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사각지대에 놓인 농민들
상태바
질병의 사각지대에 놓인 농민들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1.2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연산 글

지난 해 12월 10일 수술을 하고 기동실에 있다가 14호(상해 복단대학 부속 중산병원 외과병동 9병동) 침대로 돌아오니 나의 옆 13호 침대의 환자가 바뀌어 있었다. 복건성 어느 농촌에서 왔다는 차농(茶農)이었다. 나이는 57세인데 환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아들하고 무슨 병인가고 물었더니 이선암이란다. 그러면서 본인은 이선염으로 알고 있으니 절대 발설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으로 오른손 식지로 입술을 가로 질렀다.

이튿날 아침 9시에 그는 수술실로 갔다. 그런데 불과 한시간도 못되어 아들이 병실로 돌아왔다. 수술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개복을 하였다가 다시 기워 맸단다. 이미 암이 확장이 되어서 수술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한다.

아들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우리를 등지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그의 어깨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잠시 병실안은 누구라 없이 말이 없었다. 침묵이 무겁게 드리웠다.

점심녘에 환자가 돌아왔다. 배를 째겼을 뿐이므로 그의 몸에는 뇨도관 외에 달린 것이 없었다. 나처럼 코며 배며에 대여섯개의 관들이 디룽디룽 달려 있지 않았다.

환자는 두 아들과 사위하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 무등 기뻤으리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측은한 감이 북받쳤다.

그는 수술 후에 일주일을 나하고 한 병실에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 년 전부터 어깨 쭉지 밑으로 띠끔띠끔 아파나고 어떤 때는 팔을 들지 못할 정도로 동통이 심했다고 한다. 일을 많이 해서 신경통이려니 했는데 이선에 문제가 생긴 줄은 생각도 못했단다. 이번에도 동통이 너무 심해서 지방 병원에 가서 보였더니 상해로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육체로동에 지친 농민들은 웬간한 병은 무시하고 산다. 한뉘 농사를 해온 나의 아버지는 가장 큰 병원에 간 것이 1960년대 초 화룡현병원이였는데 그것도 자신의 병 때문이 아니라 중병에 걸린 나한테 수혈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나의 어머니는 1970년대 룡정으로 일보러 갔다가 갑자기 복통이 와서 연길현병원에서 맹장수술을 했다. 공교롭게도 룡정에 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였더면 아마 농촌마을에서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매형 리기선은 한국에 갔다가 입맛이 떨어지고 위가 뿌듯하고 간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이미 암말기로 진단이 났고 불과 한달도 못되어 객사했다. 병 전조가 온지는 몇 년 잘 될 것이다. 어머니는 늘 소다를 잡수셨고 매형은 소화제를 사다 먹는 것으로 병을 달랬었다. 한번 진찰비가 수천원 가는 전면 검사는 감히 엄두도 못냈다.

만일 농민들도 공무원들처럼 매년 한번씩 하는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다면 병을 자래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농민들은 먹고 입는 문제는 해결하였지만 질병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출원하던 날 그 아들이 입원치료비가 3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차농사로 일년에 순수입을 만원정도 올린다고 하니 3년의 공력을 단 일주일간에 까먹은 셈이었다. 수술이 잘 되어서 삶의 희망을 안고 간다면 몰라도 거금을 내고 죽음을 확인한 꼴이 되었으니 그들의 심정은 참담하기가 그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와 작별인사를 하면서 몸이 완쾌되면 복건으로 놀러 오란다. 자기들 마을에서 무이산이 지척이라 자기가 안내를 한단다.


2010년 1월 21일

[출처:조글로포럼 forum.zogl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