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토요일 오후 실컷 늦잠을 잔 나는 무심코 창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놀랍도록 따뜻한 바람과 볕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노란 햇살을 따라 나비가 날아들 것 같은 포근한 날씨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래, 춘분이 지난지도 한참이지.’ 창틀에 쏟아지는 봄햇살에 겨우내 쌓였던 먼지들이 나폴나폴 날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봄이 오는 한 복판에 서서 광합성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는 겨울 내내 베란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노란 자전거를 끌고 길을 나섰다. 오래도록 타지 않은 두 발 자전거는 바퀴에 바람이 빠져 한 바퀴를 구를 때 마다 ‘꿀럭꿀럭’ 소리를 냈다. 걸음이 더딘 자전거를 끌고 집 앞 오토바이 수리하는 곳에 들러 바람을 넣고 체인에 기름칠을 했다.
안장 위에 먼지도 툭툭 털어주니 도저히 굴러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자전거에 생기가 돌았다. 그제 서야 나는 자전거에 올라 타 페달을 밟아 볼 수 있었다. 자전거는 거짓말처럼 가볍게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수줍은 소녀가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괜히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토요일 봄햇볕이 가득 내린 한강변에는 나처럼 봄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 다정한 연인들. 적당히 여유롭고 생기 있는 그 풍경이 봄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한강변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잠수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산까지 가볼까?’ 머릿속에 자전거 노선을 그리며 신나게 페달을 밟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하얀 꽃씨가 날아들었다. 목화솜처럼 가볍고 하얀 꽃씨. 나는 자전거를 길가에 세우고 그 꽃씨가 멀리 날아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문득 봄날의 어느 때가 생각이 났다. 잊고 살았지만 잊히지 않는 아주 소중한 추억. 따뜻한 봄햇볕이 가득 내린 한강을 바라보며 난 잠시 눈을 감고 뿌옇게 일어나는 기억의 파편들을 좇았다.
2005년이었던가, 2006년이었던가. 대학교 졸업하기 바로 전해였으니까 아마 2006년이었나 보다. 2006년은 6년간 중국유학을 하면서 가장 다사다난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한해였다. 당시 나는 학교 앞의 한 아파트를 임대해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아파트에는 매일 복도를 청소해 주시는 중국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그 중에서 작은 키에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은 모습이 참 인상적인 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한국인인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다. 날 보면 타지에 나가 일하고 있는 딸 생각이 많이 난다며 내가 자전거를 끌고 학교를 갈 때마다 조심해서 타라 일러주고, 날씨가 쌀쌀한 날에는 옷을 더 입고 나오라며 나를 다시 집에 들여보내기도 했다.
옷을 더 입고 나오지 않으면 감기 든다고 학교에 못 가게 할 정도였으니 생각해 보면 그 아주머니는 정말 잔소리가 심한(?) 엄마였다. 하지만 따뜻함이 담긴 잔소리는 언제 들어도 행복하다. 특히 가족과 멀리 떨어져 타국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그런 잔소리는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딸과 떨어져 살아가는 그 아이(阿姨)와 엄마와 떨어져 살아가는 나는, 국경을 넘어 다정한 모녀가 되었다.
