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탯줄을 끊은 고향 고구려도읍- 집안(集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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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탯줄을 끊은 고향 고구려도읍- 집안(集安)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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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대학교 정문에서

나는 유서 깊은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역사의 땅 - 집안성集安城(현재 中國吉林省集安市)에서 탯줄을 끊었다. 어려서부터 고구려인들의 피와 땀이 슴베인 집안의 땅을 밟고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곳에서 조선족학교를 다니며 자라다보니 어린 나로서도 자기도 모르게 우리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감에 젖어들 수 있었다. 또 내가 생활하는 곳곳마다에 유서 깊은 유적들이 보이므로 자이에서든 타이에서든 어려서부터 고구려역사와 많이 접촉하게 됐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역사에서 가장 흥성하고 강대한 시기였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후 705년이란 세월에 동북아를 호령한 만만치 않은 존재로 역사를 새겨왔다. 역사는 무정하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지금 남은 것이 돌덩어리하고 무덤, 그리고 오랜 세월 속에 찢기고 쪼개진 빛바랜 유물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적은 흔적으로도 무궁한 고구려시기의 찬란한 문화 예술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그 흔적이 나의 여린 마음을 허비며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빛을 던지고 있다. 나의 고향의 유물 중 세계적으로 이름난 장군총이나 광개토호태왕비 그리고 고분벽화 등이 유명하다.  

내가 어릴 때는 원숭이 마냥 줄지어 늘어선 무덤사이로, 때론 돌무덤봉우리로 마음대로 올라가고 재미나게 숨바꼭질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년시절, 그 고구려무덤 옆에서 고향 꼬마들과 깔깔대던 모습들이 눈만 감으면 어슴푸레 떠오르며 지금도 이름 모를 회포에 빠져들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눈에 보이는 것이 그냥 크고 높은 흙과 돌층 무덤 뿐이였댔는데. 나이가 먹으면서 이 “흙, 돌덩어리”에 슴배인 선조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 어떤 애절한 감정과 이름 모를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나는 연변대학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려고 노력했다.  

지난해에는 부족한 나의 고구려 역사지식으로도 옛 고구려 수도 태생이라는 특수조건과 또 내가 한국말과 중국어를 모두 한다는 우세로 집안 유적 가이드로 일하기도 했다. 내가 여름방학에 여행사를 찾아가 주동적으로 여행사 고구려역사 소개 봉사자로 일하는 영광을 체험했던 것이다.  

비록 나의 부족한 해설이지만 나의 말에 따라 귀 귀울리는 수많은 해내외 답사자와 여행자들의 얼굴들, 때론 긍지와 때론 숙연해지는 수많은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자기도 모르게 하는 해설가이드일에 긍지를 느끼면서 여리고 작은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또한 유구한 민족의 역사와 근로하고 담찬 고려인들의 삶은 헤집으며 해설 할 때 마다 우리 선인들의 지혜와 근로 용감한 성품에 나로서도 자부감에 도취되기도 했었다.  

이중에서 제일 인상 깊은 것이 바로 고향마을 서북쪽에 있는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걸출한 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이다. 아랍금자탑마냥 계단모양으로 쌓여진 이 무덤은 잘 다듬어진 묵중한 화강석  1100를 질서 있게 쌓아 올린 “인공돌산”이다. 7단 22층으로 된 이 무덤의 돌층 높이만도 12.4미터나 된다. 이 육중한 돌들을 어떻게 쌓아 올렸을 까? 그때 당시 아무런 기계와 우송도구도 없었을 텐데, 이 인공산은 오늘 날의 약4층 높이의 균형 잡힌 아파트를 지은 것과 같다. 그리고 1단 둘레에는 매 면마다 10톤 이상인 큰 자연석을 3개씩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견고하게 하는 지혜도 돋보였다.  

▲ 중국 집안현의 장군총- 고구려의 발자취

안칸묘실은 정방형인데 우에는 50여 톤이나 되는 완전한 화강석 큰 돌판으로 지붕을 덮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500여 년 전인 당시 운송 수단이라면 고작 말과 소뿐인 그때에 장군총에 쓴 이 큰 바위 화감암들을 22km떨어져있는 먼 채석장에서 끌어왔다고 했다. 이 큰 석재들이 도대체 어떻게 끌어왔는가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는데 가장 과학적인 것은 겨울에 땅에다 물을 뿌려 단단하게 한 후 그 얼음 위에서 수많은 인파가 힘을 합하여 끌고 밀어 왔다고 한다. 장군총에는 이처럼 많은 고구려인들의 노력과 지혜 그리고 피와 땀이 녹아있다. 이를 바라보는 나로서도 어느새 그 선인들의 피와 땀이 나의 혈관에 슴베여 굽이치며 사품쳐 흐르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피는 혈통을 못 속인다더니..... 그러나 나는 모른다. 내가 순수 고구려 혈통인지? 혈통을 알 수 있는 가문족보는 없다. 현재의 호적등본에도 없다. 그러나 왠지 내 고향의 고구려 역사가 내 아린 심장에 박히여, 결코 남이 일같지 않으니 왼 일일까? 역사의 땅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내 작은 가슴이 벌렁거린다. 때론 나를 멀고먼 고구려의 몽롱한 역사 속으로 끌어가기도 한다. 어쨓든간에 고구려선조들이 이렇게 보귀하고 소중한 문화유적을 나와 우리 모두에게 남겨놓은 것이 감사 할 뿐이다. 하여 나는 내가 태어났고 자란 옛고구려의 도읍- 집안을 사랑한다. 나의 출생과 고구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와의 만남을 통해 역사를 배우며 긍지를 가지고 봉사하고 있다.  

문화적 민족일수록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예술의 진수가 오늘 발전하는 현대과학기술의 덧옷을 입으며 나의 고향에서 오래오래 현존을 과시하며 빛 뿌릴 것이다.                                

                                         연변대학교 08신문학부 김화빈

 

[이 글은 김화빈 연변대학 학생의 글입니다. 김화빈은 정직하고, 똑똑하고, 앞으로 한중관계와 민족역사에, 그리고 기독교에 공헌할 수 있는 싹수가 있는 대학생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어려워, 학생의 어머니는 최근 앓는 몸으로 한국에 갔지만 돈도 벌고 못하고 외려 10만 위안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업을 중단하고 청도에 가서 일하고 있는 화빈학생을 제가 불러들여 학교로 보냈습니다. 본인은 한국학교, 또는 신학교로 가고 싶어 하는데 아직 길을 자지 못한 중, 여러분의 도움을 바랍니다. -동북아뉴스 최민 편집국장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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