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이동렬의 장편연재43]
상태바
낙화유수[이동렬의 장편연재43]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9.09.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

쉼터에 돌아온 나는 긴 잠을 잤다. 눈을 뜨니 숲에 저녁노을이 불타고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숲에, 환각속에 노을이 피빛같이 나붓겼었다.

노을을 밟는 구두가 있다. 바지가랭이가 처져 흐느적거린다. 속이 간지러워 구두를 잡아당겼다. 가운데가 툭 끊어져나갔다. 웬 녀인의 긴목이다. 머룽머룽한 눈과 기름한 얼굴의 목줄! 나는 소스라쳐 깨여났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나는 가끔 형과 형수님을 분리해 생각못한다. 형수네 아버님의 구두나 그녀의 긴목, 면양의 선한 눈이 진수형의 얼굴에서 얼른거렸다. 두 사람의 넋은 얽혀있으면서도 서로 떨어져나가려 애를 쓰고있다. 그런 느낌이 싫지만 어쩔수 없다.

당신이 다가와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꿈을 꿨나 보네, 악몽이야?󰡓

나는 꿈 얘기를 한다. 당신도 징그럽다고 한다.

우리는 가볍게 부여안고 키스를 했다. 짤막하게 두번, 길게 한번, 속에 불끈불끈 치받치던 정열은 사그라진것 같고 평화롭고 여유로운 마음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들듯, 당신에 대한 사랑이 어느덧 화로불같은 은근한 정감으로 변해갔었다.

나는 당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니 남편 알면 큰일나겠네, 아직도 널 좋아해서 어쩌지?󰡓

󰡒글쎄, 니도 와이프가 알면 어쩔건데?󰡓

우리는 소리내여 웃었다. 정말 큰일은 큰일이다.

오사까에서는 오래동안 소식이 없다. 나도 굳이 련계를 달지 않았다. 카드의 돈이 거의 바닥이 나고있다. 이렇게 노닥거리고만 있다니? 자기가 한심해보였다.

󰡒그 녀자 말이다. 보살님, 가보니까 주눅이 들더라.― 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그녀의 옷과 액세서리, 타고다니는 차, 그 녀자의 가게, 그 녀자의 기품…나는 뭐가 부족해서 그런 위축이 드는가 생각해보았다. 부자와 빈자간의 차이 때문만 아닐게다. 그 녀자밑에 있는 형과 선화, 그리고 형의 그림들까지, 아니 너까지도 보살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어보이더라. 교포란 자비심까지 포함해서, 난 내가 정말 헛산것 같더라.󰡓

󰡒그래? 휴, 처음에는 다 그렇게 생각할거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기도 하고…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참 힘들게 살아요, 열심히 뛰면서! 생각보다 부유계층이 썩 많은 편은 아니거든, 삶에 여유라곤 없다구…난 그래도 고향에서 너와 함께 생활했었던 때가 제일 좋았다. 그러니 자비감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얼마를 소유했느냐에 따라 행복지수가 오르내리는게 아니니까!󰡓

󰡒하지만 세속은 그렇지 않더라. 심지어 부부간이라도 내게 없으면 죄가 되고있는 현실이야. 넌 이젠 속이 편한 모양이구나, 서울에 왔으니 사는 보람 느낄게 아니냐?󰡓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보람 느낀다고 봐야지. 지금은 적어도 돈때문에 속 썩이는 일이 없고 나가 벌면 버는만큼 보람이 생기지. 혼자 먹고 쓰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쉬고 싶으면 쉬고 일하고 싶으면 하면 되니까.󰡓

󰡒뭐, 혼자?…너, 지금 혼자라 했냐, 혼자 있어?󰡓

나는 몸을 세차게 일으켰다. 당신의 두눈에 이름할수 없는 무늬가 일렁인다. 눈매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나고있다.

당신이 내 손등을 다독거렸다. 엉뚱한 말들을 주어섬겼다.

󰡒난 말이다, 좀 이상해졌다. 기억력이 없어졌어요. 복잡한 일은 못한다니까, 왜 이렇게 됐는지 몰라. 파출부로 나가 식당에서 일하면 그릇씻는 일만 찾아한다. 머리 쓸것 없이 그냥 하던 동작만 반복하면 되니까. 간혹 앞에 나서 손님들의 주문을 받게 되면 뭘 가져오라 했던지 금방 잊어버린다. 음식그릇을 들고가서도 어느 상에 놓아야할지 망서릴때가 있지 뭐냐? 이상해졌잖어? 뇌치졸증인가 해서 병원에 가서 검사해봤더니 아니래, 일종 망각증세래. 아마 속고생을 너무해서 그리된것 같아.󰡓

󰡒허, 무슨 일로?…󰡓

당신은 입술에 창백한 웃음을 베물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의미있게 눈을 껌벅이였다.

