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자 A14면의 기사, "돈 들여 외국 학생 초청해 한국을 미워하게 만들어"를 읽으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먼 이국땅에서 공부하며 충분한 배려를 받지 못했다는 셀림씨의 사연은 안타까운 한편 무엇보다 당황스럽다. 그가 한국에 바라는 배려들, 한국의 대학이 그에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 것들이 나로선 동감하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들 역시 국제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많은 아쉬움을 느끼는 영어강의 역시 점차 그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나 유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무작정 영어강의를 늘릴 수는 없다. 한국의 학생들은 영어로 된 강의에 큰 학습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영어능력의 격차에 따라 영어로 강의하는 전공수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들 역시 강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오로지 유학생들의 편의만을 위해 영어강의를 늘리기에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미치는 폐해가 너무 크다.
무엇보다 한국 대학에 유학을 온 그가 한국어강의가 아닌 영어강의를 원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의아하다.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로 학문을 수학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한국 역시 열성적인 유학열을 가진 국가이며 영어권 국가들뿐 아니라 독일·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은 유학하는 나라의 모국어로 강의를 듣고 시험을 치른다.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그를 위해 학생과의 직원들과 교수마저 영어를 써주길 바라는 셀림씨의 바람은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물론 그가 제기한 요구 중에선 우리 대학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부분도 있다.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고려하지 않은 학교의 획일적인 식단은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실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셀림씨의 요구 역시 지나친 면이 적지 않다. 종교 간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는 학교의 입장으로선 유독 이슬람 기도실 공간만을 만드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고 카이스트 등의 다른 대학에서 해당 시설을 갖췄다는 점이 서울대의 배려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활용되기엔 부족하다. 게다가 이것은 유학생으로서 곤란한 점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라는 종교인이기에 겪는 불편이다.
셀림씨는 한국에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를 초청하고 먼 이역 땅에 불러온 입장에서 우리는 셀림씨를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배려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어를 쓰는 한국, 자신에게 익숙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을 그는 아직 포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배려와 포용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다시금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이다.
한국 대학들 역시 국제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많은 아쉬움을 느끼는 영어강의 역시 점차 그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나 유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무작정 영어강의를 늘릴 수는 없다. 한국의 학생들은 영어로 된 강의에 큰 학습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영어능력의 격차에 따라 영어로 강의하는 전공수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들 역시 강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오로지 유학생들의 편의만을 위해 영어강의를 늘리기에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미치는 폐해가 너무 크다.
무엇보다 한국 대학에 유학을 온 그가 한국어강의가 아닌 영어강의를 원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의아하다.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로 학문을 수학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한국 역시 열성적인 유학열을 가진 국가이며 영어권 국가들뿐 아니라 독일·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은 유학하는 나라의 모국어로 강의를 듣고 시험을 치른다.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그를 위해 학생과의 직원들과 교수마저 영어를 써주길 바라는 셀림씨의 바람은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물론 그가 제기한 요구 중에선 우리 대학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부분도 있다.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고려하지 않은 학교의 획일적인 식단은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실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셀림씨의 요구 역시 지나친 면이 적지 않다. 종교 간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는 학교의 입장으로선 유독 이슬람 기도실 공간만을 만드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고 카이스트 등의 다른 대학에서 해당 시설을 갖췄다는 점이 서울대의 배려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활용되기엔 부족하다. 게다가 이것은 유학생으로서 곤란한 점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라는 종교인이기에 겪는 불편이다.
셀림씨는 한국에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를 초청하고 먼 이역 땅에 불러온 입장에서 우리는 셀림씨를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배려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어를 쓰는 한국, 자신에게 익숙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을 그는 아직 포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배려와 포용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다시금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