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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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1)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9.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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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률(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Ⅰ. 민박회

  북경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 직전이었던 1990년 10월 초, 북경에서 우연한 기회에 한분의 크리스챤 지도자(김진경 총장님)을 만나 뵙고 난 이후 그의 교육 이념에 감동되어 연변과학기술 대학 사역에 동참 해 온지 올해로 만 18년에 이른다.

내 인생의 후반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사역 기간을 통하여 중국 인민과 조선족 사회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행복한 일로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김 총장님의 권면과 집사람의 내조에 힘입어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 박사 과정에 입학한것이 2003년 9월이었다.
나는 기업인이었고 더군다나 5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었지만, 오랜 기간동안 연변과기대를 통해서 면학 분위기를 익히고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주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을 변화시키고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법으로 배움의 길을 택하게 된 셈이다.

중앙민족대학 사회학학원은 민족학계와 사회학계로 분류된다.
나는 민족학계 부문을 전공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변경지역 이중문화 형성 및 변천과정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중국 동북지역에 입주한 한민족 이민들의 토지 개척사로부터 항일 독립투쟁 및 중국 공민(조선족)으로의 전환, 1978년 개혁개방 후 국내 대도시 진출 및 해외 노무 진출에 따른 조선족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붕괴현상에 이르는 일련의 사회문화 변천과정을 한번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동북아 정세의 시대 변화에 따라 단련되고 축적된 조선족 사회의 문화적 특질을 오늘날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적응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열린 민족주의 차원에서의 접근을 연구 테마로 삼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동북아 국제협력시대 조선족사회문화기능 연구」 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졸업 1년 후인 2007년 가을에,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이라는 단행본을 한국의 학술전문출판사인 「박영사」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이 금년 3월에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의 감수를 거쳐 세계지식출판사에서  중문판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나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회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 되었다.
나는 감히 이 저서를 내 인생을 통하여 얻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열매라고 여기며, 책이 출판되기까지 도와주고 협조해 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런 가운데 각별히 잊지 못할 특수집단(?)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민박회」다.

「민박회」란 중앙민족대학 박사학위 동학회를 줄여서 쓰는 말이다.
2006년도 졸업 민족학계 동기생들이 약 15명 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소수민족 출신들이며, 소수민족 언어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일부 한족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지방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상당한 지위를 갖고 교수 및 연구 활동을 해온 삼십대 후반에서 오십대까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도 해외 유학파들의 귀국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석사 자격만 갖고도 교수 생활을 해왔던 인력들이 교수 직책을 계속 유지하려면 박사 학위를 받아야한다는 규정이 생겨서 어렵사리 파견근무 형태로 북경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된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과의 만남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는 항상 누구를 만나던 상대방(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롭고 가치있는, 창의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을 좋아했다.
나는 학위 중에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던 소수민족 엘리트들과의 만남을 무위로 돌리는게 너무나 아깝게 생각되어 졸업시즌이 가까워 졌을때,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던 동기생인 전신자 교수께 한 가지 안을 건의했다.

즉, 2006년 민족학계 졸업동기생 모임을 조직하여 1년에 한번씩 이라도 여름방학 기간을 활용하여 소수민족들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을 순회여행하면서 토론회도 갖고 서로의 연구실적을 나누어 갖는 모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안은 곧 전원일치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내가 연장자이고 또 제안자라는 이유로 「민박회」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내몽고 대학 예술학원 교수인 서영(徐英)박사가 부회장이 되었고, 연변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전신자(全信子) 박사가 총무로 봉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졸업생 중 친밀도가 높고 연락이 쉽게 잘 되는 12명 정도가 「민박회」회원으로 참여했다.

이런 결과로 지난해 2007년 7월말 여름방학 시즌에 내몽고 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에서 제1회 「민박회」 세미나를 가진바가 있고, 올해는 8월 7일부터 10일까지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연변조선족 자치주 연길에서 두 번째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8월 7일. 평소에는 연변과기대 일로 자주 다니는 길이었지만 이 날은 특별히 「민박회」모임을 위하여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연길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부터 시작된 3박 4일간의 여정을 통하여 세계역사의 새로운 흐름을 깨닫는, 역사의식의 전환과 변곡점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Ⅱ. 경희궁의 밤

  12시경 연길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온 이상열 사장(전 연길기독실업인회 회장)과 함께 “장사부 삼계탕”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숙소인 덕명(德銘)호텔로 갔다.
전신자 교수와 민박회 일행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일일이 반갑게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 후 방을 배정 받아 짐을 풀었다.
이번 캠프에는 모두 12명이 참석하였다. 그 중 2명은 일행의 자녀들이었으며, 부부조가 2팀(서영 교수 부부, 전신자 교수 부부)이었다.
우리 민박회 일행들은 전신자 교수 내외가 초청하는 저녁 만찬 시까지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타 지역에서 온 일행들이 모두 시내구경을 나갔고, 나는 방에서 그냥 쉬기로 했다.

그러나 내 성미에 어디 그냥 쉴 수가 있겠는가.
곧 바로 백두산 가는 일정 외에 연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만나볼 사람들의 명단을 짜고, 전화로 미리 스케줄을 잡아 나갔다.
우선 오늘 오후에 가장 먼저 만나봐야 할 분으로 최후택 교수(연변대)가 연락이 되었다. 30분이 지나지 않아 그가 호텔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지난해에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집필할 때 조선족 이민사 관련 자료와 중국 정부 내부문건 및 통계자료를 입수하여 번역 해 주신 분이며, 또한 나중에 중문판(제목: 동북아시대의 조선족사회)을 낼 때 1차 기초 번역을 맡아주신 분으로 내게는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분이시다.

최후택 교수께서 오셔서 방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서울 회사의 이수정 비서로부터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회장님, 박영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동북아시대와 조선족」책자가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2008년 기초학문 육성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축하해요”라는 내용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나는 갑자기 벅찬 감격을 느끼고 최후택 교수의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책을 저술할 때 나의 파트너가 되어 자료수집과 번역일을 맡아 주셨던 장본인을 만나는 시간에 이런 기쁜 소식을 받게 되다니...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최 교수도 아이처럼 맑은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축하의 인사말을 전해 왔다.

그러지 않아도 며칠 전에 박영사의 안종만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지금 심사중인데, 며칠 있으면 좋은 소식이 있을테니 기다려 보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반신반의 했으나, 그 결과를 오늘 비서가 보내온 문자메세지로 확인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특히 오늘 연길에 와서 소수민족 학자들의 모임인 「민박회」 행사를 갖는 첫날에 이런 기쁜 소식을 듣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심정이었다.
최 교수께서 돌아가고 난 다음 나는 의자에 앉아 한참동안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며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동안 18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하여 만나고 교제했던 많은 중국인들 특히, 조선족 지도자와 청년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졸저「동북아시대와 조선족」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을 써 놓은 게 기억난다.
“1990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만 16년이 넘는 세월동안‘연변’땅을 드나들면서,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연변과학기술대학의 동역자들과 사랑하는 조선동족들에게 이 책을 드리고 싶다. 저자는 감히 이들을‘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선구자들’이라고 부른다.”

