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갑절로 보답한 중국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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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갑절로 보답한 중국의 은혜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9.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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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중국에선 중국조국을 위하여 수십년 투사가 되었다. 나의 지나간 중국 조국에 대한 충성을 수정관에 누워 계시는 모택동은 아시리라.

물론 "天大地大 不如黨的恩情大"이지만 중국동포들은 중국 = 공산당에 입은 은혜를 몇 갑절로 보답했다. 오늘에 와서 고국사랑을 배은망덕이라 마시라.

(1). 중국에서 미개척지를 옥답으로 만들어 왕서방들에게 거의 내 주었다.

(2). 중국 = 공산당은 중국동포들과 우리의 고국에 감사 드려야 할 것이다. 맨손으로 18년 벌어보낸 "천문학적"인 달러를 받았으니깐.

(3). 새중국의 발전에 헤아릴수도 없는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4). 내가 모주석, 공산당, 중국조국을 열애하고 충성한 행위는 북한의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이 울고가라 할 정도였다.

나의 아버지는 50년대 중공당원이었다. 용정시의 전신인 연길현 량식국 재회고 고장으로 애어린 자식들이 죽어나가도 매수 한 번 하지 않고 밤에도 돈 보따리만 안고 다니며 혁명했단다. 나의 어머니는 강철창의 돌격대 반장으로 18시간 중노동을 하셨다.

나의 다섯 형제자매 중 나만 빼고 가정꾸린 사람들까지 모두 청년때 중공에 입당했고 조선족이란 이름 하나만을 부여받고 중국조국을 위한 투사로 되어 수십년을 혁명했다. 하긴 나도 오랜 적극분자였다. 이 정도면 중국=공산당의 감사를 받아야지 않겠는가?!

부모는 나한테 물어 보지도 않고 나를 출생시켰을 뿐 공산당이 나를 키웠다. 어려서 부터 온갖 정치운동과 대약진으로 굶어 죽지는 않지만 용변이 어려운 대식품, 옥수수겨가루, 등 잡곡만을 거의 30년 먹었다.

초등학교때 학교언니들에게 이끌려 책은 들어도 못보고 투쟁대회만 참가했고, 혁명하느라 불길 속에서 목숨 내걸고 휘발유병과 돌멩이를 날랐다. 우리 집은 용정의 싸움 복판에 있어서 집 꼭대기를 혁명전사들이 고지로 쓰다나니 기와장들이 모두 돌멩이 대신 날아갔다. 물론 중공에 손 내밀지 않고 스스로 다시 얹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바쁘게 어록만 읽었고, 해마다 이불짐을 꿍져 메고 농촌에 가서 공산당에 무보수로 벼모내기, 평정산 기음매기, 가을걷이, 묘목장 등 일을 하였다.

혁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몽땅 농촌에 가서 지구를 수리하였다. 천하에 우리처럼 힘들게 농사 일한 사람이 없음을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 옥수수밥 지어 먹고, (쌀이 없어서 3일 연속 감자만 먹은 적도 있다.) 농사짓는 한편, 대채전을 만드느라 밤 9시까지 쉼없이 검은 옥토로 제방을 쌓아서는 이듬해에 "호랑이"가 새끼를 치게 만들었다. 이듬해엔 유기질이 전혀 없는 빨간 흙에 씨앗을 심고, 수확 못해서 분홍도 못하고.....공산당의 말만 죽어라고 들었다. 아니면 투쟁대상이 되니깐!

일년 365일중, 춘철 = 구정에 4일만 휴식했다. 원단 = 신정에도 開門紅 하느라 손바닥과 몸이 찡찡 저려나게 언 땅에 곡괭이를 휘둘렀다. 특대홍수가 할퀴고 간 자갈밭과 한전을 수전으로 만들었다. 생리때도 두메산골 뼈속까지 파고드는 찬물에 뛰어 들어가서 풍담이 나도록 온종일 벼모를 꽂았다. 공산당에 징구량을 바치고 나면 가난한 산골이라 최고공수를 벌어도 일년 수입이 20원 밖에 되지 않았다.

1975년 일제 때처럼 조선족학교를 한족학교로 만들어 놓았다. 조선족들이 하루한시 중국인이 되다보니 학생들도, 선생들도 고생깨나 했다. 얼마후에 다시 고쳐졌지만. 지금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서 무엇을 챙기지만 그때는 선생이 오히려 가난한 학생들을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

그후 시내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감독시스템이 없고, 기술, 관리, 마케팅이 따라가지 않으니 공산당원 공장장이 두 세번만 바뀌면 어느 공장이나 거의 거덜이 날 때여서 어렵게 지냈다.

내가 한 때 근무하던 공장은 만 명이 일했고, 수 십년 동안 많이 일하고, 적게 받아서 공장이 5년 문을 닫아도 직공들의 밥은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성공했지만 도시에서 실패한 개혁개방으로 공장장이 두 세번 바뀔 때마다 최고급 새집에 들고, 새파란 태자님들을 정국급에 올려 놓고 저들의 잔치만을 하더니 결국 월급은 몇 달씩 밀렸고 후엔 아주 개인 사업자 왕서방에게 넘겨 버렸다.

