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공모]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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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공모]나는 누구인가?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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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전국 다문화 생활체험수기 공모 대상 - 이선애

이민 3세인 나에게 한국은 동경의 고국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태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했던가. 그러나 맏딸을 한국에 두고 온 할머니의 그늘진 얼굴에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존재와 가고 싶어도 넘을 수 없는 산이 가로막혀 낙엽귀근이 자연의 섭리일지는 몰라도 인간을 무능력하게 만들고 집착할수록 한만 쌓인다는 것을 알았다. 어쩜, 조부모님이 생전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곳, 분단의 아픔으로 눈을 감으시기 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곳(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신전리)이라서 나는 더 오?싶었고, 꼭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국에 올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오직 유학이다. 그러나 나의 한국유학은 꼭 십년 만에 이루어진 내 비전의 시작이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한국유학을 그려왔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 유학수속이 아마 미국 국적 취득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은 그 누구나 인터넷으로 마음대로 학교를 선택하고, 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는 글로벌 지구촌이 되었지만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다. 어렵게 수소문 끝에 유학수속을 해주는 한국인 박 사장을 소개받았고, 나는 졸업증 원본과 증명사진 등 필요한 서류를 한국으로 보내고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다 몇 달 만에 중국 교포와 나타난 박 사장은 1차 수속비로 당장 인민폐 2만원(현재 환율로 325만 원 정도)씩 내야 수속을 시작할 수 있다며 당당하게 돈을 요구했다. 그때 나도 예외가 아니게 울며불며 부모님께 “투자한 셈 치고 2만원을 지원해 주세요.”라고 떼를 썼고 부모님은 여기 저기 돈을 모아 스타킹에 현금을 두툼하게 넣어 나의 배에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꽁꽁 묶어 주었다. 내 생에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라 목숨보다 소중했다.

하지만 난 이튿날 박 사장을 만나 그 돈을 넘겨주지 않았다. 왠지 불안하고, 손이 떨렸다. “잘 알아보고 해라!”라고 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자꾸 클로즈업되어 나는 돈을 얻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고 서류를 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 뒤로 박 사장이 나 같은 애꿎은 불쌍한 교포들의 피 같은 돈을 챙겨 사라졌다는 소문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면 부쳐 주겠다고 했던 졸업증은 영원히 찾을 길이 없었다. 90년대만 해도 위조졸업증이며 가짜학위가 득실거리는 때라 졸업증은 재발급이 절대 불가능했고, 한국처럼 동전 500원이면 언제든지 총장 날인이 박힌 칼라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진짜가 가짜로 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가짜가 아닌 가짜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모님께는 말씀도 못 드리고 혼자 끙끙 냉가슴을 앓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걸핏하면 졸업증 원본을 꼭 내놓아야 한다는 시장과 체재 앞에서 대학을 나오고도 졸업증이 없어 당당하지 못함과 겨우 한 장 남은 졸업증 복사본을 진하게 또 진하게 복사해 나온 검은 윤곽을 보면서 나는 늘 가슴이 답답했다. 나의 유학의 꿈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고, 고국에 대한 동경은 회의와 안타까움과 서글픔으로 남았다.