아이는 표준어가 아닌 사천 사투리를 썼는데, 그래서 나를 부를 때 나는 ‘샤오바이(小白)’가 아닌 ‘샤오배이’가 되곤 했었다. 처음에는 “아이(阿姨), 나는 ‘샤오배이’가 아닌 ‘샤오바이’예요.”하고 알려주었지만 그 당시에만 ‘샤오바이’지 언제나 다음날이면 난 또다시 ‘샤오배이’가 되곤 했다. 그 아파트에 사는 동안 나는 아이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시켜서 나누어 먹기도 하고, 가끔씩 아이가 우리 집을 방문해 중국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루는 아이가 자신의 집에 나와 한국친구들을 초대했다. 한번쯤은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며 사천요리로 유명한 ‘쉐이주위(水煮鱼)’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다. 반가운 마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아이네 집으로 향하는 길. 그 날도 봄햇볕이 길 위에 가득 쏟아져 내렸고, 우리는 봄만 되면 어김없이 날리던 하얀 꽃씨를 어푸어푸 피해가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더랬다. 30분쯤 달렸을까. 늘 보던 북경 시내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5년을 중국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름 중국통(中国通)이라 자부하고 있던 나는 조금 많이 놀랐었다. 낮은 담장위로는 알록달록한 이불들이 나란히 걸려 있고 동네 아낙들은 삼삼오오 모여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은 엄마 곁에서 장남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한 가구당 방은 딱 한 칸. 화장실과 수도는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화장실에 문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았는데,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문이 없는 화장실을 본적이 없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대충 넘어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 때 처음으로 정말 문이 없는 푸세식 화장실을 보게 된 것이다. 중국 유학 곱게 했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북경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고 정해진 틀 안에서만 생활해 왔던 나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다른 집들이 그렇듯, 아이네 집에도 매트리스 대신 이불이 깔려있는 합판침대 2개와 작은 TV, 그리고 간단한 주방도구가 살림의 전부였다. 방은 3평 남짓 될까, 그 흔한 냉장고도 없었다. 2008년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북경 시내는 나름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을 때였다.나는 정말이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결코 불쾌하지 않은, 색다른 경험 앞에 나는 약간 흥분마저 되었다.
아이는 가까운 시장에 가서 잔뜩 찬거리를 사왔고 익숙한 솜씨로 요리를 시작했다. “탁탁! 치익!” 맛있는 냄새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마을은 금세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한국 손님이 왔다는 말에 동네 어르신들은 수수깡이며 볶은 해바라기씨를 먹어보라고 가져오시기도 했다. 나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옛날 우리나라 어른들도 먹었다는 달콤한 맛이 나는 수수깡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 사람인데 왜 이렇게 중국말을 잘 하냐”부터 “몇 살이냐”,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 “무얼 배우냐”, “형제는 몇이냐” “한국은 어떠냐” 등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집중되는 이목이 조금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골마을에 오랜만에 서울 손녀와 친구들이 놀러온 반가운 풍경이랄까. 맛있게 익어가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이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다. 중국에 온지는 5년 정도 되었고, 국제무역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밑으로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고. 동네 어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아이는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불렀다. 오늘의 메인요리인 쉐이주위(水煮鱼)부터 내가 좋아하는 콩줄기 볶음, 개운한 맛이 나는 사천식 무김치, 짭짤한 명란조림까지 합판으로 짜여 진 간이 식탁위에는 눈이 휘둥그레 해질 만큼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서둘러 수저를 들었다. 어느 하나 맛없는 음식이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아이, 정말 최고예요. 너무 맛있어요!” 내가 엄지손가락을 들고 밥알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웃자 아이도 기쁜 듯 웃어보였다. 아이는 식사 후에 과일이며 맥주를 한 상자나 더 배달시켰고 우리는 기분 좋게 취할 만큼 먹고 또 마셨다.
아이의 아들, 딸은 모두 외지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고 아이는 남편과 둘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저씨가 심장수술을 받아 아이 혼자 청소를 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는 모양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일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힘든 생활을 하고 계셨구나’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당시 아이는 한 시간에 한국 돈으로 1000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받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일해도 하루에 채 1만원이 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렇게 빠듯한 살림에 아이는 한국인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을 쓴 것이다.
아이에게 너무 큰 부담을 드린 것 같아 고맙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들여다 본 듯 아이는 많이 먹고 즐겁게 놀다 가라며 웃었다. “너도 내 딸이야. 딸이 오랜만에 집에 놀러왔는데 엄마가 이러는 건 당연하지. 너는 나중에 내가 한국 놀러 가면 이렇게 안 해 줄 거야?” 아이의 농담이 고맙고 찡하게 들리는 날이었다.
