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은 상해지식청년 연변하향 40돐이 되는 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는 그젯날 모택동 중화인민공화국주석의 지시에 따라 연변에 왔던 1400명 상해지식청년들을 초청해 기념활동을 벌였다. 그 속에 바로 훈춘현(현재 시)경신진 금탕 제5생산대에 왔던 우커룽(1949년생,당시 고중시절)이라는 상해지식청년과 부인 그리고 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모주석의 ‘지식청년은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호소에 열혈청년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해 나섰다. 상해시만 보아도 120여만명의 초중, 고중생들이 육속 전국각지로 뻗어져 나갔는데 연변에 온 지식청년만 해도 1만8000명이었다”고 우커룽 씨는 소개하면서“오늘에야 알게 되었지만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정치운동으로 제반 중국의 경제가 붕괴의 변두리에 처해 있었기에 이른바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정치구호를 걸고 열혈청년들을 농촌에 내려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애수에 젖은 마음으로 당년의 정경을 회고했다.
우커룽 씨 일행 상해지식청년들이 훈춘에 도착한 것은 1969년 3월1일이었다. 상해는 춘삼월이지만 동북오지로 일컫는 훈춘대지는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그 자체였다. 하여 그들이 투숙할 숙사도 미처 지어놓지 못한 상태었다. 하는 수없이 빈하중농의 집집마다에 상해지식청년들을 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주:당시 주숙배치는 반드시 빈하중농의 집이어야 했는데 이른바 역사반혁명, 현행반혁명 등 오류분자 집에는 지식청년들을 배치 못하게 되어있었다).당시 훈춘현 경신공사 금탕대대에 7개 지식청년 집체호라는 집단으로 배치되었고 8남8녀가 한 개 집체호로 무어졌다.
우커룽 씨가 투숙한 집은 금탕대대 5대 리봉구(조선족)생산대장(이미 사망)의 집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일가는 열정에 끓어 넘치는 마음으로 그의 행장을 풀어주고 따뜻한 조선족구들에 몸을 녹이게 했다. 처음으로 조선족이라는 이 민족과 만나게 되었고 이제 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또 이제부터 일생을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게 되었단다. 참으로 습관이 안되었단다. 구들이어서 올방자를 틀고 앉아 있어야 하니 금방 다리가 쑤셔났고 음식도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된장국에 맵기를 이를데 없는 김치여서 그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란다. 그러나 다만 모주석의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교시와 반제국주의,반수정주의,조국변방보위라는 사명감을 안고 여기에 왔고 또 이제 앞으로 여기에서 한생을 농촌에 의바지해야 한다는 각오를 수시로 다짐해야기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견디기 힘든 것이 매일 보다싶이 하는 뒤를 보는 문제였다. 추운 겨울이라 뒤를 보자면 노천에 설치된 재래식 변소를 찾아가야하니 완전이 엉뎅이가 얼어터지는 것 같아 편안히 볼 수도 없었다.

봄이 다가오니 거름도 내야 했다.구린내를 피하면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데 사상적으로 문제시된다는 각오로 구역질나는 변소를 참아가며 쳐야했고 언 비료를 곡괭이로 꺼서 밭으로 날라가야 했고 ...이렇게 반드시 재교육을 잘 받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저녁이면 기름등불 연기에 코구멍이 거멓게 그을리면서도 모택동저작학습은 지속적으로 하는 것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또 게을리 하지도 못했다.
그해 9월 집체호 막사가 드디어 지어져 우커룽 씨는 정 쌓았던 생산대장의 집을 떠나 동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분주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가운데 그에게는 새로운 일이 생겼다.
상해에 있을 때부터 가정의 영향으로 의학에 심취가 있었다. 그래서 연변농촌에 올 때에 상용약품과 침구 및 의학서적을 갖고 왔다. 즉 기회가 되면 맨발의사(이른바 선진적인 의료기기, 박식한 의료지식이 없어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생겼음)로 되어 빈하중농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훈춘시는 중러, 중조 변경지역이어서 당시 내지의 사람들이 훈춘으로 오려면 반드시 통행증이 있어야만 했고, 또 수시로 전쟁에 대비해 민간인들도 군사훈련을 해야만 했는데 당시 민병조직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형세에서 1970년8월말 경신공사와 당시 주둔부대에서 공동으로 “군민합작맨발의사야전의료훈련반(军民合作赤脚医生野战医疗训练班)꾸렸는데 매개 대대와 부대 연대에서 한명씩 추천했다. 행운스레 우커룽 씨가 금탕대대의 추천으로 이 훈련반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런 짧은 시간에 배우면 어느 정도 배웠으랴만 한달반의 속성 의료강습을 통해 우커룽 씨가 맨발의사로 되었다. 선후로 이 대대의 두 명의 급성맹장염수술 환자와 담결석환자를 수술하게 되었는데 그는 제1조수로 수술에 참가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고 따라서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단다.
