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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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개화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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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의 수필 174>

시골에 사는 시인 한 분이 방문 기념으로 수련(睡蓮) 한 포기를 준다. 전에 한번 실수한 적이 있어서 사양했더니 담고 기르는 방법을 자상하게 일러 준다. 그래도 ‘또 한 생명을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 성의에 그냥 받아 왔다.

시큰둥해 하는 아내한테, 그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과장해서 들려주면서 수련을 물그릇에 담았다. 빈 화분에 진흙과 황토를 반반 섞어서 수련을 심고, 키 작은 옹기 파내기 안에 들여놓고는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한 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그 수련이 꽃을 피운 것이다. 가끔씩 들여다볼 뿐, 잘 기르라는 말만 했던 나로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7월 어느 덥던 날 꽃대 하나가 둥근 연잎 사이로 올라왔다. 꽃대 머리에는 엄지손가락 끝마디만한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꽃받침이 송이를 싸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수련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아내의 감탄사에 눈을 비비고 나가보니, 꽃송이가 조금 벌어져 있었다. 검붉은 꽃받침이 사방으로 조금 갈라지고 그 틈새로 빠알간 빛을 띤 꽃잎파리가 드러나 보였다.

꽃송이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금씩조금씩 벌어져 갔다. 꽃받침이 서서히 더 열리면서 오므라져 있던 붉은 꽃잎들이 점차 벌어져 나갔다. 꽃잎파리는 바깥 것부터 벌어져 나가더니, 속엣 것이 벌어지면서 그 가운데에 노란빛 꽃술들이 드러났다. 빨간 꽃잎 사이로 나타난 노란 꽃술, 너무나 산뜻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수련은 두어 시간 만에 활짝 제 모습을 드러냈다. 꽃은 티 없이 맑은 붉은빛인데, 노랑 꽃술이 그 가운데에 자리한 것이 더욱 돋보였다. 활짝 핀 수련 꽃송이는 그대로 하나의 정교한 조각 작품이었다. 마치 두 손을 모아 한가운데에서 불타고 있는 황혹(黃燭)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수련은 그렇게 피어났다. 수련 꽃송이는 새벽빛으로 깨어나고, 새벽볕을 받아서 피어나는가 보다. 새벽이 열리는 것처럼 꽃은 분초(分秒)를 세듯 천천히 피어난 것이다.

수련이 피어 있는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동그란 수련 잎들은 푸른 치마를 펼쳐놓은 듯이 수면을 적절히 수놓았고, 그 가운데에 수련 꽃송이가 하나 피어나 있는 것이다. 꽃무늬 녹색 보료 위에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곱게 차려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자태에 나는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수련 한 송이의 피어남, 그 엄숙하고도 절대적인 순간, 그리고 그 피어난 아름답고 순결한 모습과 우아한 자태, 나는 두어 시간 동안 하느님이 창조하는 조물(造物)의 시간과 과정과 만들어 내시는 광경을 이 수련꽃 한 송이의 개화(開花)를 통해서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개화가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한 것인가를 보았다.

꽃 한 송이도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 때나 피거나 혼자 힘으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돕고 빛과 그림자가 영향을 주어 적절한 때와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기르는 사람의 정성까지도 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 어찌 수련 한 송이가 피어나는 일에만 그러겠는가.

한참 만에 소파로 돌아와 앉으니, 연꽃 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어느 새 거실 안에는 연꽃 향내가 그윽하게 스며 있었던 것이다.

수련꽃 한 송이의 개화, 그것은 꽃 한 송이의 개화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세상이 열린 것이고, 내게는 탄생의 신비, 삶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이 아침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한 동안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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