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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셋은 아침 네시에 일어났다. 인차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에서 덜깬 숲속에서 어둠은 채 사라지지 못했었다. 선화가 앞서고 복선녀가 뒤를, 내가 마지막을 따라섰다. 당신은 자주 돌아보았다. 이것저것 자꾸 주어섬겼다.
관악산은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학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으로 불리웠다. 관악산 정상에는 지상 레이다관측소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때 연주사와 원각사 두절을 지어 화환에 대처했다고 하는 정상의 원각사와 원주암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암자와 사찰이 있다고 한다.
나는 불교에 대한 연구가 없다. 사찰전각들인 대웅전이요, 비로전, 극락전, 미륵전, 관음전, 명부전 등을 설명하는데 귀전동냥을 보냈었다. 대웅(大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별명이란 말은 기억에 남았다. 우리 신앙의 보살들이 손에 들고있는 지물(持物)인 련꽃이나 여의주, 경책(經冊)들―, 이럴테면 련꽃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 밝은 지혜, 여의주는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불과 보살의 능력, 경책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108개의 염주는 인간의 108가지 번뇌가 끊어짐을 상징한다고 한다. 백팔번염주를 갖고 염불을 하게 되면 우리 중생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고통과 슬픔인 백팔번뇌를 모두 소멸하고 안락을 얻게 된다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워서 나는 실소했다.
나는 당신이 왼쪽손목에 율무염주를 차고있는것을 보았다. 27현성(賢聖)을 암시하는 염주라한다. 27현성이 뉘인가는 묻지 않았다.
내가 시큰둥한 표정 지으니 당신이 한마디 꼬집었다.
이봐요 작가선생님, 이런 말이 있거든.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무명(無明)이 더욱 커지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그릇된 사견(邪見)이 더욱 자라게 되고요, 또한 믿음은 앎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앎은 그 행과 지를 통해 지혜와 복덕을 원만하게 한데요. 불교에 대해 공부 좀 하는것도 작가수업에 도움이 되겠는데그래?
하긴, 성격이 그런걸 어떻게 해? 난 뭐든 건중반중이거든, 하지만 불교의 핵심은 공(空), 즉 마음을 비우데 있다는것은 잘알고있지!
그래요? 그럼 다 아네…불교에는 무색계,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란 말이 있거든, 거기에 든다는것은 색계에 대한 모든 상념을 끊고 무변의 허공에 들어간다는 뜻이지. 목표는 나와 우주의 합일, 절대적인 세계…
이때 앞서가던 선화가 돌아서서 킬킬거렸다.
언닌 저렇게 말해도 실지 뭔가뭔지 몰라요, 봤던것을 보고 또 보고 해서 조만큼이라도 통한것 같지만 입만 살았지 속은 아니거든, 오빠와 비슷해, 건중반중!…오, 갸여워라, 가슴에 얽힌 사사건건의 번뇌 어찌 끊어버리오? 호호호.
저눔 기집애, 너 무슨 말을 하고싶은데?
당신이 곧 주먹 쳐드는 행세를 하자 선화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엊저녁의 일이 떠올라서 나도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건중반중, 이도저도 아닌 당신도 보살님으로 거듭나려하다니? 그래도 신앙심이라도 갖는게 소중할것이다.
부처님의 산은 올라갈수록 가파로웠었다. 숲을 차츰 벗어나자 숲의 골격같은 산악이 그리 멀지 않은곳에서 벌거숭이 모습을 안개속에 어슴푸레 드러냈다. 어둠은 려명에 쫓기지 않으려는듯 안개속을 파고들며 모지름을 쓰고있다. 홀연 아침해살이 안개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산악의 입김처럼 흐르는 안개들이 요상히 나붓기며 서서히 흩어져갔다.
나는 천도끼할매의 말씀이 생각났다. 관악스님을 찾아 정성다해 불경드렸다 한다. 불전에 들어 백날 공양했고 얻어온 천개의 바늘을 천도끼를 만들어 차고다녔단다. 그래 점지된 씨앗이 또 내 생명의 근원이 된것이다!
