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바닥의 '구멍뚫린 연통' 알고보니…
#1 낡은 엔진소리도 구수했던 집안가는 버스길
흰눈으로 무장한 항구도시 단동을 흐르는 압록강은 꽁꽁 얼어붙어 천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6·25전쟁 당시 50만명의 중공군 침입을 막기 위해 미군이 폭파해버린 단동~신의주간 부서진 철교는 이제 고물이 아니라, 중국의 관광지가 되어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곁에 새로놓은 철교 위로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화물차의 행렬이 분주할 따름이었다. 혹한의 겨울, 이 다리를 건너 50만명의 중공군이 폭설을 뚫고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입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켰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따름이다.
우리민족의 두 세대의 상흔이 흰눈으로 덮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단동 압록강을 벗어나 내가 무작정 가기로 한 곳은 집안땅이었다. 역사는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낡아 엔진소리가 진동했다. 그러나 아무 탈 없이 잘도 굴러가는 것이었다. 예닐곱시간이면 도착하는데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다.
시골소읍과 항구도시인 단동을 이어주는 시외버스. 버스 안 바닥에는 밟으면 뜨거운, 구멍뚫린 연통같은 게 드러누워 있었다. 알고보니 그 안에는 코일이 들어있어 벌겋게 달궈지고 있었다. 그게 열을 내 훈기를 공급하는 일종의 '히터' 구실을 했다. 아주 오래된 버스 같았지만, 몇 시간씩 걸리는 장거리 운행에도 아무 고장없이 잘 달렸다.
"6·25때 난 중공군이었다" 노인의 고백
#2 6·25 때 인민군 할아버지와 감회어린 대화

집안땅으로 달리는 시외버스 안은 초만원을 이룰 정도로 승객들이 빽빽했다. 내가 앉은 통로 좌측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군 모자를 눌러쓴 초로의 어른 한 분이 함께 가고 있었다. 마침 조선어를 하는 조선족 중년의 남자가 있어 내 뒷자리 중국인 젊은 청춘남녀와 내 왼쪽 중국인 어른 한 분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단동에서 조그만 무역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인민군 모자를 눌러쓴 노인 한 분이 통로 맞은 편에 조그만 과일박스 같은 걸 안고 앉아계셨다. 그분은 66세의 중국 국적의 조선족 노인으로 한국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매스컴을 통해서 한국정보를 거의 알고 계셨다. 한국 역대 대통령의 이름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지병산옹은 평안북도 출생으로 17세때 6·25 전쟁에 참전해 낙동강까지 내려왔다고 하셨다. 휴전 후에는 중국땅에서 젊은 시절 군생활을 10년 가량 했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지만 중공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이러한 운명을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까. 남들이 볼 때는 조금도 놀라울 것 없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내겐 놀라움을 넘어서 쇼크로 와 닿았다. 즉 한국측에서 보면 중공군이었으니 적과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그 중국 어르신과 기념사진도 찍고 몇 가지 말을 노트에 기록해 두기도 했다. 뒷좌석의 중국인 젊은 연인들은 나하고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었던 어르신하고 나눈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역사인 문화대혁명은 알아도 6·25를 알 리가 없을 것이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하리라. 그러나 만주땅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예순이 넘고 일흔이 되어가는 중국의 노인들은 북조선 역사의 상흔으로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원로시인의 한탄 "부끄러워 고개조차…"
#3 덜컹거리는 버스안에서 리삼월 시인을 생각하다

내가 지금 흰눈을 뚫고 가고 있는 곳이 고구려 제2대 유리왕 때부터 19대 광개토대왕때까지 고구려 제2의 도읍이었던 집안땅이다. 압록강을 우측에 끼고 거슬러 가고 있는 덜컹거리는 시외버스 안이었는데, 버스가 계속 덜컹거리다 보니 내가 앉은 시트가 낡아 찢어져 버렸다. 그걸 손으로 꼭 쥐고 눌러앉아 가는 것도 여행의 별미였음을 말해둔다.
하얼빈에 가면 리삼월 시인이 있다. 흑룡강성을 대표하는 하얼빈의 조선민족 시인으로 하얼빈 조선민족문화예술잡지인'송화강(松花江)'을 흑토에 빛을 보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타계했다는 비보를 접하기도 했는데, 내가 하얼빈에 가서 몇번이나 만나 식사도 하고 담소도 나눈 적이 있다. 내게 부끄러운 자신의 행적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앞서 중국인 노인에 대해 밝힌 것처럼 리삼월 시인도 6·25 전쟁 당시 중국 인민군으로 북한을 거쳐 남한땅에 쳐들왔다는 거였다. 이 역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동족인 리 시인이 총을 메고 남한땅으로 쳐들어온 게 괘씸한 게 아니라 '같은 동족을 적으로 만든 자가 누구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6·25 전쟁이라는게 단순한 남북한 동족살육을 넘어서서 8·15 해방 후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에게도 멍에를 입힌 역사의 비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한·북한·중국조선족 3자의 동족상잔이었다는 것이다. 리 시인은 정확한 지리명은 모르지만 경북 왜관까지 내려왔다고 했다. 그러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겠다"며 한국 가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난 리 시인을 이렇게 달랬다. "선생님 그런게 아닙니다. 그건 선생님 개인 일로 빚어진 행동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씀하시어 지난 역사의 잘못됨을 시대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하얼빈에서 조선민족 예술잡지 송화강을 펴내고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원로시인의 인생역정, 아무나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제공=서지월 시인/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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