아저씨는 그 때 몸에 알 수 없는 기구를 달고 계셨는데 그걸 제거하는 수술을 비롯해 앞으로 한두 차례 더 심장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아이네 생활에 100만 원은 너무도 큰돈이었다. 아저씨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에 묻어나는 고통의 흔적들. 나는 그런 아이네 일상을 들여다보며 조금 슬퍼졌지만, 아이는 우리들 때문에 오랜만에 아저씨가 활짝 웃는다고 오히려 기뻐하셨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아저씨 몸에 달린 이상한 기구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들만 없어도 참 좋을 텐데….’ 자꾸만 아저씨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다. 착한 아저씨와 나의 중국인 엄마가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처지라 큰돈이 있을 리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대학교 한국인유학생회에 아저씨 수술비 모금을 건의하기로 마음먹었다. 홍보부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학생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일주일간만 모아보자고 했고, 딱한 사연을 들은 학생회에서는 서둘러 모금함을 만들었다.
한국인 유학생뿐만 아니라 아이네 소식을 듣고 온 각국의 외국인 친구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주었다. 일주일동안만 하기로 했던 모금활동은 기부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 때문에 열흘로 늘어났고 8000위안이 조금 넘는 돈이 걷혔다. 당시 환율로 100만 원쯤 되었던 것 같다. 돈을 모으긴 했지만 아이에게 그 돈을 건네기 전에 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괜한 젠체하는 건 아닌가. 혹시 기분 나빠하시진 않을까. 하지만 진짜 우리 엄마라면 내 진심을 알아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아닌 마음을 먼저 보실 거라고 믿고 아이에게 모금한 돈을 건넸다.
아이는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아이, 이건 돈이 아닌 정성을 모은 거예요. 아저씨 수술비에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한참을 생각하다 그 봉투를 건네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샤오배이, 이 돈은 딸한테 잠깐 빌리는 거라고 생각할게. 나중에 내가 이만큼 벌면 한국 사람들을 위해 쓸거야.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절대 잊지 않을게. 고맙다. 샤오배이.”
아저씨는 그 돈으로 무사히 두 번째 수술을 마치셨다. 그 이상한 기구들을 몸에서 떼어내고 홀가분하게 지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쯤, 나는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전처럼 매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가끔씩 아이를 보러 전에 살던 아파트에 놀러가곤 했었다. 내가 졸업할 때가 되었을 때, 아이도 아파트 청소일을 그만두고 가정부 일을 시작했다. 이제 졸업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아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아이를 붙들고 울었지만 아이는 끝내 눈물을 참았다. 나 혼자 유학길에 오를 때 진짜 우리 엄마처럼. 아이가 눈물을 보이면 내가 더 힘들어질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일 거다. 그 때도 밖에는 봄바람을 타고 하얀 꽃씨가 흩날리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론 아이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알고 있던 핸드폰 번호도 바뀌었고 아이는 컴퓨터를 할 줄 몰라서 이메일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 선한 웃음으로 건강히 잘 계실거란 믿음이 있다. ‘내가 잘 지내면, 우리 사천엄마도 잘 계실거야.’ 그런 마음으로 아이가 생각날 때 마다 슬픈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따뜻한 봄바람에 날리는 하얀 꽃씨가 그때 아이네 집으로 가던 그 꽃씨를 닮은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잊은 듯 살았던 아이 생각을 해보았다. 나처럼 아이도 한국 사람을 마주치면 ‘샤오배이’를 떠올릴까? 슬프다기 보단 그리워서 코끝이 찡해지는 추억이었다. 봄처럼 반갑고 따뜻한 만남. 6년간의 중국생활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중국 엄마, 사천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추억을 간직한 채 우리는 다른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기억하고 있다면 끝나지 않은 것.
하얀 꽃씨가 저 멀리 하늘위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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