이건 내 진심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조선족 사회를 이 시대의 독특한 창의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질과 문화적 특질을 실감있게 깨닫고 있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걸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 분단을 뛰어넘어 동북아사회를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유용한 중간 매체역할을 할 수 있는 선구자적 집단이라고 믿어진다.

참고로, 지난해 일본 구마모토市에서 열린 “ 제7회 환황해 경제·기술교류회의 ”에 갔을 때, 나는 한 분과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본적이 있었다.
1가지 언어만 사용하는 그룹, 2가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그룹, 그리고 3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룹을 별도로 구별하여 자리 이동하도록 했더니 그때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1가지 언어 또는 2가지 언어 사용자 그룹으로 모였는데, 유독 3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은 모두 조선족 출신의 일본 유학생들과 취업인력들이었음이 밝혀졌다.

나는 그때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 많은 한국인들, 일본인들, 중국인들 가운데 3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조선족 출신이라니!
이건 얼마나 대견스럽고 훌륭한 일인가!

내가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통해서 깨닫게 된 역사의식은 양대 국가사이에 끼여있는 변경 소수민족의 이중문화 형성과 문화적 특질이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는 초국가적 탈(脫)중심화 현상의 용도로 유익하게 쓰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동북아 지역의 조선족 사회야 말로 가장 대표적인 이중문화 구조의 촉매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그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얻은 나의 최종 결론이었다.

가슴 벅찬 감격속에서 한참을 묵상기도하며 앉아있는데 누가 방문을 노크했다.
얼굴에 번진 눈물을 닦고 방문을 열어보니 전신자 교수가 복도에 서 있었다.
방에 들어오라고 해서, 3박 4일간의 프로그램 일정과 경비에 대해 다시한번 의논했다. 그런데 전 선생께서 자꾸만 내 표정을 살펴보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묻는다.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 해 주었다.
그도 너무나 기뻐하면서, 오늘 저녁 만찬에서 공식적으로 축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는 이런 일은 「민박회」를 위해서도 큰 경사라고 말 하면서 방을 나갔다.

시내 나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오자, 우리 일행들은 전신자 교수의 부군되시는 손춘일 교수의 자가용차와 택시 2대에 분승하여 저녁 만찬 장소인 「경희궁」으로 갔다.
「경희궁」은 조선족 000사장이 경영하는 대표적인 조선족 한정식 집이었다.
이번 「민박회」 모임에 참석한 소수민족들의 면모는 이렇다.

몽골족 : 우런 박사(女, 내몽고사범대학 민속학 사회학원 교수),
         고와 박사(女, 중앙민족대학 중국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 교수)
         애리(고와 박사의 딸, 소학교 4학년),
         진영충 박사(女, 내몽고민족대학 몽고학학원 교수)
장족 : 기진옥 박사(男, 중앙민족대 민족학 사회학학원 교수)
한족 : 서영 박사(男, 내몽고대학 예술학원 교수)
다워얼족 : 우언퉈야(서영박사의 부인)
위구르족 : 장궈웬 박사 (女, 북경 우전대학 민족교육학원 교수)
           완호탠(장궈웬 박사의 아들, 중학교 3학년)
조선족 : 전신자 박사(女, 연변대 사회학과 교수)
         손춘일 박사(男, 연변대 민족연구원 원장, 전신자 교수의 부군)
한국인 : 이승률 박사(男,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회장)

도합 일곱 족속이 모였으며, 아이들까지 합쳐 12명이 이번 모임의 일행들이었다.

경희궁 식당에 들어서자 타민족 출신 회원들은 식당 내부 인테리어와 한식 가구, 비품, 방석, 의복 등의 디자인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었다.
특히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던 서영 박사가 가장 깊이 매료당한 것 같았다.
‘경희궁의 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일행들의 요청에 따라 순서대로 나오는 한정식의 재료와 만드는 조리법등을 종업원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술은 맥주와 고량주 두 가지를 각자가 편한대로 마시기로 했다.
전신자 교수가 좌중의 대화와 놀이를 주도해 나갔다.
그는 상이 다 차려지자 술잔을 채운다음 이렇게 인사했다.
“오늘 이 민박회 자리는, 이 회장님께서 뒷받침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할 수 없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별히 축하 할 일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저술하신 동북아시대와 조선족 책이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사회과학부문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이 회장님을 위해 축하합시다. 건배”
각자 돌아가면서 건배사와 함께 축하 인사를 해 주었고, 어떤이는 축하 노래와 함께 춤도 쳐 주었다.

특히 몽골족 고와 박사와 그의 딸 애리가 서로 마주보며 추는 몽골 민족춤은 일품이었다. 그러다가 전신자 교수가 다시 정색을 하며 일어나서 연설을 하듯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은 오늘 이 회장님께서는 이 자리에 오시지 못할 뻔 했습니다. 내일 열리는 북경 올림픽의 개막식에 참석할 수 있는 입장권 두 장이 당첨됐는데, 그걸 민박회 모임에 참석하시기 위해 중국사회과학원에 있는 이문 박사에게 선물로 보내드리고, 자신은 오늘 여기에 오신 겁니다. 우리 모두 이 회장님의 사랑과 우정에 감사드리며, 다시한번 건배합시다. 건배”

일행들은 전 선생의 이 말에 크게 감동이 되었는지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 졌다. 그리고는 연신 또 내게 와서 잔을 채우며 감사한 뜻을 표했다.
특히 서영 박사가 일행을 대표하여 신의를 지키는 아름다운 정신이라는 내용의 인사말을 하면서 건배 제창이 있었다.

그리고는 경극 '적벽가'의 한 소절을 불러 주었다. 나도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화답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면서, 마음을 합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는 바로 공존과 상생의 시대입니다.
이웃과 이웃간에, 민족과 민족간에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이 사랑의 능력이야말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될겁니다. 민박회는 이와같은 일에 인생을 나누는 동지들이 될겁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건배!”

나는 그날 밤 크게 대취하였다.
너무 기분이 좋았고, 또 의미있는 모임인지라 그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어디 그게 나뿐만이었겠는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한껏 부풀어 고무풍선처럼 충만해 있었다.
고아 박사의 딸 애리가 연신 자리를 돌아다니며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귀여웠다. 또 같이 따라온 장궈웬 박사의 아들 완호탠은 그때그때마다 스냅을 찍는 사진사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그날 크게 실수(?)를 한 게 있다.
술과 식사가 어느정도 진행되자 분위기가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가는것 같아서 남아있는 맥주와 고량주를 활용하여 폭탄주를 만들어 한잔씩 차례대로 돌렸다.
타 민족인 그들은 숙맥이어서 그런지 여태껏 폭탄주를 한번도 마셔본적도 없고, 얘기 들어본바도 없다고 했다.
나는 시범을 보여줬다.
맥주 글라스에 7할정도 술을 담은 후 고량주를 채운 작은 잔을 퐁당 빠뜨리는 방법으로 폭탄주를 제조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샷으로 마신 후 머리위에서 딸랑 딸랑 소리내며 잔을 다 비웠다는 확인을 하도록 가르쳤다. 그런 후 내가 자리에 앉는 동시에 옆사람이(미리 제조해 둔 잔을 들고)일어나서 내가 했던 것처럼 잔을 비우고 딸랑딸랑 소리까지 낸 뒤 다시 자기 자리에 앉도록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파도타기를 가르친것이다.
이 “ 파도타기 폭탄주”를 세바퀴정도 돌리자 나를 제외한 9명의 어른들이 모두 다 혼비백산해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한 모습이 되었다. 그들은 맛이 어떠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독하면서 맛있고,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한국이 짧은 기간안에 세계에서 12위권 경제대국이 되고, 또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게 바로 이 폭탄주 위력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폭탄주야 말로 세상을 이기는 비밀병기라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좌중이 떠나갈 듯 웃었다.