(물론 비리로 총살당하는 사람들도 나는 전혀 질책하지 않는다. 그것이 죄많은 사람의 본질이니깐. 단 3권이 분립이 되지 않고, 견제할 시스템이 없는 체재에 대해선 불만 투성이이다. 중국에서, 두번 가본 북한에서 독점과 독재의 페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일당제 찬양이 중국사랑이 아님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중국 저주가 아님을 정중히 밝힌다.)

밀리기까지 하는 쥐꼬리만한 월급에 살 수 없기도 하지만 중공의 은혜를 갚으려고(농담) 친정에 돌아와 종살이 하면서 중국=공산당=조국에 있을 때보다 몇배 되는 가치를 무릎 꿇고, 두 손 받들어 공손히 상납한다.

우리들은 중국정부에서 주는 우혜정책 細粮을 주정부의 지시대로 반납했고, 우리 때부터 90%이상이 애 하나밖에 낳지 않았다. 중공조국을 위하여 ㅎㅎ

88년 전까지 내가 안 것은 깡통찬 남한 어린이와 피로 맺은 나라 북한, 중국=조국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하루세끼 식사때마다 옥수수밥 내지 옥수수떡을 차려 놓고는 온 식구가 서서 모주석어록을 가슴에 받쳐 들고 먼저 請示했다. 아버지가 "衛大的領袖毛主席, 萬壽無疆!" 하면 다 함께"萬壽無疆!", 림부주석께도 청시하고 밥 먹었다.

용정역 앞에 우리 손으로 모주석상을 만들고는 밤새 목이 빠지게 최신지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맨날 충성무를 추었다. 오른 발로 힘차게 땅을 구르고, 왼 발은 살짝살짝 밟고, 두 팔은 오른쪽으로 모아 펴서 열손가락이 하늘을 찌르는 자세, 등등 경애하는 모주석이 나오고 공산당이 나오면 무조건 춤을 추었다. 이러다가 길에서 "충성무 곡이 나오면 어떻게 충성무를 추면서 길을 갈가?! " 하고 근심그럽게 수근대기도 했다. 다행히 길에서 추라는 지시는 없었다.

농촌간부들이 혁명하러 용정에 와서 용정빈관에 빈 방이 없을 때였다. 밤이면 빈관문을 뚜드려 열고는 그 분들이 피곤해 하건말건 시끄러워 하던 말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공산당을 위하여 쌰띵줴신과 훙떵지를 불렀고 충성무를 추었다.

그 실력은 지금도 여전하여 郭蘭英의 나의 조국, 문혁때 노래는 오늘도 씩씩하게 부를 수 있다. 고국분들이여 절대로 뭐라 마시라. 우리들은 십여년 그렇게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며 살았으니깐 관성으로만 보시라!

초록색 군복에 뻘건 홍소병, 홍위병 완장을 띠고, 군모를 쓰고 나무장총을 메고 학교로 가서는 맨날 앞발로 殺, 뒷발로 殺(싸)하고 훈련했다. 맨날 미제와 쏘련 수정주의가 쳐들어 온다고... 용정고중안에 방공굴, 방공호를 팠다.

중국조국을 보위하기 위하여 왕복 수십리 되는 약수터 위의 산에 가서 방공굴에 필요한 낙엽송을 한 대, 혹은 두 대를 각반으로 매 끌어 내렸다. 오는 길에 떵떵 언 옥수수떡을 갉아 먹으면서. 해란강에 홍수가 져서 용정 복판에 있는 집까지 잠긴다고 밤을 새기도 했다. 중국조국을 위하여 많은 대가도 치렀다.

84년 장춘에서 2개월 연수할때 중국 배구팀의 5연승을 같은 방의 4명 한족처녀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환호했고,铁鎯头 朗平 밖에 몰랐다. 我的中國心을 제일로 애창했다. 한국 입국전까지 나는 중국인이었다. 민족교육 한 글자도 못 받았으니깐 환경동물인 인간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건 당연지사이다.

82년 부터 避暑山庄, 북경, 흑룡강성, 료녕성의 큰도시를 다니면서 감탄 연발에만 그쳤다. 그러나 북한,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애틋한지 나도 모르겠다. 88년 올림픽때도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애국가는 한국에 와서 한 달도 안되어서 4절까지 암송했다.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마다 목이 메어 부를 수 없다. 고국분들을 보면 무덤덤한데 나만....

죽을 지언정 "나는 반도인이다. 중국인이 아니다" 고 우겨도 고국의 눈에 비친 나는 엄연한 "중국인"임을 알기에 나서 자라고 사랑했던 중국의 위상에 손상주지 않으려고 안깐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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