󰡒니때문에 그때 반 정신 나갔었지, 몇날며칠 굶고나니 환각상태에 빠지더라구…후에는 우리 아버지한테 또 혼쭐이 났구, 그놈 돈때문에 말이다. 자나깨나 돈, 돈…빚꾼들의 등살에 살수가 있어야지, 돈 말만 나오면 환장하겠더라구. 그래서 마지막 선택을 했지뭐야, 가짜결혼을 해서 서울땅 밟은거지!󰡓

󰡒가짜결혼이라니? 허, 정말 가짜였냐?󰡓

󰡒응, 고향에서는 다 진짜인줄 알거다. 가짜란 말 듣기 싫어 까닥 소문 안냈으니까. 치사하지? 얼마 준다니까 결혼해주더라. 솔직히 그 남자 나쁜사람은 아니였다. 장사하다 IMF때 망하자 살길이 없어 그랬데요, 그돈 갚느라 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후에 엄마와 동생을 초청해 와서야 돈이 좀 모이게 되더라.

그런데 그 남자 하루는 날 얼려서 엄마돈 천만원을 빼갔지뭐냐. 일년반동안 모은 돈인데, 중국장사 나가는데 물건해오면 인차 돌려주겠다더니 반년 일년이 지나도 수염 닦고 꿩 구워먹은 소식이더라. 그래서 말 꺼냈더니 똥뀐 놈 성낸다고 낯이 퍼러딩딩해 외려 날 나무람하지 않겠어, 주겠다는데 왜 자꾸 징징대느냐구? 마, 환장하겠더라, 어떻게 번돈인데? 엄마는 고만 속병앓고 드러누웠지, 아무래도 안되겠더라. 그래서 날마다 찾아가 울며불며 행악질했지. 내돈 내놓겠냐 안내놓겠냐, 사람 죽는 꼴을 보겠느냐 어쩌겠느냐? 꼬박 한달 붙어다니며 그러고나니까 그 남자만 보면 정신이 나들더라. 후후, 정신병자가 따로 없더라구, 물론 돈은 종내 받아냈었지. 그리고 휴유증도 남은거야.󰡓

󰡒허, 어찌 그런 일이?…그랬어요?󰡓

󰡒그런데 한가지 풀지 못할 수수께끼가 있다. 그 남자가 리혼수속을 하며(물론 가짜결혼이니 리혼도 형식이지.) 자가용을 사주고 여기 빌라도 나한테 넘겨주더라, 이상하잖어?…그리고 얼마 안있다가 사업하러 중국에 들어갔데요, 지금은 종무소식이고.󰡓

󰡒오…󰡓

나는 소설의 엉뚱한 결말을 읽고있는것 같았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당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 인생은 돈에 얽히고 속히워 이 모양이 되고말았다. 그래도 후회는 안한다. 지금은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제 나도 돈을 지배할수 있게 되였으니까, 작은 돈이라도 말이다. 난 지나친 욕심은 없다. 부족해도 만족하고있다…

그리고 인생의 여유를 갖고싶구나…여행도 하고 일본이랑 미국이랑 다녀오고싶다. 그곳에 가면 벌이가 좋으니 눌러앉아 몇년 벌고싶기도 하구…널 만나고 널 갖고나니 평생의 소원 다 푼것 같구나. 니 와이프한데는 미안한 일이지만…

후, 아까운 세월이 참 많이 흘러갔네요. 그래도 내 가슴에 울렁이는 사랑이 남아있다는게 너무 신기하구나. 날 잊지 않아 고맙구 날 사랑해줘서 감사하다. 고향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변치않는 친구하자, 영원한…괜찮겠어? 싫다고는 안하겠지?󰡓

󰡒물론…새삼스레…우린 친구야, 영원한…󰡓

나는 그녀를 가슴에 끄당겨 품었다. 머리를 매만지며 볼을 쓰다듬었다.

숨소리가 익고있다. 고향벌, 고향산, 고향강, 고향집, 그 흘러가버린 숨소리― 내눈에 은연중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흘리고싶다. 당신의 머리이며 어깨이며 목깃을 푹 적시고싶다. 유린되고 외곡되였던 나의 진실과 만나고싶다.

당신이 몸을 움칠했다. 나는 요지부동했다.

󰡒응?…니 울고있어, 지금?…왜 그래?󰡓

󰡒아니야, 그냥 그저…󰡓

󰡒그러지 마, 그러면 내 마음이 아프고 슬퍼지지 않냐?󰡓

󰡒알았어, 니 얘기를 듣고 감회가 사무쳐서 그런다. 이제는 운명의 그늘에서 벗어났잖구 뭐니? 잘살아요, 잘될거야.󰡓

나는 느닷없이 코소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도 조용히 따라불렀다. 우리 엄마의 십팔번지 락화류수, 였다.

󰡒기타가 있으면 좋겠네.󰡓

당신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도 대구(對句) 맞추었다.

󰡒달밤이면 좋겠네. 내 고향 포도넌출 우거진 뜨락이면 더 좋겠네.󰡓

󰡒킥, 참말 그랬으면?…오오, 참말 그랬으면 좋겠네.󰡓

이번에 우리는 오래오래 키스를 나누었다.

<다음에 이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