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비가 유난히도 많이 오는 것 같다. 하늘을 뒤덮은 시꺼먼 구름이 머리위에서 몰려오고 몰려가는 것을 보면 무섭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추적추적 장난질 치다가 갑자기 하늘에 구멍 뚫린 듯 그대로 내리퍼붓기도 한다.
이런 장마철에는 식당에 손님들도 적어, 나는 그런대로 멍하니 비오는 풍경만 열심히 보고 있다. 통유리로 보이는 빗속 거리에는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처럼 각자 배역에 충실한 듯한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고 있다.
드디어 주연배우가 나타났다. 내 눈길과 발길은 어느새 한폭의 그림과 같은 모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서너댓살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애가 큰 우산을 쓰고 신발이 불편한 듯 다리를 살짝살짝 절며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다. 우산이 없는 엄마는 구질구질 내리는 빗속에 몸을 맡긴 채 지친 듯 말없이 앞에서 걷고만 있다.
엄마는 애를 안고 우산을 함께 쓰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애 손목을 쥐고 나란히 걸을 수도 있을 텐데, 혹은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잠깐 들러 신발을 벗고 비에 젖어 촉촉한 모래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며 까르르 즐거워하는 딸애의 모습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저 엄마는 뭐하는 분이실가? 몹시 바쁘신 분임에 틀림없어. 저 이쁜 애도 뒤돌아 볼 새 없이, 앞에서 자기 길만 걸어야 하시는 분,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나서 뒤돌아보면,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애는 웃음이 없고, 혼자 걸어 물집 잡힌 발을 아직도 절룩거리고 있을 테지.
어느새 빗방울은 커지면서 처절하게 창문을 두드리고 주르륵 주르륵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래, 불현듯 생각나서 뒤돌아보니, 내 딸애도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웃음이 없었다.
그때 나도 명색이 엄마였는데… 뽀얀 빗줄기속에서 방글방글 웃던 딸애의 모습이 금세 찌뿌둥한 하늘처럼 울상이 되어 내 마음을 비참하게 울린다.
중국 천진에 있을 때다.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후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고 자부하며 매일 자전거로 40분 달려 잡지사에 출근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퇴근길에 하혈이 되면서, 크게 놀라 잡지사 번역 일을 그만두었다. 다행히도 한약 몇 첩을 먹고 유산을 면한 후 임신 4개월째, 약간 불룩해진 배를 내밀고 잡지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8개월째 되던 어느 비오는 날, 전기 가마에 삶아 파는 강냉이를 사먹으려고 손가락을 대다가, 그만 전기가 온몸에 흐르고 말았다. 나는 한번 또 크게 놀라 잡지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부터 출산 전까지는 태교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이 하루 종일 책읽기만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 나는 만삭이 된 몸으로 홀로 시골 친정에 내려가 출산을 했고 한 달만에 핏덩어리 같은 딸애를 안고 20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천진으로 왔다.
젖먹이는 11개월 동안은 가정주부로 충실했지만, 젖을 떼자마자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애를 입주가정부에게 맡기고 다시 잡지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잡지사는 과장, 번역사들도 바뀌었고 분위기가 많이 변해있었다. 내가 번역을 하면, 과장님은 어린 번역사에게 검토의뢰를 맡기고 이곳저곳 맘대로 뜯어 고치군 했는데 마음이 무척 상했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10월 1일 국경절 휴가 때 갑자기 결정을 내리고, 1년 2개월이 되는 애를 둘쳐 업고 20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친정으로 향했다.
인정받는 번역사가 되리라, 번역의 정상을 오르리라!
애를 친정에 맡기고 바로 천진으로 돌아섰다. 지독하게도 눈물이 없었던 거로 기억된다. 엄마는 할 일이 많아, 꼭 해 낼 거야, 그러니 외할머니 집에 좀 있어다오.
훗날에 친정엄마가 알려준 말이지만, 내가 떠난 후, 딸애는 이틀이나 밤낮으로 너무 울기만 해서, 다시 데리러 오라고 전화 할까 말까 망설이셨다고 한다.
딸애 생각할 틈도 없이 번역 일에 몰두하다가 잡지사가 하루아침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문을 닫는 바람에 잡지사를 그만두고 대형 피아노 제조회사 품질과에 번역으로 입사했다. 한국본사에서 나온 교재들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책자를 만들고 직원들에게 배포해서 교육 시키며 번역 겸 강사로 일했다. 한 시간 강의를 위해 밤 늦게 까지 강의연습을 해야 했다. 과장님은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것은 무조건 나에게 감수 의뢰 했는데, 그때부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동료 두 명에게 왕따를 당했다. 잘못된 번역에 대해 너무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과장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으시댄 내 탓이었다. 나는 우울해지고 고민하면서, 처음으로 시골 친정에 버려진 딸애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얼마나 컸을까? 엄만 지금 넘 괴로워, 나는 여름 휴가 때 무작정 딸애를 보러 갔다. 딸애를 보면 힘이 나고 일할 의욕이 생길 것 같았다.
