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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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꽃물들이기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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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의 수필 186>

   나이가 환갑이 다 된 막내 여동생이 집에 왔다. 그러더니 제 두 손을 내게 내민다. 오랜만에 손을 잡자는 줄로 알고 마주 잡아주니 손을 뺀다.

   “오빠는…, 뭔가 안 보여요?”

   두 손을 엎어 다시 내미는 손을 보아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하니, 여동생이 스스로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인 것을 자랑한다. 그러고 보니 매니큐어를 바른 것과는 달리 손톱마다 은은한 연분홍 빛깔이 곱다.

   해가 넘어갈 무렵 여동생들은 꽃밭에 심은 봉숭아를 찾아 나선다. 피어나 한창 싱싱한 봉숭아꽃송이를 골라 꽃잎들을 딴다. 손가락을 싸맬 잎사귀도 함께 따 담는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면 바쁘던 시골 생활도 한가해진다. 이때 어머니는 딸들을 마루로 불러들인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기대 가득 찬 눈으로 좋아라고 등잔불 밑에 둘러앉는다.

   어머니는 이 빠진 밥그릇에 빨간 봉숭아 꽃잎들을 담는다. 하얀 백반도 조금 넣는다. 그리고는 살살 찧는다. 꽃잎들이 으깨지고 검붉은 덩이가 되면 절구질을 할 때처럼 뒤집어 가며 찧는다. 꽃잎들이 물컹거리고 꽃물이 배어나오도록 콩콩 찧는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손을 내민 아이들의 손가락을 마주잡고는 찧어진 봉숭아 꽃잎 덩이를 손톱 위에 얹는다. 그리고는 봉숭아 잎새로 손가락을 감아 싸맨 뒤 무명실로 찬찬 동여맨다. 봉숭아 꽃물을 들일 때에는 양쪽 손을 다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한쪽 손만 한다. 불편할 것을 생각해서이다. 한 손도 손가락마다 다 하기도 하지만 두세 개만 하기도 한다.

   할 만큼 싸맨 아이들은 좋아라 하며 마당에 펴놓은 멍석으로 나온다. 넓은 마당은 시원하고, 한 켠에 피워놓은 모깃불로 모기에 쏘일 염려도 없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여행담에 귀가 솔깃하기도 하고, 할머니의 옛이야기는 들어도들어도 흥미롭기만 하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여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던 북두칠성도 바라보고 북극성도 찾는다. 시옷자 모양의 삼태성은 금방이고, 은하수 따라 견우성과 직녀성도 아름아름 찾아낸다. 흥이 난 아이들은 흥얼거리다가 이내 중창이 되기도 한다.

   이때쯤이면 굴춤한 줄 아는 듯이, 어머니는 쟁반과 소쿠리에 찐 고구마와 옥수수를 담아 온다. 모두가 환호하는 속에 양손을 다 싸맨 막내는 울상이 된다. 할머니는 그러는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손수 벗기고 따서 먹여 준다. 넓은 마당은 봉숭아 꽃물 들인 마음만큼이나 시원하고, 앉아 있는 멍석은 찐 감자와 옥수수보다 더 따뜻하고 구수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아이들은 먼저 손가락부터 쳐다본다. 싸맨 봉지가 밤새 빠진 게 있으면 우선 속상해한다. 실을 풀고 세숫대야에 손을 담그면 손톱부터 씻으며 살펴본다. 손톱 주변은 살빛이 돌도록 닦아낸다. 만족도는 물든 정도에 따라 나타난다. 잘 된 아이는 좋아라 자랑하고, 덜 된 아이는 투덜댄다.

   봉숭아 꽃물은 꽃잎의 질과 싸매 둔 시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진다. 진홍색 꽃잎은 분홍 꽃잎보다 짙다. 초저녁에 싸매고 식전에 일어나면 꽃물은 충분히 든다.

   요새는 집집마다 화장대에 매니큐어 몇 개씩은 있다. 그래서 언제나 바라는 대로 즉각 손톱에 칠하고, 마음에 안 차면 곧장 지우고 다시 칠하곤 한다. 봉숭아를 가꾸고, 꽃잎을 따다 밤새 손톱에 붙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편리하게만 살면 살아가는 재미가 없고, 삶이 쉬우면 사는 맛이 떨어진다.

.0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것은 단순히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일만은 아니다. 꽃잎을 따며 희망을 품고, 손톱에 붙이면서 곱게 물들기를 기대하며, 꿈을 피워내는 아름다운 삶이 있다. 밤을 맞아 날이 샐 때까지의 짧은 반 날의 시간이지만, 거기에는 참되고 정성스런 삶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환갑을 맞는 여동생도 새삼 봉숭아 꽃물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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