나는 관악스님이 원각사인지 연주암의 스님인지 알길이 없다. 쉼터의 숲 또한 내 생명과 이상하게 연분이 닫아있는것 같았다. 물과 산이 닿아있듯 인연이면 끊지 못한다. 또 왜서 끊고살겠는가!?…
나는 어느덧 원각사에 다가온줄도 몰랐다.
나는 고색창연한 절이 맘에 들었다. 정성들여 불전에 이마대고 두손을 엎었다가 펼치며 올리드는 당신모습마저 창연해보였다. 바람이 어느귀에 달린지 모를 풍경 흔드는 소리가 목탁 두드리며 불경 외우는 중들의 념불에 섞이여 은은히 들려왔다. 숲이 청신한 미네랄을 뿜어내는 공기속에 아침해살이 불전에 서기 가득 채워오고있듯 싶다.
석가모니불전앞에 선화는 당신곁에 조용히 무릎 꿇고앉았다. 손목의 염주걸이를 빼내 만지며 아침발원문을 읊기 시작했다. 눈 지긋이 감고 입속으로 중얼거려갔다. 위불없는 보살님이였다.
온 누리 밝게 비추어 리익이 되게 하시며 한량없는 광명을 내리시는 부처님, 진여(眞如)의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법성(法性)의 바다 끝없이 넓고넓어 위없는 보리(菩提) 공덕 충만하오니 모든 중생의 국토가 기름져 저마다 서원(誓願)따라 얻어서 한길로 깨닳음따라 나아가게 하여 지이다.
이 아침 발원하오니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깨끗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겠나이다. 모두들 용서하는 자비의 마음으로 슬기로운 하루 아침 감사하고 기쁨의 하루가 되도록 살겠나이다…
부처님의 원력속에 우리 고향오빠와 함께 출발하는 이 아침은 기쁨과 광명의 아침입니다. 거룩한 부처님의 뜻에 따라 하루를 살아갈수 있게 하소서. 진수오빠와 경자씨도 병환을 떨쳐버리고 부디 복받게 하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도 곁에 앉아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채 당신의 발원문을 경청했다.
당신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마음에 경건함이 생겨났다.
됐어요.
당신이 나한테 존칭을 붙혀왔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진수형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진수형이 정말 올까?
글쎄…기다려보지요, 좀.
사찰에 청신한 향내가 각일각 짙어갔었다.
당신은 관세음보살전에 들어가 또 기도를 올렸다.
나와 선화는 다른 불전은 찾지 않고 돌다가 어느 구석에 있는 법당에 이르렀다. 법당앞 좁고 긴 꽃밭에 이름모를 산꽃들이 만발해있었다. 산신각(山神閣), 나는 은근히 놀랐다. 산신은 토속신앙에 속하는데 불교에 포섭되여있다니? 산신의 신체(神體)는 호상(虎像)이나 신선상같았다. 아버지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던 생각에 감회가 깊어갔다.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덧 별채에 다달았다.
스님들의 방이 여러채 나졌었다.
선화가 갑자기 이상한 눈길을 던져왔다. 마침 선들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기억속의 익숙한 냄새가 신경을 흥분시키고있다. 조바심이 든다. 뭔가 찾아내야 한다. 색채감이 묘하게 어울져 풍기는, 유화에서 발산하는 특이한 냄새였다.
선화가 조심스레 노크하고 문을 뗐다.
나도 무의식간에 뒤를 따라 들어갔다. 순간 페부 깊숙이 젖어드는 물감냄새에 코를 싸쥐였다. 별로 크지 않은 방에 꽉 채워진 갖자지 유화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이십여점은 잘 되였다. 채 그리지 못한 그림도 여러 폭 있었다. 이 방안에서 혼신을 태우고있는 넋이 화면들에 은은히 비껴있다.
벽 오른쪽 면을 거의 가리운 대형유화 한폭이 문득 내 시선을 끌었다.
우중충하고 흐릿하고 어수선한 색채감이 화면을 어둡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뭐가뭔지 알아볼수 없다. 그림들이 겹쳐지고 덧쌓이였는데 보는 이의 거리나 각도에 따라 내용물이 틀리였다. 그림속에 그림이 색채속에 색채가 형이상학적 무늬를 촘촘히 짜고있듯 했다.