경희궁의 밤은 이렇게 위대한 사랑의 핵폭탄(?)을 터뜨리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겹게 깊어갔다.
그것도 일곱 족속들이 모인 사뭇 이질적인 자리일 수 있었지만 우리들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하나됨의 역사의식은 이렇게 소통하는 사랑의 능력으로 꽃피우는 우정의 한마당,“파도타기 폭탄주”와 같은 아름다운 헌신의 연합정신이 아니겠는가!

아, 이 귀하고 감칠맛 나는 화합주를 한껏 마시고 싶어진다.


Ⅲ. 백두산 소수민족 올림픽

  둘째날 아침 조반을 마친 후 우리 일행들은 임대버스를 타고 서둘러서 연변대학으로 갔다.
9시부터 민족연구원 회의실에서 학술 좌담회가 시작되었다. 우리 소식을 듣고 인문사회학 전공자들이 몇 분 회의에 동참했다.

전신자 교수께서 사회를 맡았고, 나의 인사말에 이어 손춘일 박사(민족연구원 원장)께서 기조연설을 해 주셨다.
그는 연변대학 출신으로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형 인물이다.
손 원장의 발표는 연변대학 개황, 조선족의 동북지역 이주사, 조선족의 공헌(항일 투쟁운동, 수전 개발 등), 최근‘동북진흥전략’에 따른 두만강유역 개발 전망에 대한 내용을 주로 했다.

연이어 토론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민족문화계승과 발전에 대하여 의견을 발표했으며, 사안에 따라 질의, 답변하는 형식으로 특별한 순서없이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을 하다보니 언어학 전공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민족언어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시대 조류에 적응하는 국제공용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내몽골 대학에서는 전공분야에 따라 전문적인 몽골족어 교육과 중국어 교육을 병행실시하고 있는데 비해, 연변대학에서는 조선어학부외에는 모두 중국어로만 강의를 하고 있는점이 지적됐다.
북경 우전대학 같은데서는 소수민족을 위하여 전문적인 예비학과가 설치되어 있어서 지역별로 우수학생을 선발, 중국어 교육을 시킨 후 일정 수준이 되면 전공분야에 배치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학점을 취득하고 졸업하면 출신지역으로 돌아가게 해서 분야별로 취업토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예컨대, 위구르족들은 위구르어만 알았지 중국어는 잘 모르므로 1~2년간 예비학과에서 중국어를 공부시킨 후 전공학과에 배치한다고 했다. 그런 반면에 조선족 사회에서는 인구 분산과 함께 중,소학교가 많이 폐지되고 있으며, 또 중국어 교육에 비해 조선어(한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연변대학 같은데서는 조선족 학생들의 신입생 초생(입학전형) 문제가 심각한 상태라는 지적이 계속 언급되었다.

이 점은 졸저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에서도 동일하게 지적한 내용인데, 장차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진로를 감안할 때 중국어 교육과 더불어 조선어 교육을 보강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될 단계라고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정보화, 국제화 시대에 적응하는 소수민족들의 인재 육성방안은 기본적으로 자체 민족언어를 일정 수준까지 학습해야하고 거기에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같은 국제 공용어까지 겸비한 인물로 키워야 미래가 보장된다는 결론이 났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중국 내 소수민족들에게는 이와같은 언어 교육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학습하는 것이 그들 사회의 자체 역량을 키우고 세계화시대 현실에 대처 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2시간 가량 진행 된 좌담회를 마친 후 우리 일행들은 연변대학내 주요 시설을 잠시 둘러본 후 곧장 연길시 북산가에 있는 연변과기대로 향했다.
공식적으로는 「연변대학과학기술학원」이지만, 흔히 연변과기대로 약칭해서 쓴다.
본 대학은 중국 안에서 외국인이 설립․운영하고 있는, 캠퍼스가 있는 유일한 중외합작 대학이며, 학교 안에 있는 화장터를 개조해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대학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조선족 공동묘지였던 곳이다.
과거 죽음의 땅이 이제는 중국 안에서 가장 앞서가는 인재를 키우는 생명의 땅으로 변화되었다고 해서 우리들은 이곳을‘기적의 동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여명이 넘는 13개국 출신의 교직원들이 모두 자비량으로 봉사하면서 학생들을 섬기고 지역사회 발전에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다.

「민박회」 일행들은 내가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대학이고, 또 대학 설립 정신과 운영방침이 특별한 국제대학이라서 평소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게 되니 느낀바가 컷던가보다.
시간이 없어서 버스를 탄 채로 캠퍼스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지만, 나의 설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듣고 메모까지 했다.

대학 정문에서 단체 기념촬영을 마친 후, 우리는 곧장 하남(河南) 모아산 기슭에 있는 뉴코어 식당으로 갔다. 원래 배밭이었던 곳을 야외 레스토랑으로 꾸민 아주 격조가 있고 연길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한식당이었다.
여러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모임이라서 그런지, 특히 여성 멤버들은 음식이 하나하나 나올때마다 사진을 찍고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냐고 종업원들에게 꼬치꼬치 묻곤했다.

날씨가 무척 더웠지만, 하늘은 쾌청하고 공기가 너무나 맑았다.
일행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욱 고맙게 생각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이제 백두산 행이다.

백두산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주로 이용했던 길은 안도현 돈화를 거쳐서 가는 길이다. 도로 포장이 잘 되어있고 노선이 완만하여 이용도가 높았다. 그러나 소요시간이 버스로 5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코스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용정, 화룡을 거쳐서 두만강을 따라 가는 산복도로가 전 구간 포장 작업을 완료해서 개통 되었다고 한다. 이 길은 도로세 부담이 크지만 지름길이어서 주행 시간이 3시간 반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갈 때는 용정, 화룡 코스로 가고 돌아올 때는 안도, 돈화를 거쳐서 오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백두산 가는 일행들의 표정은 마치 수학여행 떠나는 학생들 같았다.
그동안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다가 일년만에 다시 한곳에 모여 여행을 떠나니 모두가 어린아이 같은 심정일 것이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버스가 백두산 산문(山門)입구에 도착할때까지 끊임없이 얘기하고 웃고 떠들며 손뼉치곤 했다.
산문 입구에서 우리가 타고 왔던 임대버스는 입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공용주차장으로 돌아갔고, 일행들은 입장권을 구입한 후 경내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2년전부터 백두산 관광지 관리운영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되었다. 관광지 시설과 경내 환경이 많이 정비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 한국에서 투자했던 시설들이 불법적으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하여 지금 법적 소송 중에 걸려 있는 곳도 있다.
 그 대표적인 숙박시설이 우리가 투숙 할 예정인 천상관광호텔이다.
이 호텔은 한국의 참빛그룹(眞光集団)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위치가 백두산 장백폭포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다.
자연 분출되는 유황온천수로 난방까지 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들이 천상관광호텔에 짐을 푼 것은 저녁 6시경이었다. 우선 온천부터하고 저녁 식사를 빨리 마치기로 했다.
2008년 8월 8일 8시에 개막되는 북경올림픽을 백두산에서 맞이하게 된 「민박회」일행들은 모두가 구름에 떠 있는듯한 표정이다.
다들 온천수가 너무 좋다고 야단들이다.
내몽골자치구나 신장자치구에서 온 분들이 특히 그랬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기온도 낮엔 뜨거웠지만 산상에 오르니 선선하고 상쾌했다.
건물 바깥에 있는 야외용 노상 온천탕에 둘러앉아 멀리 장백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용암이 흘러 생긴 가파른 계곡 위 푸른 하늘에 하얀 반달이 걸려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경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온천 후 활기에 넘치는 모습으로 남녀노소 12명이 한상에 둘러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다만, 한창 시즌인데 올림픽 때문인지 아니면 천지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지난달 폭우에 무너져 내려 당국이 등산로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 관광객들이 별로 없어서 한산 할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더욱 오붓하게 만찬을 즐겼다.