그러다 꼭 십년 만에 나는 중국에서 인터넷으로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지원서를 넣었다. 한 달 터울로 두 학교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십년 전에 나에게 이 길이 열렸다면 지금쯤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지난날이 한스럽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과거보다 지금 이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런데 1년 등록금 500만원(외국인은 등록금의 50%),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문 숫자가 내 마음을 조였다. 엄마는 “미쳤어. 미쳤어. 애 보다 배꼽이 크다.”라고 하셨고 그런 내가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중국에서 약 9년 동안의 직장생활은 나만의 로칼 찾기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자극하였고 안일할수록 현실에서 탈출하여 내 인생에 도전하고 싶은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요즘 한국의 대학생을 일컬어 88만원 세대라고 하듯이 그때 나는 600원(한국 돈 10만원)세대에 속했다. 방송국, 출판사를 거치면서 공무원으로 대우를 받았지만 나는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한 외에 유학을 위한 준비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텅 비어만 가는 머릿속과 안일한 공무원 직을 버리고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불붙듯 했으니 당돌한 나에게 그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렇게 선택받은 나, 또 나의 선택을 받은 연세대학교, 꼭 3년 전 신촌 연세대 캠퍼스에 들어서는데 나는 분명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과 설레고 흥분에 젖은 감회를 받았다. 내 나이 33살,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가슴이 뛰던 그 기분을 80년대, 90년대 세대들은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캠퍼스 안의 20대 중국 유학생, 등록금도 생활비도 걱정 없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또 한국계 중국인이라는 내 정체성을 찾아 나만의 달란트를 키워야 했고, ‘나는 누구인가?’를 수 천 번, 수 만 번 물으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2학기 등록금을 걱정할 정신도 없이 그동안 녹이 쓴 머리를 혹사하고 있을 때 나에게는 뜻밖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성적최우수 외국인 장학생으로 뽑혀 문과대학교에서 3명 중 하나로 아산재단 장학금을 그것도 정기 졸업할 때까지 받는다는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나는 학업에 더 증진할 수 있었고,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지원할 수 있었다.

우유빛깔의 목련꽃잎이 내 머리에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언덕 위로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만발할 때, 야속하게도 해마다 중간고사와 때를 맞춰 화사하게 일주일만 피었다가 눈꽃처럼 흩날리는 벚꽃 세례를 받은 지 꼭 3년 만이다.

한국계 중국인으로서 나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써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생활도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만에. 내가 하는 말에 꼭 ?한번씩 “예?”라고 올라가는 악센트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라는 뜻이고, 그런 나도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

중국과 한국은 같은 한자권에 속하고 유교영향을 받아온 순치와 같은 이웃나라지만 게다가 어릴 적부터 훈민정음을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체재와 역사, 지리, 교육 등이 낳은 언어, 문화적 차이는 나에게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20년 가까이 중국어와 일본어 교육을 받아온 나로서는 영어 천국인 고국이 더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나는 처음부터 영어 때문에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다.

“선배님 필 있어요?”

“필이 뭐야?”

“필(筆), 쓰는 것?”

나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지만, 상대방은 히쭉히쭉 웃으면서 “아, 펜~” 하고 수정해주었다.


“샤프 있어요?” 하는 동학의 질문에 도대체 뭘 줘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자신이 지금은 우습지만 그때는 창피하고 답답했다.

가장 답답할 때가 누구와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정할 때였다.

“신촌에서 만나는 게 좋겠죠?”

“네.”

“그럼 신촌 아트레온? 아님 스타북스? 아님 투쎔플레이스? 아님 하리스? 아님 메가박스? 밀리오레?…”

“후~” 처음 듣는 말이기도 하고 기억에 남지도 않는 알파벳들이다.

화장품 매장, 메뉴, 놀이기구, 미용실, TV의 뉴스까지 한국에서 영어를 모르면 한국어를 모르는 만큼이나 답답하고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의 로테이션은 어느 시대이고 있는 일이지만, 살길 찾아 쪽박 차고 남부여대하여 중국 만주로 떠났던 ‘조선인’은 한국과 너무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다. 한 세기를 축으로 한국은 영어에 동화되어 가고 ‘조선인’은 한자화로 다가가 순수한 우리말을 지켜온 교포들에게 여간만 혼란스러운 경우가 아니다.

다음으로 내 한국생활의 에피소드를 들자면 분리수거이다. 분리수거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익숙해지기까지 무척 고생했다. 하숙집에서 반년을 사는 동안 어느 날 나는 아줌마한테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범인’으로 잡혔다. 아줌마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기도 했지만 아주 조심스레 분리수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님 당신이 다시 재분리를 해야 한다고.

언젠가 매점 앞에서 라면 컵을 일반쓰레기에 넣다가 “그걸 거기다 버리면 어떡해요?” 하며 앙칼지게 따지고 들던 매점 아줌마 생각이 났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엉거주춤 놀랐던 것은 둘째고 쓸데없는 자존심이 일낙천장(一落千丈)했다고 할까?

