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숙 칼럼
입주가사도우미들의 월요일은 음식, 청소, 빨래가 더블로 기다리니 바쁘다. 아침에 학교가는 전쟁을 치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전에 위해여행기에 썼던 친한 친구였다. "연이 엄마, 화의 아빠가 일하다 사고로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 내일 아침에 장례를 치릅니다....." 나는 그만 멍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열심히 살고, 그토록 착하고, 그토록 부인과 딸을 다함없이 사랑하던 사람이 51세로 돌아가시다니?! 이런 변이 어데있나?! 말이 안돼!
날마다 룰룰랄라 손잡고 웃고 떠들며 가던 학교길이었는데 처음으로 표정이 굳어 묵묵히 걷기만 하니 애가 "이모, 왜 이렇게 침울해요?" 한다. "이모친구의 남편이 세상을 떴다는구나." 총명한 애인지라 금방 장난끼를 거두었다.
애를 데려다 주고 한 걸음에 돌아와 친한 언니에게 소식을 알렸다. 애기 때문에 못 떠나는 안타까워하는 언니 대신 부의금을 챙겼다. 일들을 쌓아둔채 가스와 전기점검만 마치고 부랴부랴 문을 나섰다. 지하철에 오르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친구부부는 서로 닮은듯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마음씨가 비단같은 사람들이었다. 친구의 남편은 음식도 잘하고,손풍금도 잘 치고, 처자를 유달리 아끼는 화물기사였다. 국영기업들이 왕서방들에게 팔려 나가자 위해로 이사갔다.
부부가 함께 친척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해서 일한지 3년이 된다. 부지런한 두 사람은 식당에서, 현장에서 열심히 일해 위해에 집도 두 채 장만했다.
반달음으로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친구의 손을 잡으니 눈물이 다시 줄 끊어진 구슬마냥 흐른다. 흰국화꽃에 둘러싸인 영정속에서 친구의 남편은 예전처럼 소박한 미소를 보낸다. 향을 올리고 술을 따르고, 두 번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나서 나는 큰소리로 엉엉 넉두리 했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살만하니 왜 이렇게 급히 떠나십니까?! 그토록 사랑하던 식구들은 어쩌라고 벌써 갑니까?! 친구들이 모여서 함께 즐거이 살자더니 왜 이렇게 혼자만 떠나십니까?!"
친구는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단다. 이제 일년만 더 일해서 새집 인테리어도 마치고 피아노도 사놓고 멋지게 살 많은 계획도 세웠단다. 남편은 3년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단다.
허우대 좋은 사람들도 며칠 일하다가 힘들어서 도망 갔건만 "200여만원씩 받으면서 그 만큼이야 일해야지 않겠소?!" 하면서 한국에 온 이후 언제 한 번 힘들다거나 불평불만 부린적도, 짜증낸 적도 없었단다. 즐겨 주위 사람들을 도왔기에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단다.
휴무일에 일해서 번 돈으로는 부인에게 금반지 두 개, 싫다는데도 억지로 또 보석반지도 사주고, 묵직한 금목걸이도 걸어 주었단다. 친구는 그 사랑의 증표들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울먹였다. 나도 아픈 마음에 눈물만 났다.
일요일 아침 6시, 병실에서 잠을 깬 부인에게 "좀 더 자오!"란 마지막 말만을 남기고 세상을 떴단다. 친구도 10여일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보살펴 드렸단다. 사망전의 반짝 현상으로 창밖도 내다보고 싶어하고, 한 끼 맛나게 식사하곤 빨리 나아서 일하러 가야지 하던 의욕적인 남편이 불시로 돌아가자 너무나도 아까워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루만지고 어루쓸며 통곡했단다. 부모자식간이라도 온기와 함께 정도 빠진다지만.
시간에 쫓겨 일어섰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서서 고인에게 머리숙여 인사 드렸다. " 화이 아빠, 이젠 다 내려 놓고 편히 쉬십시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비록 타향에서 생을 달리했지만 참여정부의 동포포용 정책으로 딸과, 많은 친척친구들이 와서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화환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친구 모녀를 뒤로하고 장례식장을 나서는데 이름못할 착잡함과 아린 마음에 괴로움이 더해갔다. 好人一生 平安이라지만 순간 모두가 빨간 거짓말로 생각됐다. 아니, 그게 아니다.
친구의 남편은 손을 다쳤을 뿐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몇 해 전,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쓰러져 돌아간 선량한 공자님도 사고사는 아닌 것 같았다.
58세 되는 아는 언니가 있는데 목단강 근교에서 오셨다. 언니의 말에 의하면 그 동네사람들은 거의 모두 한국에 노무로 왔는데 60세 좌우되는 남자들은 한국에서 혹은 중국에 돌아가서 모두 사망했단다. (여성들도 사망됐음)
내 생각엔 그이들 모두가 자기 몸은 기름을 치지 않아도, 쉬우지 않아도 평생 돈 잘 찍어 내는 기계로 착각했던 것 같다. 모두들 자기 몸이 극도로 衰盡해 진줄도 모르고 말이다.
60세 되는 한 언니는 아픈 허리 땜에 바로 서 있지도 못한다. 그래도 주 5일 월급제 가정부 일을 하고는 토요일에도 일하려고 헤맨다. 60세 되는 나의 이종사촌언니는 식당일을 하시는데 뜬 얼굴로 일요일에도 거의 쉬어 본 적이 없다. 한 푼이라도 더 버는 재미에.
나의 한 동창생은 애와 미끄럼타다 척추에 골절상을 입고서도 며칠 쉬고는 계속 일했다. 너무 아파서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야 병치료를 했다. 완전히 낫기도 전에 일자리를 찾아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90년대에 입국해서 모두 돈깨나 쥔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이다. 밑창빠진 욕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10여년을 일하고 나니 머리나 몸이 오직 일만을 위한 도구로 돼버렸다.
잘 입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는다. 치장도 하지 않는다. 세상구경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중국에 가서 다 한단다. 이것만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늘까지 입을 줄도, 먹을 줄도, 자신에게 투자할 줄도, 여행할 줄도 모르는 사람은 내일도 오늘과 똑같이 살 수 밖에 없다. 오늘은 내일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불효자로 되어 부모의 가슴에 묻히지 말지어다. 부모가 되었으면 자녀들을 의지할 데 없는 고아로 만들지 말지어다. 결혼했으면 홀애비나 과부를 만들지 말지어다. 밥만 잘 먹으면 되는줄로 알지 말고 건강상식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할 지어다.
현시대의 금융시스템은 티끌 모아야 태산이 되는 것이 아니고 티끌밖에 안된다. 고생 끝에 낙이 아니라 골병만 들게 한다. 쓴 것이 남는 거다. 나에게 투자하여 쌓은 지식과 상식, 정보, 건강은 지속적인 가치를 생산하지만 밖에 쌓아 놓은 것은 언제든지 줄 끊어진 연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지 말자!
한번 밖에 없는 인생 후회없이 살자!
돈만 아닌 가치있는 인생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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