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窮搬家[주정배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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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窮搬家[주정배 수기]
  • 정창준
  • 승인 2010.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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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배 취설

나처럼 이사를 많이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고향에서도 서너번 하였지만... 내가 오늘 말하는 것은 한국에서 이사를 한 차례를 말한다. 저그만치 7 번이나 된다. 서울에서만.

내가 막 처음 한국에서 잡은 집은, 아니 집도 아니다. 쬐꾀만한 하숙방인데 위치가 서울 시청이라. 어찌나 비싸든지 한달에 10 만원 씩이나 주고 진짜 이불 하나 펴기도 힘든 하숙방에서 냉장고는 물론, 텔레비죤도 없고 사워실도 뒷간도 밖에 있는 작은 방, 잠만 잘 수 밖에 없는 방에서 두 달을 지냈다. 좋은 점 하나는 보증금이 없고 선불이어서 아무 때나 떠나도 되는 웃점이 있다는 것.

나는 그때 알았다. 대한 민국에도 아직 그런 하숙방이 남아 있다는 것을! 옆방에서 방귀 뀌는 소리도 그대로 들리는 그런 하숙방이 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앞에는, 중앙일보사 고층 빌딩이 태양을 가린 그 뒤에 이렇게 자그마한 올망졸망 빈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

약 두 달후, 대한민국부동산에 대해 눈 뜨기 시작한 나는 보증금 백만원에 한 달에 10 만원 월세를 내고 장충동 신라 호텔 뒤에 있는 자그마한 옥탑방을 세들어 살았다. 그 집은 그래도 취사를 자비로 할 수가 있어서 일요일이나 명절이면 손님들도 종종 놀러 와서 술 한잔씩 하며 타향살이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갈 때가 많았다.

교포들은 당시에는 일터에서 먹고 자고 하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솔직히 일요일이면 어디에 갈데가 없어서 우리 집이 그들의 보금자리였다. 우리 집에는 항상 손님이 들락날락 했다. 조그만 방에서 술을 마시고 종종 자고 간 사람도 한두분이 아니었다. 정말 말그대로 다리를 손가락깍지 끼듯 다리깍지를 하고 잘 정도였을 때도 있었다.

그집은 기름보일라를 때는데 지출이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 해 겨울에는 보일러가 얼어서 주인집에서 반, 내가 반 하여 70만원에 수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실지로 알고 보니 수리 값은 내 혼자 낸 것이었다. "제길 ~"하고 나는 투덜댔다.  전기세, 물세, 모든 걸 안받겠다고 하던 게 후에 전기세 2만원씩을 받았다.  내 지금 이 큰 집도 전기세가 만오천 초과해 본적이 없는데...

거기서 2 년을 살다가 다시 신당동 중앙시장 부근에 자리를 옮겼다. 그집은 아주 오래된 옛날 집이였지만 그래도 집 모습을 갖춘 방 두 칸과 도시가스 화장실 주방 ... 실지로 오장육부를 다 갖춘 세집이 였었는데 ... 집 사람 식당의 사장님이 특히 우리를 생각해서 우리를 그 집에 아주 싼 값에 들게 하였다. 보증금 2 백에 월세 18 만을 내고 살았으니 아주 따뜻하고 위치도 역세권이라 우리에게는 아주 맞춤한 세집이었다. 비록 천정에는 쥐가 운동대회를 매일밤 조직하였고, 바퀴벌레가 나 잡아봐라 하는 오래된 집이 였지만 나에게는 집 값도 합당하였고. 집 크기도 만족한 좋은 집이었다.

집이 방 두 개여서 손님이 와도 근심이 없고... 실지로 많은 교포들은 우리그집을 거점으로 삼아 며칠씩 묵어 일자리를 얻어서 한국에 자리를 잡곤 하였다. 그 집은 아주 내 마음에 쏙드는 자그마한 집이 였는데 ...