지금은 한국인 못지않게 익숙해져 있어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지만 처음엔 정말 “그다지나? 정말 못땠어.”라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문화는 집단을 차별화하는 수단이지만 문화는 끊임없이 유전되고 변화하며 존속되어 있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 과정 속에 바로 내가 서있었던 것이다. 어쩜 이민 1세, 2세인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먹고 살기 위해 정체성에 신경조차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뿌리 의식은 잃는다고 잃어지는 것도 아니고,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쩜 한국인보다 더 그 뿌리를 보존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콩을 삶아 구들 아랫목에 보배단지처럼 모셔놓고 청국장을 띄우고, 메주로 된장까지 담근다는 말을 하면 동학들은 놀라는 눈치다.

매일 아침 식탁에 된장국과 여러 가지 김치가 있다는 사실도 그러했다. 평생 벼농사를 지었던 조부모님, 부모님은 보름이면 오곡밥과 귀밝이술과 같은 절식보다 더 중요한 절차가 있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관습처럼 믿어왔던 ‘볏짚묶기’다. 볏짚을 잘 간추려 두 뽐 길이로 잘라 물을 뿌려놓았다가 밤이면 온 집 식구들이 모여 앉아 가장부터 ‘볏짚묶기’를 한다. 21가닥을 무릎 사이에 끼고 앞뒤를 각각 묶기 시작한다. 그럼 앞뒤에 외톨이가 남기 마련이고 그걸 죽 헤쳐 보면 어떤 때는 큰 섬이 나와 부모님을 기쁘게 하셨고 어떤 때는 쪽박들과 긴 길만 나와 그늘이 지게도 했다.

3000여 년 전, 중국 은허에 묻혀있는 거북등에 새긴 점복처럼 우리 조상들은 볏짚으로 매듭을 지어 한 해의 풍년과 흉작을 추측하는 지혜를 키워왔나 보다. 문자가 없는 문명의 초기 단계에 유래되었을지도 모르는 ‘結繩’과 유사한 풍습을 이민 3세까지 고스란히 지켜보았으니 말이다.

전승과 유전, 변화의 과정을 체험한 탓인지 가끔은 어색하고 이상하게 들리는 말일지 몰라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님한테서 들었던 말들이다. 요즘은 외래어 때문에 순수한 우리말은 소생하는 말보다는 없어져 가는 말이 더 많다.

며칠을 새어도 못다 할 이야기들이 많지만 역사, 지리, 제도, 인문환경 등 하드웨어와 글로벌스탠더드의 차이로 오는 문화차이와 갈등은 어떠한 현장이든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이 내일의 역사로 기록되듯이 우리는 역사를 잊고 살 수 없으며 역사를 망각하면 새로운 비전을 이룰 수 없다. 조선인의 100년 이민사는 눈물과 땀과 한이 서린 삶이다. 한 세기 동안의 역사는 같은 뿌리의 하드웨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프트웨어의 영향을 받았는가에 따라 행동, 가치관, 어휘, 음식 등 문화 요소들이 차별화된다. 한민족이라고 해도 사회배경과 문화배경이 상이하면 언어는 사회적인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어휘의 의미가 축소되기도 하고 또한 확대되기도 한다.

지구 어디를 봐도 문화 자체에는 천한 것도 고상한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색안경을 쓰고 천한 것과 고상한 것을 가르고 동질성과 이질성을 구분하면서 편 가르기를 해왔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조상은 문명과 담을 쌓은 원초적인 문화의 소유자임에도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과제가 아니다. 글로벌사회는 갈수록 민족과 국경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문화가족이 보편화되고 있으며 인류학에는 오로지 문화의 다양성만 보일 것이다. 서로가 환대 받는 인격을 원한다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수한 open-mind로 그동안 이방인을 대하듯 쌓아온 장벽을 깨는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소통으로 win-win할 수 있고 환대받는 자로 행복할 것이다. 그 앞에 한중문화의 유대를 연결하고 소통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한국계 중국인 유학생인 내가 이루고 싶은 미션이다.

이선애 :  연세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 박사과정 중국문화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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