두 돐 생일을 금방 쉬고 난 딸애는, 젊은 여자만 보면 엄마라고 부르며 안기려 했다고 한다. 시골엔 젊은 여자가 거의 없었으니, 내가 버스에서 내려 팔을 내밀자 외할머니 품에서 벗어나 덥석 안겼다. 보송보송한 피부가 와닿는 순간, 내 딸아! 가슴이 뭉클해지고 찡해왔다.
이튿날 시장가는 삼륜차에 앉아서 이쁜 옷 사준다고 했더니 약간은 서먹한 듯 핼끔핼끔 나를 쳐다보면서 방글방글, 해쭉해쭉 좋아 어쩔줄 몰라하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아프게 젖어들고 있다.
시장에서 흥이 나 까불어지는 딸애를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딸애를 천진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남편은 두말없이 동의했다.
새벽기차로 떠나는 날, 3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어린 것이 어느새 깨어나 오똑하니 앉아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등에 업고 마을 어귀를 나서면서 외할머니한테 인사를 하라고 했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내 팔을 잡은 손에 힘만 더 줄 뿐이었다! 외할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그 어린 것은 다시는 엄마를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생각인 듯 했다. 그때가 두 살이었다.
잘해 주리라! 다시는 떨어져 있지 않으리라! 나는 울면서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월세 내고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우리는 두 살되는 딸애를 동네 할머니가 밥이나 먹여주고 봐주는 정도의 어린이집에 보냈다. 나는 직장 일에 바빴고, 퇴근 후에는 여러 번역회사의 일감을 받아서 늦게까지 완성하군 했다. 내 기억 속에는 딸애를 품에 안고 동화책 한번 읽어준 적 없었고 모든 부모들이 하듯이 의식적으로 유도대화를 하면서 이것저것 배워주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중국에 무서운 사스가 발생했던 2003년, 나는 야간학원을 다니면서 회계사자격증을 땄고 2002년 하반기에는 대학원 공부를 해서 버렸던 의학의 꿈을 다시 이루겠다고 악전고투하다가 경제난으로 포기했다. 딸애는 저녁마다 엄마를 기다리며 같이 자겠다고 칭얼대더니, 늦게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지금도 애를 먹는다.
자아개발과 성취를 위해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만 했으니, 딸애가 재롱을 피우는 것도, 우는 것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쫓기 듯하며, 간혹 뒤를 돌아보며 쉬려 해도 어느새 무엇에 떠밀리듯 또 뛰고 있었다. 남편과 딸애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고, 나 자신은 자부심과 보람을 갖고 살고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었다.
딸애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그마한 번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남편이 딸애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얼마나 지났을가, 전화기를 타고 터져 나오는 남편의 고함소리가 즐거운 번역세계를 훌떡 뒤집어놓았다. 딸애가 이름도 쓸 줄 모르고 간단한 계산문제도 할줄 몰라서 선생님들이 수군수군 하시더니 며칠 후 재시험을 봐야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미란게 여태껏 뭐 배워줬어? 니가 애한테 해준 게 뭐 있어?
그럼 당신은 맨 날 시간이 잔뜩 남아서 술만 마시고 뭐했어?
나도 울분이 쏟아져 남편과 전화로 크게 싸웠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우리 애가 이름자도 쓸 줄 모른다고?
속이 켕긴 나는 며칠 동안은 딸애에게 공부도 배워주고 했지만 역시 며칠가지 못했다. 침식을 잊고 나만의 번역세계로 완전히 빠져들었다.
번역회사를 시작해서부터 오다가 끊이지 않았다. 초기에는 번역료가 싸서 고객이 많았고, 그 후로는 번역 질을 인정받아서 찾는 고객이 많았다. 번역사들을 이끌고 밤낮이 없이 일했으니 딸애는 완전히 뒤전이었다. 방과시간이 되어오면, 머리나 대충 다듬고 정신없이 학교로 가는데, 줄을 서서 나오는 애들 사이로 보이는 담임선생님은 늘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찾고 있었다.
혹시 병음을 아세요? 혹시 수학문제 푸실 줄 알겠죠?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이런 질문까지 받아야 했었다. 화장할 시간도, 옷맵시에 신경 쓸 시간도 없었던 초라한 모습의 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면서 애를 가르칠 능력을 우려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치며, 잔뜩 스트레스에 쌓여 있었다. 매주 두 번씩 일기쓰기 숙제가 있는 날에는, 내가 일기를 써주고, 딸애보고 베끼라고 하는 식이였는데, 베끼는 것도 제대로 못해서 뒤통수를 얻어맞을 때가 많았다.
