는데, 2009년도에 10회째 시상하였다.

   저서에는 많은 의학서적 외에, 『중공의 한인들』과 회고록 『나에게 은퇴는 없다』, 그리고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 대탈출』 등이 있다.

 

   유능한 사람은 뜻하지 않게 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전공보다도 다른 능력이 더 큰 일을 해내게 되기도 한다.

   현봉학 박사의 경우도 그렇다. 전공한 의술보다 유창한 영어 실력이 큰일을 하게 하였다. 전쟁 중에 당연히 배운 의술이 쓰여야 할 것인데, 생각지 않게 통역을 하게 되고, 그 인연으로 10만의 인명을 적지로부터 구출하게 되었다. 전후에 공부한 대로 평생을 인술과 봉사로 보람 있게 살기는 했지만, 통역관 생활 몇 년이 전 생애 동안의 삶보다 백천 배의 훌륭한 삶을 하게 하였다. 

   현 박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고, 6․25동란을 만나고, 의사 아닌 통역관으로, 알몬드 장군을 만나고, 함흥 민간인 철수 등이 모두 ‘나의 운명’이라고 말했듯이, 인생이란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운명으로 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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