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라는 말 생방송 중에 썼다가 결국…
초록저고리에 다홍치마 입은 조선족 아줌마들이 산속에…
> 연길인민방송국 아리랑방송에 출연했다가…
내가 2008년 초여름 연길로 가서 보름 정도 유유자적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연길인민방송국 '아리랑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가장 먼저 아리랑방송이라는 말에 큰 매력을 느꼈다. 연변일보 맞은편인 대로변의 조그만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이 호텔이 마음에 드는 것은 창을 통해 내다보면 큰 길 맞은편 연변일보 빌딩이 보이고, 창문 아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거나 오가는 연변사람들의 풍경이 매일매일 한눈에 들어왔다.

아리랑방송은 FM88㎒·AM900㎑ '민족방송의 한 송이 꽃'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2001년 4월에 창립되어 지금까지 전통적인 설교식 방송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교류식 무대를 꾸려오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FM88 좋은 세상, 내 고향 아리랑, 즐거운 쇼, 가요산책, 이 밤이 좋아요 등이 인기프로다. 내가 출연한 프로는 생방송'FM88 좋은 세상'인데 한국 서정시인으로서의 작품세계, 한국에서 시인으로 살아온 인생역정, 그리고 중국 만주땅을 자주 밟게된 동기 등 우리 조선민족에 대한 애착심을 관심있게 말해달라는 거였다. 이 방송은 녹음을 해 두었다가 저녁에도 재방송하며 아리랑방송 인터넷으로 언제나 들을 수 있었다.
남녀 두 아나운서가 번갈아가며 나와 대담하고 중간중간에 여유를 가지고 조선민족의 삶의 정서를 읊은 시 '강물과 빨랫줄' '해란강에 와서' 등 시낭송도 두 아나운서가 번갈아가며 들려주는 등 하여튼 아기자기한 진행으로 이뤄졌다. 무사히 방송을 끝내고 출연료 대신 연길 아리랑방송 로그가 찍혀있는 곱게 포장된 선물용 수건을 한 세트 받았다. 그런데 방송 용어가 문제가 됐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알게 된 일이었지만 인터뷰 중 '만주'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에 담당자가 아마도 문책을 당한 것 같았다. 그리 심각하다는 말은 안했지만 재방송이 취소되었다고만 했다. 아쉬웠다. 다시들을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내가 만주라는 말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장백산'을 백두산으로 표기하는 것도 보았으며, 방송진행 내내 '만주'라는 용어를 써도 아무말이 없기에 괜찮구나 싶었던 것이다. 쓰려면 '위만주'라 써야 되는 것 같았다.
◇ 모아산을 오르다

연변땅을 대표하는 산으로는 모아산이라 할 수 있다. 도심의 많은 이들이 등산을 하는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연길분지와 용정의 세전이벌, 동불사벌 등 연변땅 일대 넓은 벌판을 품고 있는 모아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버섯처럼 생겨 '버섯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독버섯 같아서'독심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곁에 다가가 보면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꼭대기는 넙적한 청석으로 층층이 덮여있어 마치 양산을 씌운 듯도 하고, 하여튼 유별나게 동그란 모습이 왕릉을 연상시켰다.
방송이 끝나고 연변인민방송국 한일송 기자의 안내로 들른 곳이 바로 모아산이었다. 이름만 듣던 그 모아산이었다. 항시 연길시가지를 지나면 네거리 한복판에 동상처럼 우뚝 솟아 백두산을 향해 포효하고 있던 백두산 백호상(白虎像)이 모아산 오르는 광장에도 있지 않은가. 물어보니 모아산을 공원화하며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모아산에 오르니 연길 시가지뿐만 아니라 용정들의 굽이치는 해란강까지 한눈에 들어와 속이 후련해지는 듯했다. 바라보이는 저 벌판이 일제치하 독립군들이 말을 달린, 선구자의 벌판인 것을 더욱 실감했다.
◇ 초록저고리·다홍치마
모아산을 내려오는 길에서 아주 이색적인 풍경이 내 시선을 왈칵 잡아끌었다.

모아산 내려오는 펑퍼짐한 나무그늘 아래에서는 군데군데 사람들이 소풍 나와 둘러앉아서 마시고 먹으면서 춤 추고 있었다. 신명이 자지러졌는지 북이나 장구를 들고 나와서 장단 맞추는 사람도 있고, 곱게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이까지 있으니 분위기는 더욱 고조돼갔다. 건장한 남정네의 아코디언도 한몫 더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깃발이 나뭇가지 사이 걸린 걸 보니, 아마 중국의 어떤 기념일을 즐기려 나온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이젠 이런 모습을 찾을래야 잘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나를 보고 얼싸안는 연변아줌마들에게 큰 돈은 아니지만 천원짜리 지폐를 기념으로 주니 한국돈이라며 다들 좋아했다. 아들·딸들이 한국에 가 있기에 한국도 몇 번 다녀왔다고 했다.
초록저고리와 다홍치마 입은 조선족 아줌마까지 발견했으니 더 기분좋았다. 초록저고리·다홍치마는 바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 색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혼례를 치를 때 신부가 입던 그 혼례복의 색깔이 아닌가.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미당 서정주 시인이 쓴 '신부(新婦)'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에 나오는 의상을 여기서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미당의 시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미당은 한국인의 숨결을 놓치지 않고 유장하고 기발하고 익살스럽고 능청스럽게 재구성해 시로 표현했다. 신부도 그냥 쓰여진 시가 아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전해 내려오는 설화지만 미당은 1939년 양곡주식회사 간도성 연길시지점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해 겨울에 용정출장소로 전근 갔다가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당시 이곳 만주땅에 와 있을 때 들었던 얘기를 아무도 모르게 은근슬쩍 시로 읊어 한국인의 고유정서를 대변하는 시 신부를 낳은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계속>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