술은 나중에 올림픽 개막식 구경을 하면서 마시기로 하여, 간단히 식사만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얼마있지 않아 우리 일행들은 특별히 예약해 둔, 이 호텔에서 가장 넓은 단체용 온돌방으로 집합했다.
방안 한 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미리 준비해 온 맥주와 음료수, 과자, 안주거리 등을 벌려 놓았다. 그리고 방안에 있는 의자들을 모아보니 12명이 모두 앉을 수 있는 숫자가 되었다. 장시간 앉아 있으려면 의자가 없이는 매우 불편한데 마침 부족함없이 준비되었다.

이제 모든게 준비 완료 되었다.
2008 북경올림픽 개막을 앞둔 호기심과 열기는 어디 북경 냐오차오 스타디움 뿐이겠는가!
백두산 천상호텔 온돌방에서 맞는 「민박회」의 올림픽 개막식은 어쩌면 문자 그대로 '백두천상'에서 벌리는 잊지못할 소수민족 올림픽 잔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북경올림픽이 개막되었다.
1908년 한 중국인이 올림픽 개최 희망을 피력한지 꼭 100년만에 ‘중국 100년의 꿈’이 꽃피는 순간이었다.
개막식 직전에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과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장이 VIP석에 입장하면서 장내 분위기는 뜨겁게 고조되었다.
8시 정각에 개막식이 시작되어 중국 국기 게양과 국가 제창이 이어지자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중국 관중은 물론이고 행사를 진행하던 경기장의 자원봉사자들까지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온돌방에서 50인치 TV를 통해 개막식을 보던 「민박회」일행들도 56개 민족의 어린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중국 국기를 들고 나오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면서 중국 국가가 울려 퍼지고 국기인 오성홍기가 하늘 높이 게양되자 모두 일어나 숙연한 모습으로 경례를 표했다.

이날 개막식 행사에는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전 세계 80여개국 정상들이 참석했으며, 또한 204개 국가와 지역, 그리고 1만 5000여명의 선수들이 참여해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선수가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모두 3부로 나눠진 개막식은 오륜기 등장 등 예식행사와 예술공연, 마지막으로 각국 선수단 입장,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등 관계자들의 인사말, 후진타오 국가 주석의 개최 선포, 성화 점화 순으로 진행됐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올림픽 주제가는 영국의 뮤지컬 가수 세라 브라이트먼(48,女)과 중국의 국민가수 류환(劉歡,45)이 각각 영어와 중국어로‘You and Me'를 불렀다.
특히 개막식의 마지막 순서인 성화 점화가 하이라이트였는데, 그동안 '화해의 여정(和諧之旅)’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21개국과 중국 국내 등 13만7000km를 달려온 성화가 최종주자인 체조 스타 리닝(李寧,45)에 의해 점화대에서 불이 밝혀지는 순간 냐오차오 스타디움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절정에 달했다.

이날 지구촌을 하나의 꿈과 감동의 열기 속으로 몰아넣은 개막식에는 3만발의 불꽃이 터져 나와 대회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으며, 예술 공연의 진행 순서가 하나씩 바뀔때마다 관중들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지르며 열렬히 환호했다.
13억 인민들의 꿈을 담아 7년간 준비한 끝에 펼친 대 역사드라마, 장이모우 감독의 화려한 행위예술이 선보인 개막식 광경은 중화 부흥을 알리는 지상최대의 ‘올림픽 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민박회」일행들은 특히 인문사회, 문화, 언어학 부문 전공자들이 많아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첨단 IT기술, 현란한 색조의 조명예술과 입체적인 공간연출 기법 등에 접목시켜 신비로움을 더해 주는 개막식 공연을 꾸민데 대해 극도의 찬사를 보냈다.
길이 70m짜리 전자 스크린 위에서 춤을 추면서 그린 그림이 하늘로 올라가는가 하면, 중국의 고대 복장과 춤을 통해 종이와 인쇄, 화약, 나침반 등 중국의 4대 발명품을 표현할때는 다들 기가 차다는 듯 숨을 죽이며 TV박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3000명의 예술단이 그려내는, 입체로 표현 된 한자들이 변환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어울릴 화(和)’자를 떠 올릴때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 “和”자는 공자께서 강조했던 ‘화위귀(和爲貴)’를 가리키는 글자이기도 하고, 후진타오 주석의 정치이념인 ‘화해(和諧)’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평화(平和)’를 상징하는 글자이기도 할 테다.
“오늘밤 북경의 역사는 새로 쓰여진다. 중국은 이제 세계를 품는다.”

이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8월 8일자 조간신문 사설에 나온 글이다.
중국은 개막식 공연을 통해 과연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는가?
그들이 품고 있는 비전은 도대체 무엇인가?
잠자는 시자와 같았던 대륙의 혼을 깨우고, 13억 인구를 굴기(崛起, 떨쳐 일어남)의 도장으로 이끌어가는 기본 정신이 바로 ‘和’이었던가!

200여년전,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말라. 잠에서 깨면 귀찮아질 테니까”
천하를 호령했던 ‘강한성당(强漢盛唐, 강한 한나라와 성세의 당나라)’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중국의 기대가 엿보인다.
그들은 어쩌면‘다시 일어서는 중국의 모습’을 세계 앞에 펼쳐보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패권 추구를 뜻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잠자던 사자가 깨면 사자(중국)가 조련사(서구열강)를 물수도 있다. 사자가 조련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조련사는 알지만 사자는 정작 모른다. 그러나 사자가 그 사실을 알아버렸는데도 조련사가 예전처럼 사자를 길들이려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이는 내가 묻는 질문이 아니다.
10여년전 중국 신세대 지식인들이 탐독했던 초베스트셀러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에서 내 뱉은 경고성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차례 「민박회」 회원들에게 화두로 던져봤다.
그들의 대답을 종합해보면, 중국은 결코 패권 국가로 발전하지는 않을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북경올림픽 개막식에 담긴 기본이념은 한마디로 “和”를 뜻한다는게 중론이었다.

