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體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余泰明(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이 1992년 ‘오늘의 한글서예작품 초대전’에서 개최된 學術發表會의에서 발표한 논문(「한글서예 작품제작에 대한 새로운 방안모색」,『월간서예』, 1993.1. )에서 처음 제기되어 使用 된지 18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한글서예는 궁체, 판본체, 민체 등 3체를 정통서체로하는 체계가 형성되었다. 여태명 교수는 "민체 작품들을 보면 삼베옷에 짚신 신고 헤어진 듯 하면서도 풍요로우며,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가가 시간 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진솔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 숨쉬고 있어, 장고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고를 쳐대는 사람의 모습도 같이 어우러져 있는 듯하다."라고 말한다.
民體는 교본도 없고 지도 선생이 없기에 다만 고전 필사본을 바탕으로 自己의 感覺을 결부하여 그 오묘한 魅力을 찾아 스스로 터득해야 진정한 藝術作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서체라고 여겨진다. 기존에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類型의 필체들이 存在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한자서예의 行書 필법을 본받아 쓴 延邊書體의 흘림에 해당될 뿐이지 民體라고 보기는 어렵다.
▲ 여태명 민체
民體로 일가를 이룬 서예가는 당연 여태명교수이다. 그는 궁체도 월등한 수준일 뿐만 아니라 궁체나 판본체가 아니면 서예작품이 아니라는 편견을 깨고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민체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축제”라는 영화 포스터로 사용되면서 民體가 널리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축제체, 개똥이체 등 6종의 민체로 PC폰트를 개발하여 대중에게 널리 사용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수많은 민체애호가들을 양성하였으며 민족서예인협회, 한국캘리그래피협회 등을 창설하여 한중일민족교류전을 개최하고 있으며, 여태명문자조형연구소를 설립하여 각종 간판과 상표글씨를 제작하고 있다.
▲ 서희환 민체
판본체로 일가를 이룬 평보 서희환은 일찍 민체와 유사한 필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일부 서예가들이 민체를 본따서 흘려 쓰고 있으나 한국의 서예가들은 궁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조선족 서예가들은 청봉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림3 서희환 민체)
흔히 民體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애들이 쓴 글씨 같다”, “나도 저만큼 쓸 수 있다”는 둥의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필자가 배우고 연구한 民體는 바로 “한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의 자세로 돌아가 아무 꾸밈이 없이 자연스럽게 쓴 글시”이다. 그러나 궁체를 많이 배운 사람들은 “궁체의 美”에 대한 의식에 얽매여 아무리 변화를 준다 하여도 궁체의 멋이 풍기며, 한자나 청봉체를 배운 사람들도 기존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다.
사람은 얻은 것은 쉽게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사람들은 한가지 사실 즉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깨끗한 종이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가 쉽듯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존의 美”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자연의 美”를 감상하고 추구할 줄 알아야 진정한 民體를 창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