베끼는 것도 안 되냐? 이 바보야, 빨리 베끼고 누워 자!
남편과 딸애에게 어서 자라고 윽박지르며 잠재운 뒤,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커피 한잔에 은은한 음악을 틀어놓고 번역의 세계에서 마음 껏 노닐 군 했다.
딸애가 커가면서 남들이 하는 대로 주말 학원에 보내 영어, 무용, 웅변 등을 배우게 하였다. 학원에 데려가고 데려올 때는 빨리 걸으라고 호통을 치면서 앞에서 종종걸음을 하면 딸애는 뛰다시피 하면서 바지런히 따라와야 했다.
싱그러운 봄기운이 마음을 여는 어느 화창한 토요일, 급한 원고도 일단락 짓고 사무실 청소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딸애를 데리러 학원에 갔다. 그런데 학원에서 나오는 딸애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 있었다. 선생님이 옆 좌석에 앉은 여자애보고 공주같이 이쁘다고 했단다.
분명히 내가 더 이쁜데, 내보고는 공주같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면서 딸애는 울먹였다.
공주 같다고 하셨으니 진짜 공주는 아닌 거야, 진짜 공주는 우리 어여쁜 딸이야 하면서 딸애 기분을 풀어줄려고 노력했다.
우리 맥도날드에 햄버거 먹으러 가자, 엄마 오늘 시간 많어. 엄마가 너랑 놀아줄게.
그런데 두 세번 얼렸는데도 딸애 기분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고 그냥 공주니 뭐니 종알대면서 울먹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햄버거고 뭐고 없다, 집에나 가자, 엄마는 아직 바쁘단 말이야" 공포에 질려 우는 애를 개 끌듯 질질 끌고 씩씩거리며 집에 왔다. 그때가 7살이다.
아!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두려움에 떨던 딸애의 그 눈길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 눈길이 떠오를 적마다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크게 울고 만다. 분명 딸애도 그 좋아하는 햄버거를 먹지 못하고 집까지 끌려온 날을 잊지 못하리라!
훗날에 내가 한국에서 중국에 전화를 했더니 딸애가 당당하게 묻는 것이 아닌가!
엄마, 이전에 나 때리고 욕하고 막 그랬어, 엄마 잊지 않았겠지,
그 시절, 딸애는 심심찮게 엄마를 바꿔야 한다고 했고 남편은 쩍하면 아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우스운 말로 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니였다!
2007년 말, 무연고 방취제로 한국 올 기회가 있게 되었다. 나는 많이 망설였지만 남편은 잠간이나마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고 무작정 나를 끌었다.
한국행을 결정해서부터 떠나는 전날까지 나는 울고 울었다. 그래선지 정작 떠나는 날에는 눈물 한 방울도 없었다. 아침 8시 비행기라서 새벽부터 조용히 준비를 하는데, 깨우지도 않은 딸애는 역시 오똑하니 앉아서 우리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엄마 아빠, 몸 조심해야 되요. 돈 많이 벌어오고,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른처럼 대견스럽게 우리를 바라본다. 귀국할 때 사달라면서 종이에 큼직큼직하게 적어서 가방 안쪽주머니에 정성스레 넣는다. 개, 원숭이, 토끼, 살아있는 동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출입문 여는 소리가 나니깐, 화장실에서 소리친다.
좀 기다려요. 나 아직 작별인사 재대로 못했어.
화장실에서 뛰쳐나오더니 다시 한번 우리를 꼭 안아주며 등까지 다독여준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이다.
그렇게 중국을 떠나, 딸애 곁을 떠나 한국 온지, 벌써 1년 반이다. 삶의 현장에서 닥치는 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일하면서 육체는 힘들지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1년 반만 더 있으면 귀국할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는 딸애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또 맹세한다. 이번엔 꼭 지키리라! 귀엽게 커가는 모습 내 눈에, 내 마음에 듬뿍듬뿍 담아놓으리라!
내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가족과 함께 하리라! 딸애가 웃기 시작하고, 남편이 벙글벙글할 때 나는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행복해지리라.
내리던 비가 주춤한 듯싶더니, 여자애의 고사리 같은 손에 들려있는 이쁜 투명우산이 동심을 싣고 하느작거리며 금세 개어올 동쪽하늘로 날아가는 듯하다. 어느새 머리위에는 아름다운 쌍무지개가 환하게 웃으며 엄마와 딸애를 바라보고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딸애를 그리는 엄마의 아픈 마음을 열심히 읽고 있다.
내 딸아,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