서영 박사는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이 개막식 공연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 내용은 경제대국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문화대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임으로서 대 내외적으로 새로운 중국 부흥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문화의 기본은 “和”에 있으며, 이것은 진시황 이후 2000년간 중국 역사를 이어온 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현 지도부가 대외정책을 화평발전에 두고 있는것도 중국의 발전에 있어서 이 “和”의 윤리체제가 정립되지 못하면 중국은 또 한차례의 세계 냉전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렇게 되면 중국의 미래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와 EU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전략이라고 답변했다.

그렀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러한 의도를 세계인들로 하여금 아무런 의심없이, 왜곡됨이 없이 받아드릴 수 있도록 만들것인가?
중앙민족대학에서 만족어를 전공했던 고와 박사가 힌트를 주었다. 그는 몽골족이지만 만족어를 전공했고 지금 중앙민족대학 중국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 언어연구소에서 만족어를 가르치고 있는 재원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은 메이저 그룹인 한족과 더불어 대 가정 국가를 이루고 있는 주요 자원입니다. 중국 내 56개 민족의 화합이야말로 중국 체제의 키워드입니다. 중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입니다. 이 지구촌 사회에서 중국처럼 화합을 중시하는 나라는 없을것입니다. ‘和’자는 국제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국가체제 유지를 위한 대내 정책의 핵심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지만 만일 세계인들이 중국의 이와같은 화평정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국제관계의 분쟁과 시비를 해소하는 방책으로 활용한다면 지구촌 전체의 화합을 위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나는 전신자 교수가 통역해 주는 내용을 차분히 마음에 새기면서 중국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소수민족 엘리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티베트나, 신장 위구르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 탄압의 악순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국은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나라인가?

 내 마음속에 일말의 의문이 일어났지만,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체제안에서 지역편차와 민족 성향의 다양성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화평(和平)정책을 기조로 삼는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만일 중국 지도부가 일방적인 국가권력으로 통합체제를 유지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권과 민족 단위의 자결 의식을 최대한 고양시키면서 소통과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자유주의’ 체제로 대 가정 국가를 통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봤다.


Ⅳ. 올림픽 이후 중국의 과제

  TV 화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막식 공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상을 한 마디로 말해 보라면, 그것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충격'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중국 고대문명부터 현대까지의 5000년 역사, 그리고 우주시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사회가 추구해야 할 평화의 메시지를 탁월한 상상력과 첨단 기술력으로 압축하여 재현한 능력도 놀랍거니와 이합집산하는 군무를 통하여 인해전술식 조직력을 과시하면서 새로운 중국의 힘과 이미지를 형상화 시켜나가는 관경을 보고 있노라니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오리엔탈 쇼크'라고 할 만한 이 거대한 응집된 기상의 폭발력은 장차 중국과 세계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올림픽 이후 중국의 과제는 무엇이며, 북경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행동과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텐데, 그 답은 무엇일까?

이제 중국은 중국만의 중국이 아니라 세계를 이끌어 갈만한 능력을 갖춘 강대국으로서 세계로부터 존경과 책임을 동시에 지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책임이 수반된 가운데 대외정책을 미래지향적으로 끌고 가야할 의무가 생긴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군사 분야를 빼고는 경제·다자외교·문화 등 대부분의 국제무대에서 미국과 대등한 세력임을 자임하고 나설것으로 전망되는 중국의 향후 행보가 매우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미국식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가 성행해 왔다면 앞으로는 중국식 스탠다드를 고집해 국제 관계의 준거 틀(Norm)을 새롭게 짜려는 의도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북경올림픽의 앰블럼을 한자의 여러 서체 중 하나인 전서체(篆書体)를 기반으로 도안 한 것은 주최국으로서의 재량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개막식 선수입장 순서를 알파벳 순서로 하지 않고 각 국가의 이름을 중국 간자체의 획수 순서로 배열한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보인다.

전 세계 문자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합리적인 문자로 한글을 꼽았던 영국의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19세기까지 전 세계 정보량의 90%를 한자가 점유하고 있었으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그 90%를 알파벳 문자가 점하게 됐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중국이 북경올림픽을 통해 한자를 부각시키는 이유가 혹시 영어에 빼앗긴 글로벌 패권을 되찾기 위한 도전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와같이 5000년 역사의 문화력과 급부상한 경제 및 외교력을 기반으로 하여 장차 군사력에 까지 세계 최대강국의 위치에 도전하려는 패권의식이 발동한다면, 그때 이 잠깬 사자를 제어 할 국가가 지구촌안에서 미국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오래전부터 예상해 왔던 바와 같이) 미국은 중국을 향후 최대의 적대국가로 지목할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전략을 펴 자국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일에 최대한 역점을 두는 쪽으로 국가정책을 추진해 나갈것이다.
그때 한국은 한·미관계와 한·중관계 사이에서 과연 어떤 대안을 갖고 자신의 안보와 국가발전정책을 구사해 나갈것인가?

평화와 화합을 내 세운 경이로운 개막식 광경의 이면에서 13억 중국인들이 과시하고 있는 이 거대한 국력의 제의(祭儀)를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은 곧 저 힘이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지, 과연 우리는 홀로 설수나 있을는지 하는 염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기세등등한 중화 민족주의의 자존심을 거드리지 않으면서 그들과 함께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개막식 후반 선수 입장식 때 등장한 한국과 북한 선수들을 바라보면서 환호하던 마음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한참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손춘일 원장께서 술을 한잔 권해 왔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고 여러 사람들과 건배를 한 후 갈증이 나서 연거푸 두잔이나 들이마셨다.

선수 입장식이 끝난 후 자크 로게 IOC위원장의 인사말과 후진타오 주석의 대회 개최선포가 있은 다음 마침내 체조 스타 리닝(李寧)이 한 마리의 새가 되어 공중을 날아오르면서 성화대에 불을 붙이는 광경이 TV화면에 클로즈업 되자, 새 둥지 모양의 냐오차오 스타디움은 그야말로 터져 나갈듯한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내 마음속에도 새로운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성화는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였던 그리스의 아테네를 출발하여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시아 지역 여러 국가를 돌아 북경에까지 왔다. 어쩌면 이 성화봉송의 길은 세계역사의 진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학을 다루는 관점 가운데 섭리사관이 있다. 기독교 사상이 기초가 된 이 역사관은 세계 복음화의 물결이 서진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중동지역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복음의 물결이 지중해와 로마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후 대서양을 건너 신천지 미국에까지 이른 이 물결은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고 일본과 한국을 거쳐 드디어 중국 대륙에 까지 전파되었다.
1964년 동경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2008년 북경올림픽, 이런 순서로 20년을 주기로 순차적으로 밀려온 올림픽의 물결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파고를 넘고 미·소 양대진영의 냉전의 벽을 넘어 마침내 공존과 상생을 목표로 새로운 화합의 복음을 지향하는 세계역사의 서진화 현상을 상징하는 예표가 될 만하다.
그리고 이제 북경올림픽 이후의 중국의 변화가 자못 궁금하다.
중국의 변화는 곧 세계의 변화이다. 세계 역사의 흐름은 중국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물결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 중국의 변화가 이끄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성화가 점화되는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상념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동안 꿈꾸어 왔던 동아시아 공동체 사역의 역사의식과 이를 이끌어 갈 만한 시대정신을 「민박회」소수민족 엘리트들과의 대화 가운데 소통하고 있는 "和"자의 의미속에서 새 길을 찾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내 마음에 갑자기 기름을 끼얻는듯한 흥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장이모우 감독이 중국 지도부와 함께 협의해서 만든 전략적인 의도로서의 작품(和)이 아니라, 2000년 전부터 하나님의 섭리아래 진행되어 왔던 서진화 역사의 분기점에서 나타난 참된 평화로서의 "和"임을 깨닫는 충격이었다.