지금 회고해보면 당시의 수술환경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끔찍한 상황이었고 무서움이 엄습한단다. 수술실은 철저한 무균상태를 전제로 수술을 해야 한다. 대대 위생소의 위생시설은 말이 아니었단다. 위생소는 단칸방으로서 거기에다 수술대를 설치하고 천정에 비닐을 가려 떨어지는 먼지를 막기로 했고 소독수로 온 집안을 소독해야 했기에 그 소독수냄새가 코와 눈을 자극해 눈뜨기도 힘든 상황이었단다. 또 수술도구라야 고작 기본적인 수술칼, 가제, 집게 등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심오한 무산계급감정으로 다만 빈하중농의 고통을 덜어야겠다는 원초적인 일념으로 수술에 임했는데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환자도 건강을 되찾았단다. 오늘에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속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환자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단 말이다. 또 이렇게 환자를 치료했으니 당시에는 으뜸가는 선진사적감이였다. 즉 양의사가 없어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이른바 당시의 정치적 논리가 실천에서 보여줬다는 것이다.
오늘 의학을 전공한 한 사람으로서 그젯날 그 정경을 회고해보면 소름이 끼칠 일이라고 했다. 특히 이렇게 며칠밖에 안 되는 의료강습을 마치고 환자의 병을 봤다는 것은 아무래도 후세들은 믿지 못할 것이고 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역사라고 우커룽 씨는 애수에 젖어 설명했다.
1973년도에 연변의학원(지금의 연변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한 우커룽 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 학교에 배치 받아 병리해부학 교사로 사업했다. 1980년말에 강소성 남통대학 의학원으로 전근한 그는 지금 법의해부와 법의학검증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의 부인도 그젯날 지식청년으로서 강소성 해안현에 내려갔다가 75년도에 노동자로 추천받아 남통시의 한 공장에 배치 받았다. 우커룽 씨와 부인은 상해시 양포구에서 어릴적부터 앞뒤 집에서 살았다. 비록 두 젊은이는 남북에 갈라져 있었지만 사랑의 싹은 시들지 않고 지속되어 오늘 행복한 가정을 일구고 아들하나를 보았는데 아들은 인제는 떳떳한 석사생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당년 아버지가 젊은시절을 보냈던 훈춘시 금탕촌을 찾은 아들 우위빈은 너무나도 놀라 “아빠 이런 곳에서 청춘을 지냈습니까”라고 묻더란다. 우커룽 씨는 이것이 바로 역사라고 설명하면서 비록 그젯날 젊은 시절을 여기에서 보냈지만 얻은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바로 이런 시기가 있었기에 조선족동포를 알게 되었고 또 조선족의 우수함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단다.
지식청년으로 있는 기간 우커룽 씨는 한 조선족 산모가 해산하다가 과다출혈이 생겼는데 환자의 혈형도AB형이고 마침 자기의 혈형도AB형이어서 선뜻 수혈한 일도 있었다. 더욱이 그는 수십년간 연변이라는 이 조선족사회에서 생활하면서 이 민족이 교육을 중시하고 예절이 밝고 선량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기에 일찍 금탕대대의 한 조선족농민의 자녀가 남방에서 대학공부를 마치자 상해에 직장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그는 특히 조선민족을 알게 된데 대해 감개무량하단다. 조선민족에 대한 애착심으로 하여 자식에게 조선족에 대한 이해 폭을 넓혀 주고자 아들을 한국의 상해임시정부유적지를 데리고 가서 견학도 시켰고 또 아들에게 조선족의 역사를 알게끔 조선족관련 인터넷 홈페이지를 소개해 줬단다
“상해에서 3.8,6.0이라는 얘기가 있다. 3.8은 여성이고 6.0은 노인을 뜻하는데 이번에 지식청년으로 내려왔던 금탕촌에 와보니 노인들밖에 없고 젊은 여성이나 총각들은 찾아볼 수 없어 굉장히 안타까왔다”고 했다. 그가 그젯날 금탕촌에 내려갔을 때만해도 1000천여 명의 조선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300명도 안된단다. 그래서 그는 “훈춘시 도시는 그 어디에나 아스팔드가 쫙쫙 벋어져 나갔고 고층빌딩도 줄지어 일떠섰고 지어는 자기가 내려갔던 시골에도 아스팔트가 뻗어져 나갔지만 아직까지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한 적지않은 농민들을 보고 나니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고 했다. 반드시 연변의 지도계층에서 깊은 중시를 일으켜 새마을건설을 다그쳐야 한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윤운걸 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 13944391376@hanmail.net
윤운걸 프로필:
의학과학보급 작가.
현직 흑룡강신문사 길림성지사 지사장, 특파원
연변대학 의학원 의료학부 졸업
연변대학 의학원 부속병원 의사
연변의학잡지사 의학편집
1984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 흑룡강신문사 전직기자로 활약
지금까지 2,000여편의 작품 발표. 국가급, 성급, 지구급 우수과학보급작품 10여편 발표
국외 각종 세미나에서 론문 4편 발표. “무엇때문에”총서 10권 공동주필
“농촌과학기술보급총서” 8권 공동부주필.
2008년 “윤운걸기자문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