진수형의 미완성작임이 틀림없었다.
먼저 부채를 든 풍신과 검을 든 우뢰신이 눈에 띄워왔다. 구름과 바람에 휩싸이여 모호해 보였다. 산을 배경으로 석가모니의 가슴에 불전이 솟아있고 오솔길아래 초가(草家)지붕들이 촘촘해있다. 가늘게 찢긴 번개빛이 흩어져있고 반달이 노를 젓고있다. 내물이 있고 야산이 있고 무덤이 있고 피카소의 그림인양 사람의 형체들이 중첩되고 어울어져있다. 산신령에게 제지내는, 곡괭이로 삽질하는, 벌거벗고 샤워하는, 알몸의 남녀가 변태로 어울진, 기타를 치는, 화판을 펼쳐든, 이루 헤아릴수 없는 남녀로소의 군체들―
나는 갑자기 머리끝이 쭈볏해났다. 거기에 은은히 비낀 은빛도끼가 눈에 밟혀왔던것이다. 번개의 빛은 우리 할매가 얻은 천개의 바늘같았다. 유화는 우리 족속, 우리 가문의 력사를 그렸잖은가? 내 기억의 무늬에 짜인 풍토, 육체, 영혼, 인간의 흥망성쇠, 소원이나 행복과 아픔들이 얼룩져 이루 형언할수 없는 감회를 불러왔었다.
나는 형의 육체보다 삶에 흔들려온 영혼이 떠올랐다. 그속의 불심(佛心)과 산신의 영적(靈的)인 서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있다. 우리 족속들의 빛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으나 솔직히 어떠한 신선도 그런 빛을 발산할수 없었다.
선화가 한숨을 내쉬였다. 나는 명상에서 깨여났다.
오빠의 유화는 어찌보면 갑갑하죠? 보다보다 나면 온몸이 안개나 비에 후줄근히 젖어드는것 같아요. 그러다가도 속에 개미떼가 기어다니듯 서물거려나지, 색채감이 우울하고 관능적이라서 그럴까? 오빤 정말 구제불능이야, 그게 바로 오빠이기도 하지만…
음, 그러니 여기에 머물러있냐, 형님이?
네, 그러는 편이지요.
그러는 편이라니?…
안녕하세요?…손님왔어요, 오빠…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누군가의 눈길이 덜미를 잡는것 같아 이상해나던 참인데, 웬 중년부인이 뜨락에 단정히 섰다가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나는 부인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풍채좋은 그녀의 얼굴은 둥글고 환했다. 보라빛운동복이 풍만하고 여유롭고 은근한 몸매를 곱게 감쌌다. 석류같이 희고 가쯘한 이가 너무 황홀했다. 웃을듯 웃어줄듯 입귀가 가만히 여유를 찾더니 종내는 환하게 웃어주었다.
저, 김진규씨죠? 진수씨의 동생되는 분이?…
네, 그런데 누구신지요?
나는 선화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손등을 입에 가져다댔다. .
아, 그제야 나는 문득 깨닳았다. 내가 찾으려 애쓴, 선화와 함께 진수형의 모든 비밀 갖고있는 신비한 서울녀자. 어쩜 나의 새형수님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덕목과 지혜가 얼굴에 부드럽게 씌여져있듯 싶다. 정인금씨라했지? 진수형의 보살님일것이다!
암튼 나는 멋대로 판단하고 생각을 굴렸다.
마침 복선녀, 당신이 찾아왔다. 보살님(나는 이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둘은 초면인듯 어쩜 나를 가운데에 두고 연극을 노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형님이 못오시나보네.― 보살님이 갑자기 큰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방안의 유화를 보셨지요? 제목이 뭔지 궁금하지 않으셔요?
글쎄요…
아직 이름은 달지 안했으나 듣고나면 참 묘하다 할겁니다…창세기, 창세랍니다.
뭐, 창세기? 아, 그렇군요…우리 가문의 창세기같은데요?