만일 중국이 이번 북경올림픽 대회의 성공을 기반으로 해서 앞으로의 대외정책을 국제사회가 요청하고 기대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물꼬를 튼다면 이는 세계역사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 참여하지 않으면 21세기에 제대로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후변화에서 안보, 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파트너십이 꼭 필요하다."
이는 북경올림픽을 보고 느낀 중국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가 한 말이다. 북경올림픽이 끝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은 이른바 '중국 끌어들이기(China Engagement)에 쏠릴 전망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경올림픽 참석 직전 워싱턴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을 (국제 사회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대통령 취임 전 CNN과의 인터뷰에서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차별화할 가장 중요한 정책 분야가 어떤 것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중국"이라고 대답했던적이 있다. 아무튼 이제 중국은 싫던 좋던 국제사회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것은 글로벌 이슈인 기후변화, 안보, 교역 문제뿐만 아니라 인권문제 해결 및 해외의 사회공헌 활동, 시장체제의 개방과 자유민주주의 확대 등 다양한 현안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책임을 다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전망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국지도부와 국민들이 1989년도의 천안문사태에 대한 정신적 부채 등으로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왔던 굴레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같다.

이에 성공하려면 경제력, 문화력, 군사력에 더해 윤리적인 중국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는게 지배적인 국제여론이다. 중국의 변화는 바로 이와같은 도덕적 리더십 확립을 핵심과제로 삼을 때 비로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올림픽 이후의 과제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여론과 주장은 중국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만하다. 기원 후 2000년간 서진화 현상을 띄면서 흘러 온 역사 변천의 물결이, 2008 북경올림픽을 통하여 중국이 세계역사 흐름의 중심지로 부상함으로써 마침내 "和"의 의미를 21세기 국제사회의 도덕적 리더십의 핵심가치로 승화시켜 나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졌다.
생각이 여기에 까지 이르자 마음속으로 중국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염(念)이 새롭게 깊어짐을 느꼈다.

1978년 개혁 개방이 시작된지 꼭 30년만에 열린 이번 북경올림픽은, 그동안 30년간 고생해 온 중국인들의 어깨를 펴게하고 그 노고를 치하하는 자축의 파티장으로 존중해 줘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아편전쟁 후 서구 열강으로부터 100년간의 침탈을 받았던 쓰라린 역사를 딛고 일어선 중국은 이제 동서양 세계역사 흐름의 가장 중요한 합류지점으로 그 입지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이해 하는것이 옳을 것 같다.

다만, 한당(漢唐)시대 이후 1000년만에 다시 세계속에 재등장하는 중화민족 부흥(팍스 시니카)의 드라마는 중국이 중국만을 위해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세계를 섬기며, 세계를 위한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21세기 정신의 표상임을 증명하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마침내 북경올림픽이 추구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One World, One Dream)이 이러한 희망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캐치 플래이즈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로마의 콜로세움이래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우며 독특한 경기장" 이라고 찬사를 보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의 평가와같이, 중국은 이제 평화를 상징하는 새 둥지 모양의 냐오차오(鳥巢)스타디움을 통해 로마제국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세계역사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천년의 꿈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와 긴장감이 마음속에 잦아들어 왔다.

그리고 나와 함께 백두산 소수민족 올림픽에 참가한 「민박회」회원들도 이심전심으로 각자의 마음속에 소통과 협력, 우정과 헌신의 능력으로 움트는 새로운 '공동체 자유주의' 의식을 품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3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개막식의 전모를 시청하는 동안, 한방에 둘러모인 일행들과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 가슴속에 숨어 있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애환과 여망을 감지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중국과 세계역사를 향한 화해의 여정(和諧之旅)을 시작하는 단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오! 하나님 이 길이 당신이 원하시는 길입니까?
중국을 통해 중국을 넘어서야 할 길은 어디로 열려있나요. 작은 자를 사용하여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복음의 진리를 위해 이 소수민족들을 사용하지 않으시렵니까, 이들을 통하여 중국과 세계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길을 예비하여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Ⅴ. 흐름의 미학

  다음날(셋째날) 아침 우리 일행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장백폭포로 산행을 나갔다. 한 여름이지만, 높은 산중의 새벽공기라 그런지 차가왔다.
심호흡을 하면 폐부 깊이 스며드는 공기가 너무나 신선하고 청정했다.

폭포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노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피어오르는 김이 백자작 고목들 사이로 새벽안개처럼 퍼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것 같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폭포에서 흘러  내리는 물길 위로 길이가 50m 정도 되는 철제 다리가 가로 놓여 있다. 모양은 볼품이 없지만,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철교 위에 서서, 장백폭포에서 쏟아진 물결이 하얀 거품을 물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빠른 속도로 흘러내려가는 모양을 바라본다. 한참동안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의 흐름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물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동안  '흐름'에 대한 생각을 별로 심각하게 해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장백의 흐름이 나를 철학적인 명상에 빠져 들도록 만든다.

백자작과 물푸레나무들이 한데 엉켜 우거져 있는 산길을 15분정도 더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장백폭포가 한눈에 가득 들어오면서 시야가 탁 트였다.
장백폭포의 위용을 말로 어찌 다 표현할까!
멀리서보면 긴 하얀 천이 움직이지 않는 그림처럼 산비탈 허공에 걸려 있는듯 했는데, 가까이와서 보니 천지에서 흘러넘치는 물의 양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물안개를 피우며 낙차하는 그 웅대한 힘의 위력이 온 산천을 진동시키는 듯하다.
 
일행들이 이쪽저쪽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다.
나는 흘러가는 물가의 바위위에 올라서서 마치 돌부처처럼 허공을 바라본다.
은연중에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일어난다. 만물은 본디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속성을 갖고 있지 않는가?
오늘 아침 따라 인간의 존재를 자연의 일부로 해석하고 싶은 생각이 뭉클 솟는다.

물의 흐름은 자연의 흐름이리라.
그래서 만물은 흐르고, 나도 그 속에서 함께 흐른다. 이 흐름의 미학속에 나를 침잠시켜보니 내가 곧 물이요 물은 나의 의식의 흐름이 되어 나를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다.

