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시인의 '시가 있는 창'] (1)서정주 시-滿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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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시인의 '시가 있는 창'] (1)서정주 시-滿州에서
  • 아미산월
  • 승인 2010.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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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서지월시인의 현대시 산책

    [시] 滿州에서
    未堂 徐 廷 柱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눌입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읍니까. 紅布와같이 미치기는 쉬웁습니다. 千年을, 오ㅡ 千年을 혼자서 놀고온 사람들이겠습니까.

鍾보단은 차라리 북이있읍니다. 이는 멀리도 안들리는 어쩔수도없는 奢侈입니까. 마지막 부를 이름이 사실은 없었읍니다. 어찌하야 자네는 나보고, 나는 자네보고 웃어야하는것입니까.

바로 말하면 하르삔市같은것은 없었읍니다. 자네도 나도 그런것은 없었읍니다. 무슨 처음의 복숭아꽃 내음새도 말소리도, 病도, 아무껏도 없었습니다.

ㅡ서정주 제2시집『 귀촉도』 에서, 시「滿州에서」전문.

 

▲ 생전 미당 서정주시인과 서지월시인

<해설>

한국에서는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찬사와 함께 시의 정부라까지 칭하며 어떤 말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독보적인 시인으로 접신의 경지에까지 이렀다 하는서정주의 시이기도 하다.

미당 서정주라는 대시인의 수제자인 황동규시인 역시 고은시인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대시인으로 군림하고 있는데 황동규시인도 미당 서정주시인 팔순잔치 행사장에서,

ㅡ"이 땅에 未堂을 읽지 않고 詩를 쓴 사람 나와 봐라!"

라고 역설했고 보면, 전후무후한 시인임엔 틀림없다.「이 땅(한국문단)에 미당을 읽지 않고 시를 쓴 사람 나와 봐라!」이 말뜻은 한국에서 시를 쓴다면 미당 서정주 시에 영향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 미당의 시를 읽지 않고 어떻게 시인이라 자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滿州에서>라는 시 역시 과연 어떻게 쓰여졌는지 분석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첫 구절에서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눌입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읍니까.'라고 읊었다. (시 원문 표기는 당시 표기 그대로인 것 같음) '너무 많은 하눌'이란 그만큼 만주땅이 광활하다는 것을 하늘을 가지와 표현한 것도 예사의 표현이 아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읍니까> 역시 만주땅이 너무나 광활한 벌판이기에 가도가도 맨 그 자리 머물러 있는 것과 다름아니리는 말이다. 도입부에서부터 이렇게 겉으로 보기엔 쉬운 산문문장으로 널어놓은 것 같이 보여도 未堂 특유의 필치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한국 서지월시인 촬영)
이어지는 구절은 <紅布(홍포)와같이 미치기는 쉬웁습니다>인데 紅布(홍포)''란 붉은 옷감이니 붉은 비단으로 해석되는데 의미하는 바는 눈에 잘 띄는 즉, 유혹되기 쉽다는 뜻으로 작용함을 알 수있다. 그러니까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만주벌판을 바라보니 감개무량 하다는 의미 그 자체로 보여진다. '&#47723; 千年을, 오ㅡ &#47723;千年을 혼자서 놀고온 사람들이겠습니까.'에서는 몇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그대로 광활한데 '혼자서 놀고온 사람' 즉 누구나 혼자 살아온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나라를 형성하며 더불어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땅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주땅인데 벌판은 변함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니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이 '鍾보단은 차라리 북이있읍니다.'라고 읊었는데, '종'보다는 '북'이라 했으니 북소리가 웅장하고 멀리 울려퍼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니 만주벌판의 웅장미를 표현하자면 '종'보다는 '북'에 비유될 수 있으며, '있읍니다'라는 어미에서는 그만큼한 큰 울림의 도도한 역사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느껴진다. 또한 '이는 멀리도 안들리는 어쩔수도없는 奢侈(사치)입니까.'라 의문형으로 처리했는데 너무나 광활하기에 멀리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奢侈(사치)'라는 말이 도입됐는데 '奢侈(사치)'란 꾸밈 또는 매력포인트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멀리서는 안들리는 너무나도 넓고 끝없는 만주땅이 사치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함부로 쓸 수 없는 과감한 단어 '奢侈(사치)'를 가지고 와 마음대로 갖다 붙이면 좋은 詩語로 자램매김 되는 것이다.

다음 이어지는 구절이 '마지막 부를 이름이 사실은 없었읍니다.'인데 만주땅이 너무나 광활하여 끝도 안보일정도로 펼쳐져 있으니 저 멀리까지 소리쳐도 들리지 않으니 '마지막 부를 이름' 도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야 자네는 나보고, 나는 자네보고 웃어야하는것입니까' 이 대목을 보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 알아볼 수도 없듯이 수인사 나누며 서러 아는 척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만큼 웅장하며 광활한, 그리고 감개무량한 만주땅임을 여러 의미를 부여하는 직조해 낸 것이다.

마지막 연이 되는데 '바로 말하면 하르삔市같은것은 없었읍니다.'를 보면, 이렇게 끝도 없이 넓은 벌판은 현재도 그러하지만 '하르삔市같은' 즉, 도시문명이나 사람들에게 새롭게 형성된,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그대로인 벌판 그 자체뿐이었다는 것이다. '자네도 나도 그런것은 없었읍니다.'에서는 태초에 인간도 존재하지 않은 순수한 대자연 원시의 세계라는 것이다.

'무슨 처음의 복숭아꽃 내음새도 말소리도, 病도, 아무껏도 없었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는데 이 구절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먼저 '처음의 복숭아꽃' 이런 표현은 未堂 徐廷柱만이 구사해낼 수 있는 재간으로 보여지는데 '처음의 복숭아꽃' 즉, 처음으로 유혹이라는 것도 그리고 인간도 병도 없는 원시 그자체의 순수원시세계가 만주땅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듯하고 간직하고 있는 만주땅이라는 것이다.역시 현실세계를 직시하면서 근원은 원초적인 생명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는데 이 시의 핵심이 있다 하겠다. (한국 서지월시인/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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