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에 산에 갔다가 뻐꾸기를 만났다. 뻐꾸기는 작은 딱새의 둥주리에 알을 낳고 나온다. 둥주리에는 딱새의 알이 세 개나 있었는데, 뻐꾸기는 그곳에 그보다 더 큰 자기 알을 하나 낳아놓은 것이다. 나는 그 행동이 괘씸해서 뻐꾸기에게 물었다. “너는 왜 남의 둥주리에다 알을 낳니? 네 집에 낳지.” 그러자 뻐꾸기가 대답하였다. “모르는 소리. 나는 집이 없어. 그래서 남의 집에 낳는 거야.” 나는 뻐꾸기가 자기 집을 짓지 않고 사는 것을 알고 있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딱새를 도와주어야지 왜 낳아놓기만 하니?” 내 말에 뻐꾸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알을 품을 줄을 몰라. 그리고 딱새는 내 새끼를 제 새끼처럼 잘 길러주지. 그러니 내가 관심 둘 게 없잖아?” 실제로 뻐꾸기는 먼저 부화하여 딱새의 알을 밀어내어 떨어뜨리고는 먹이를 받아먹고 자란다. 딱새는 그것도 모르고 뻐꾸기가 자기의 새끼인 줄로 알고 열심히 먹이를 잡아다 먹인다. 그러니 뻐꾸기 어미는 제 새끼를 기르는 것에 신경을 쓸 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꾸 보금자리 주변에 와서 짹짹거리니?” 그러자 뻐꾸기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모르는 소리. 내 새끼가 다 자라면 나를 따라 살아야 하는데, 내가 제 에미인 줄을 모르면 어떻게 따라오겠니? 그래서 내 소리를 기억하도록 자주 와서 소리를 내 주는 것이지.” 사실 딱새는 소리를 내지 않고 먹이만 잡아다 준다. 그래서 뻐꾸기 새끼는 주변에서 들려주는 뻐꾸기 어미의 소리를 듣고 먹이를 주는 어미의 소리로 인식한다. 둥지를 떠날 만큼 자라면 뻐꾸기 새끼는 어미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게 된다. 나는 그 간교함에 꾸짖듯이 말했다. “넌 너무 약아. 사기꾼이야.” 그러자 뻐꾸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지. 재주가 없어 봐.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밖에….”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대꾸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유능한 놈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먹을 복은 다 타고 난다’는 말처럼 모든 생물은 모두 살아갈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아둔하고 약한 것들도 각기 요령껏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뻐꾸기에 대한 나쁜 인식도 알을 맡기는 것만 본 데서 잘못 생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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