중국에 명언처럼 호경불장이라고 사장님이 불행히 을지로에서 야밤에 억울한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우리는 며칠 경찰서를 드나들며 겅찰들이 묻는 질문을 받아야 하였다. 그 사장이 죽고 그의 아들이 식당을 하였는데 그 아들이 그 식당을 때려치우고 더 크게 벌리다가 망해서 우리도 그 집에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얻은 집은 옥수동에 있었다 . 집은 앞은 일층이요 뒤는 지하방이 였다. 부동산 중개사들의 감언이설에 얼리워 그집을 계약하고 말었다. 나는 어머님을 서울 구경 시켜드리려고 준비 하던터라 그래도 방 두 개에 화장실 욕실 , 다 갖춘 집이였기에 그대로 얼리운 줄 알면서도 이미 계약금을 지불 하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집에 들었다.

그 집은 전세 삼천만이다, 해빛도 보지못하는 반지하방이 였지만 당시는 집값이 최고로 비쌀때인지라 그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발바닥에 불이나고 마누라는 치질이 나올 정도로 뛰여 다녔지만 ....결국엔 그집에 들고 말었다.

가정의 문제로 일년만에 집을 부동산에 다시 내 놓았으나 집이 나가지 않아 계약 기한이 끝나기 바쁘게 그집주인과 집에 간다고 거짓말 하고 얻은 집이 바로 강남구 삼호물산 부근 양재천 ! 이름다운 양재천 부근에 있는 집이였다.

비록 작으마한 빌라 삼층집이지만 따스한 해빛이 사방으로 비추는 따뜻한 집이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해빛을 육년만에 드디여 보게 되였다.

나는 막처음 한국에 육년을 살면서 해빛을 보지 못했고 항상 컴컴한 지하방에서 ... 우울한 휴일.명절을 보내곤 하였다. 그렇다 .인간은 그누구나 따스한 해빛을 갈망한다. 해빛이 없는 방에서 인간의 생활은 그무슨 산해진미를 먹는다고 해도 그기분은 그기분이 아니더라. 교포들의 우울한 심정, 과격한 성격도 아마 해빛과같은 따스함이 없기에 생기는것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아쉽게도 누구의 신고로 난 그집에서 피란을 떠나 그대로 개포동에 도망가듯 또다시 이사를 가게 되였다. 그집도 개포동 모파크의 삼층남향집이였는데 집도 깨끗하고 쓸손도 있게 지은 집으로 내가 살기에는 과분한 집이였다. 더욱더 반가운 것은 원래 그집에 살던 아가씨가 가정기물을 있는 그대로 나한테 돈 한푼 받지 않고 물려 주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 아가씨 얼굴 한번 보지 못하였다. 보나마나 그아가씨는 꼭 아름다운 인물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쓰던 침대 피아노 세탁기를 보면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개포동모파크의 나의 집의 일각

그러나 이것도 호경불장이라 집주인의 딸이 결혼식 한다고 이집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 어쩌겠는가, 난 들? 너무나 깨끗한 집이라 정말 내집처럼 쓸고 닦고 하였는데 ...

울며겨자먹기로 엄동설한 동지섣달에 집찾아 구만리약수옥수,금호천호,신당사당 돌아 다닌 끝에 여기에 보금 자리를 잡았다.

이런 찬란한 해빛이 스며드는 방에서 환하고 따스한 자연의 광선에 술을 마이는 이술맛이야 말로 진짜 참이슬 맛이 아닌가 싶더라.

어떤 친구분들은 돈벌러 온 주제에 좋은집을 살아 무얼 하는가 속으로 욕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불체자 주제에 언제 잡힐지 모르는 주제에 무슨 큰집인가고 비웃을 친구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나는 말한다.  우리는 인생관이 틀리다고...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을 살 것처럼 살지 말라고, 인생은 空 이라고...어떻게 살아도 결국엔 죽기 마련이라고! ...

그 명곡이 떠오른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중국에 모택동이 말씀 하셨던가? " 대해 항행은 키잡이에 의거 하고 만물의 생장은 태양에 의거한다"고, 만물중의 하나인 우리 인간도 꼭 태양빛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조선족은 내 조국 땅에서 언제 어느 때에 진정 마음 놓고 따스한 해빛을 쬘 수가 있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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