젊은 날, 일주일이 멀다하고 산행을 즐길 때 내가 던진 화두중에 가장 멋있다고 느껴진 말이 "산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라는 말이었다.
오늘 이제 물의 흐름에 잠겨보니 물 또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흐르는 흐름속에 존재함을 깨닫는다.
다만 물이 산과 다른것은, 산맥은 정지된 상태의 흐름으로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물길은 물이 물을 당기고 밀치며 한 방향으로 이어져 흘러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낙화유수라고 했던가,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한길 낮은 곳으로 흐르는 그 겸허한 흐름속에 물의 실존이 살아 있는것 같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실존을 느끼며, 돌부처처럼 서서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일순 역사도 이와같아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수도 있지만, 또한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아, 그렇다.
인간은 자연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 역사존재이기도하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시간과 공간의 교직으로 짜여지는 역사의 흐름속에 살아가는 현존재가 바로 우리들의 지금 이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를 함유하는 존재이며, 또한 자연과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의 미학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의식의 틀이 될 것같다.

만물은 흐른다. 자연도 흐르고 역사도 흐른다.
이 흐름을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게 기독교 신앙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날 아침, 백두산 장백폭포 앞에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다시한번 깊은 감격을 맛보았다.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 온 일행들은 곧바로 온천탕으로 가서 목욕을 했다.
멀리 내몽고와 신장 지역에서 온 분들이 온천을 너무나 좋아했다.
조찬을 든 다음, 우리들은 짐을 챙겨 경내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산정으로 올라가기 위해 짚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으로 갔다.
백두산 산문(山門) 바깥에 있는 숙박시설을 이용했던 중국인 관광객들과 연길에서 새벽 일찍 출발하여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상당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열두명이라 여섯명씩 타는 짚차 두 대에 알맞게 분승했다.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고 쾌청했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아서 천지 등정을 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백두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산복도로는 험하고 가파르다.
길이 꼬불꼬불 거릴 뿐만 아니라 경사도가 있어서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리지 않으면 차를 운행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일행들은 찝차가 거칠게 커브를 돌때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산기슭에서부터 산정에 오르는 고도에 따라 식물군의 분포가 확실히 차이가 났다.
와이프(박재숙:원예학 박사)의 말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관목류와 지피식물은  천연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고 희귀성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중국 정부는 이 산을 몇 년전에 중국 10대 명산중의 하나로 편입시켰으며, UN에 보고하여 환경보호구역으로 지정받음으로서 영구 귀속시킬 속셈이다. 또한 천지의 절반을 나누어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으로써, 한국의 많은 식자들로부터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관리하던 장백산 관광지 관리운영권을 길림성으로 이관시킨 후 대대적인 관광지 개발 사업을 벌려 인근 백산시에 공항을 건설하고 도로 및 철도를 연결했을 뿐 아니라 교통 요충지인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유럽풍의 리조트형  관광도시로 탈바꿈시켜, 중국내 주요기관들과 부유층의 여름휴가 별장지로 사용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일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맞물린 채, 이 지역에 투자해왔던 한국 기업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에도 관광재정 수익면에서 많은 손실을 안겨준 배타적 행정조치라 해서 말썽을 빚고 있기도 하다.

짚차가 백두산 산정 가까이 올라서면 오래전에 중국 정부에서 세운 기상관측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최근에 기상관측소 앞에 국경 및 관광지 관리 임무를 띈 행정 건물이 하나 더 들어서 있는것을 볼 수 있다. 그 건물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다.
"祖国利益 高於一切"
중국의 국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글이다.

짚차에서 내리자 「민박회」일행들은 모두 뛰어 오르듯 산정으로 올라갔다.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천문봉 정상에 올라선 그들의 눈에 드러난 천지(天池)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한 폭의 신비스러운 영상화면을 보는것과 같았다. 분화구 전체를 에메랄드색 유리판으로 덮어 놓은 듯 푸르고 맑은 빛을 띄며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뜰수없을 만큼 눈 부시다. 마치 구름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 그대로 천지에 빠져있는 듯 한 현상이다.

일행들은 온갖 폼을 취하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12명 전원 단체 사진을 관광지 전속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파노라마형으로 찍었다.
현장에서 바로 인화된 사진을 한 장씩 받아 들고 일행들이 떠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너무나 행복해졌다.

하늘도 푸르고 천지도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다.
또한「민박회」로 모인 소수민족들이 하나의 꿈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너무나 푸르고 순진하다.
누가 우리의 이 푸른 꿈을 막을 것인가?
무엇이 우리의 이 순수한 우정의 관계를 왜곡 시킬것인가?

천지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푸른 물길을 마음에 새기며, 내 가슴 속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정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본다. 시작도 끝도 없이 솟아오르고 흘러내리는 천지의 열정을 내 가슴에 담는다.
존재하는 삶의 가치로서 이 보다 더 깊고 뜨거운 흐름의 미학이 어디 있을까?
영겁의 세월을 통하여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가 내 의식의 흐름 속에 하나의 메모리 칩으로 압축되는 듯 한 감을 느낀다.

깊은 영혼의 호흡을 통해 깨닫는 천지(天池)의 속성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천지(天池)는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정기와 욕망을 담은 자궁이요. 장백폭포는 배꼽이 되어 긴 탯줄을 대지위에 드리운 채 만물을 소성케하는 강(江)의 시작이 되는 그런 형상이다.

천지(天池)를 바라보면서, 그 천지(天池)를 통해 하늘과 땅과 천지만물(天地萬物)의 흐름을 체감하는 영적 기쁨은 마치 생명의 근원에 몰입할 때 경험하는 카타르시스와 같았다.
장백폭포가 쏟아낸 긴 흐름도 결국은 천지(天池)라는 물 근원이 있음으로 가능하리라.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의 흐름도 결국은 창조주의 배꼽으로부터 솟아난 생명의 물줄기를 따라 이합집산하며 여기까지 흘러온게 틀림없다.

'전쟁과 평화라는 이름의 쌍두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달려 온 인류 역사의 본질은 한마디로 흐름의 미학을 따라 존재하는 삶의 궤적이라고 할 만하다.
천지와 장백폭포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역사적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상통하는 순환론적 섭리에 의한 인간 집단의 욕망과 투쟁하는 삶의 흐름이었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안도현 만보진에 있는 조선족 민속촌(홍기촌)을 구경했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족 출신으로서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을 다루는 최고기관인 정협회의 주임이신 리덕수 선생께서 쓴 '중국조선족제일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민속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촌민 생활구, 민속 거주구, 민속 활동구, 민속 음식 제작구 등으로 구역을 나눠 특징있게 시설을 배치 해 놓았다.
민박회 일행들은 특히 조선족 촌민들의 거주 생활과 음식 제작 부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떤이는 북방식 주거 형태인 마루짱 밑 부엌구조가 신기해 보였는지 직접 마루짱을 열고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어 보기도 했다.

건물들은 모두 단층 기와집으로 단장되어 있고, 지붕에는 태양열수기가 장치 되어있으며, 수세식 변소와 함께 주방에는 프로판 가스도 연결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옥수수, 해바라기, 배추, 고추, 가지, 파, 황두(콩), 깻잎 등의 작물이 자라고 있고, 빨간 꽃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린 분꽃이 화단에 심겨져 있다.