네, 바로 그겁니다…
당신도 합장하듯 가볍게 손벽을 치며 감탄했다.
글쎄, 너무 익숙하다 했더니 그런 그림이였구나!
나는 형의 행방을 물었다. 꼭 만나보아야 했다.
보살님이 난처한 기색을 짓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지죠. 제가 스케줄 잡아볼게요…참, 시장하시죠? 우리 집은 안양종합운동쪽이거든요. 산밑에 우리 보리밥집이 있습니다. 음식은 변변치 않아도 아침삼아 점심 드시고 가시죠?
나는 괜찮노라했다. 당신과 선화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다. .
그래요, 오빠, 우리 사장님이 한턱 쏜다는데 사양할게 뭔가요.
보살님이 미소를 짓자 당신은 고개 가만히 끄덕여보였다.
우리는 곧 산을 내렸다. 당신네가 앞서고 나와 선화가 뒤를 따랐다.
나는 부러 느직거리며 앞과 거리를 두었다. 형의 신상에 발생한 일을 알아야 한다. 보살님과 관계가 궁금해서 못견디겠다.
선화의 대답은 애매했다.
호, 나도 몰라. 어쨌든 둘의 관계 이상한데가 많아요, 애인 사인가 하면 아니구, 겉보기엔 진수오빠의 생활과 창작비용을 모두 저분이 대주니 오빠를 좋아한다고 봐야지요, 은인인셈이구! 처녀적부터 미술에 각별한 흥취가 있었데요, 특히 유화를 좋아했다나? 오빠의 유화에는 한국유화에서는 볼수 없는 어떤 혼이 깃들어있데요. 모르긴 몰라도 소같이 질긴, 말같이 질주하려는, 혼탁한 늪에서 용같이 불끈 솟구치려는 넋이 보인데요. 대가로 성장할 재목인데? 하고 아쉬워하더라구요.
그래, 나도 그점은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가슴이 아프다. 본인탓도 있지만…혹시 저분은 홀몸이냐?
오빤, 그런게 뭐가 중요해요? 바깥사장님이 계시는데뭐.
나는 속된 속을 내보인듯 멋적게 웃고말았다.
그런데 저분의 진짜 속셈을 전 잘 모르겠어요. 살뜰히 돌봐주는 대신 오빠의 그림을 독점하려는것인지, 단지 순수한 마음에서인지?…한국사람들은 보통 리득이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거던요. 그러니 오빠의 그림이 값어치 간단말이지! 앞으로 한폭에 천만원, 아니 몇천만원씩 뛸지 어찌 아는데? 피카소나 고갱같은 명가들의 그림도 그랬다잖아요?
야, 그건 너무 하다, 허허, 돌아버리겠네. 어떻게 그런 분들과 비겨? 내가 보기엔 아직도 습작수준이야, 그래라도 돌봐주는 분이 있기에 다행인줄 모르구? 쩟쩟.
그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석연치 않아요. 오빤 진수오빠를 너무 몰라, 진수오빠 그림을 전문가 판정이라도 받아봤어? 내 보기엔 그림들이 장차 엄청나게 값이 뛸것 같아. 그런데 오빤 자본주의 뭔지 몰라 큰일이라니까, 오빠나 내 머리 갖고는 안되요.
그래, 그럴수 있겠다. 그러면 좋겠다. 한푼치의 리득이 우리한테 돌아오지 않는다해도 형의 그림이 잘 팔리고 유명해지면 형도 산 보람이 날것이다.
나는 보살님한테 뭔가 따질 체면도 리유도 없었다. 물론 보살님이 좋은 혜안을 갖고있어 그림을 소장한다고해도 그건 보살님과 같은 부자만의 특권이다. 빈자는 영원히 그런 마음을 못먹는다.
나는 어깨죽지가 부러진듯 사지가 나른해났다.
선화가 흘낏 쳐다보고 동을 달았다.
지금 한창 준비중이거든, 유화전람을 하겠데요. 오빠의 그림이 꼭 유명세를 탈거야,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지라구.
나는 입에 비장을 지른채 묵묵히 발걸음을 채촉해갔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