건물 벽에 군데군데「福」자와 함께 벽화형태로 민속그림이 그려져 있고, 마을 중앙에 있는 행정기관의 현관에 "신농촌 신면모, 신농민 신생활"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한마디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신 농촌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길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가보니 향도원(香稻園)이라는 이름의 수전(水田)농사 시범지구가 있었다.
2,000평 정도의 규모로 지당(池塘)을 조성 해 놓고, 사방으로 목재 데크 통로를 배치하여 관광객들이 물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수초와 벼농사를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내몽고와 신장지역에서 온 몇 사람들은 '벼'를 난생 처음 본다고 하면서 물에서 열매 맺는 수전 농사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다.
그들은 여태껏 밭작물(한전) 밖에는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손춘일 원장께서 조선족 사회가 중국에 미친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성과가 바로 수전 농사를 개척, 보급한 일이었고, 특히 이곳 연변과 길림을 중심으로 벼농사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동백미'라 하여 청나라 황실에만 독점적으로 공급했음을 설명 해 주었다.

나는 손 원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편 이런 생각에 잠겼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송화강의 발원이 되어 대지를 비옥케하는 생명수가 된 듯, 수전 농사를 통하여 이 땅에 새로운 생산성의 흐름을 개척한 한민족 이주민들이야말로 이 땅을 변화시킨,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 선구자들이지 않는가!
여기서 생산된 '동백미'가 청나라 황실을 먹이고 키우는 소재(素材)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중국을 움직이고 천하를 호령하도록 만들었다면, 이는 곧 자연과 역사를 하나의 필연적인 순환 구조속에서 일체화시킨 흐름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겠는가하는 엉뚱한(?) 생각마져 들었다.

이러한 엉뚱한 생각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미학으로 발전하여 시대사의 흐름을 주도한 사례가 적지 않음을 깨닫으면서 천천히 향도원(香稻園)을 떠났다.
예를 들면, 헤겔의 변증법과 '역사철학'이 그랬으며, 물질이 정신의 기초가 되어 생산성을 이끌어 냄으로서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이 권력의 기초가 되도록 길을 열어준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와같은 생각의 흐름을 통해 배태된 결실이 아니었던가!

그 열매가 우리를 더러는 행복의 식탁으로 데려가주기도 했고, 또한 더러는 불행과 고통의 밭으로 끌고 갈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자연과 역사의 교접을 통해 새로운 인류사회의 흐름을 발견하는 지혜를 터득해야만 할 것 같다.
이것이 흐름의 미학이 갖는 과제가 아니겠는가!


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

  백두산에서 돌아온 일행들을 위하여 연길시 근교에 있는 별장형 한정식 식당에 숙식이 마련되었다.
임대버스가 마을에 도착하것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
이 마을(小河龍)은 연길시를 관통해서 흘러온 부르하통하(河)와 용정 벌을 지나온 해란강이 만나서 구비 돌아가는 합수(合水)목 마을이다.
여기서 차량으로 5분정도만 더 올라가면 한국의 참빛그룹(眞光集団)에서 운영하고 있는 해란강 골프장(36홀)이 나오는데, 어제 밤에 묵었던 백두산 천상관광호텔도 이 회사의 소유다.

마을 어귀에 버스가 진입하자 나는 마이크를 잡고 멀리 마을 뒷산 언덕에 보이는 세 그루의 노송(老松)을 가리키며, 이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저 소나무들 때문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수령이 천년 넘는다고 해서 흔히 천년송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 소나무들은, 산기슭 한곳에 삼각형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는데다 그 모양과 크기가 우산형으로 똑같이 생긴 거목인지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고 한다.
나는 짖꿎은 생각이 들어서 일행들에게, 저녁 먹기 전까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다들 가서 세 그루 천년송을 껴안고 한번씩 소원을 빌어보라. 그러면 산신령이 도와서 소원성취케 해 줄지도 모르지 않겠냐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일행들이 버스에서 내려 한정식 식당으로 들어가자 주인 내외와 종업원들이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
주인 내외는 한국인들로서 이곳에 와서 생활한지 벌써 15년이나 되는 분들이다.
2층으로 지어진 이 집의 형태는 소나무 원목을 많이 사용해서 지은 황토집 한옥이었고, 기와지붕 위에 장독을 얹어 놓아 토속적이면서도 유니크한 맛을 물씬 풍겼다.

실내 복도와 거실의 벽은 황토로 마감되어 있고, 천장에는 묵화 그림들이 여러장 가지런히 발라져있으며, 노출된 소나무 서까래에 옥수수, 조, 조롱박들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주방이 넓고 깨끗하게 설비되어 있으며, 실내 한쪽 구석에는 한증막도 시설되어있다. 그리고 온돌 구조의 크고 작은 방들이 여러개 있어서, 단체 숙박이나 연수활동이 가능한 식당이었다.

이 한정식 식당을 소개받고 출입한지가 벌써 사오년이 지났다. 주인 내외는 독실한 크리스챤으로서, 연길 기독실업인회(CBMC) 회원이기도하다. 그래서 연변과기대 교수들과 회원들에게는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그리고 또한 감사한 일은 이 댁의 부군되시는 분이 화가여서, 실내 여러곳에 크고 작은 유화작품들을 전시해 놓았기 때문에, 이 집에만 오면 마치 화랑(갤러리)에 온 것 같아서 늘 기분이 좋았다.

민박회 일행들은 남자, 여자로 구분해서 큰방을 2개 공동사용하기로 했다.
내 방은 크기가 작지만 독방을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짐을 다 풀어 놓고나서 우리들은 저녁 식탁이 준비되기까지 약 30분정도 여유가 있어서 천년송이 있는 마을 뒷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나도 이 마을에 여러번 왔지만, 그때마다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지 소나무가 있는 동산에 직접 올라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판에 찍어낸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거의 비슷한 이 세 그루 노송의 자태는 내가 예상했던것 보다 휠씬 더 크고 우람차며, 아름다웠다.

일행들은 어둡기전에 또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다.
해가 뉘엿뉘엿지는 황혼을 바라보며, 내가 가르쳐준대로 천년송을 끌어안고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기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가 깔깔대며 노는 모습이 마치 개구쟁이 어린아이들 같다.

식당으로 돌아오자 이 집에서 가장 큰 방에 만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정식 메뉴로 차린 정결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하다. 술은 동동주 막걸리를 담아 놓았다고 해서 그걸로 우선 목을 추겼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기호에는 맞지 않아 평시대로 맥주와 고량주를 주로 마셨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음주를 하는 중간 중간에 본격적으로 노래와 춤판이 벌어졌다.

방안에 노래방 기기가 준비되어 있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고와 박사의 딸 애리가 디스코 춤으로 우리들을 마냥 즐겁게 해 주었다. 손수건을 돌려가면서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정서적으로 우리 한민족 마음에 가장 가깝게 와 닿고 심금을 울린 노래는 역시 몽골민요였다.

아래에 소개하는 노래는 몽골민족들이 즐겨 부르는 목가풍의 민요로서 그들의 삶의 원천인 초원을 노래하고 있다. 우런 박사와 진영충 박사가 함께 불러준 이 노래는, 그 가사 내용이 밝고 명랑한데 비해 음색은 듣는이로 하여금 한(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애절했다. 마치 잃어버린 역사의 슬픔을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마음에 찡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러한 느낌은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을까?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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