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에는 그녀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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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에는 그녀들이 없다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9.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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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의 핏방울이 섞인 그네들은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와 간도란 미개척지를 옥답으로 개간했다.  다시 도진 방랑벽으로 그들이 빠져버린 터전을 왕서방님들은 몇 배로 메웠다. 항거할 수 없는 潮流로.)

  ▲ 용정기원지 우물
영화, 계화, 춘화, 진화와 나의 부모님들은 모두 어렸을 때 한반도에서 건너와 자라났고, 결혼해서 50년대 중반에 우리들을 낳았다. 아버지 혼자 7~8명의 생계를 맡으셨고, 당시의 거의 모든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네 어머니 (나의 엄마 빼고)모두 평생 전업주부로 사셨다.

용정시립병원 옆골목에서 20여년간 이웃으로 살았던 우리 여자동갑내기는 다섯 명뿐, 모두 신안소학교를 다녔다.  4~5학년 부터 시작된 문혁으로 교문은 닫혔고, 모주석의 최신지시를 기다리고 외우는 것이 전부여서 모여들어 맨날 놀기만 했다. 모두가 양 같이 순하고 착했고, 정도 각별했다.

특무로 몰릴까 겁나하는 선생님에게까지 쫓아가서 일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공부 욕심이 있었지만 명색뿐인 "고중"을 마치고 뿔뿔히 농촌에 쫓겨갔고, 애들끼리 모여 살면서 농사짓는 집체호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6~7년후 모두 다시 시내로 되돌아 와서 취직했다.

1. 이영화(가명)

영화의 아버지는 용정화력발전소의 직공이셨고, 2남3녀를 두었다. 인형처럼 이쁘고 생글생글 웃을 때마다 양볼에 작은 보조개가 패는 영화는 우리들의 지혜주머니였고, 야무지고, 올(조숙)됐다.

16세가 넘도록 철저히 페쇄된 환경속에서 읽을 책도 없고, 학교, 가정, 사회의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기에 우리의 두뇌는 태어난 그 모양 그대로 였다. 모두들 집에 자매들 뿐이거나 작은 남동생 뿐이고, 학교도 여자반이어서 남자구경은 못하지만 그 어느날엔가 그 누구를 좋아하다 짝사랑이라도 해서 큰 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는 큰 근심을 안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머리로 임신하는 줄 알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느 날, 어두운 전등불빛 아래에서 영화는 "마음속으로 사랑하기만 해도 애를 가질 수 있는게 아니다." 면서 어렴풋한 설명으로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설 쇠러 집체호에서 용정으로 돌아 온 우리는 일년만에 모여 앉았다. 연애 한번이라도 해서 찍히면 영영 농촌이란 흙구덩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기에 남자 = 지옥으로 우리 넷은 여겼다. 그러나 길림 지구로 간 그 녀는 같은 집체호의 남자친구(연상)가 떠준 예쁜 무늬의 털실 옷을 입고, 활짝 핀 복사꽃이 되어 남친 자랑을 늘여 놓았다. 우리의 눈은 화등잔이 되었다.

25세 되던해 길림 화학공장에 취직했고 얼마 후, 직장의 화재로 火魔에 떠밀려 3충에서 떨어진 그녀는 결국 평생 처녀로, 하반신 마비로 남의 시중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게 되었다. 같은 길림시에 있었던 진화의 말에 의하면 30년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포동포동한 그 모양이더란다. 전화선을 타고온 목소리도 그젯날의 소녀시절 그대로 앳된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호, 왜서 신은 그 녀를 비너스로 빚어 놓고는 수십년을 제일 잔혹한 형벌로 괴롭히는지?!

2. 이계화

계화의 아버지는 신망있는 중학교 선생님이 셨고 2남 3녀를 두었다. 백설공주처럼 희고 이쁘게 생긴 그녀는 공부도 잘했기에 우리반 부반장이었다. 딱친구였던 그애는 용정1중, 나는 용정2중으로 갈라진 후에도, 둘이 과년한 처녀로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시간만 있으면 붙어 다녔다.

손부리가 야무지고 알뜰한 그 녀는 코바늘뜨개 등으로 혼수준비를 마쳤고, 신랑감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게으른 나에게 방석 등 알록달록 예쁘게 여러가지로 뜨개질한 것을 나눠 주기도 했다.

어느날 그녀의 남동생이 문득 집으로 찾아 왔다. "누나가 죽었소..... 어젯밤에 수면제를 먹고.... 내일 장례를 하오..." 다리 힘이 풀리면서 주저 앉고만 싶었다. 식구들과의 불화를 아는지라 절대 자살이 아니라고 고함치고 싶었다.

뒷문을 나서면 계화네 집이 보였고, 앞문을 나서면 진화네 집이 보였다. 진화에게 알리고 함께 가보기로 했는데 진화의 어머니가 말렸다. "새가들이 그렇게 죽은 처녀장례에 가면 안돼!" 모두들 반대하여서 결국은 장례식에 못갔다.

그때로부터 오가는 출퇴근길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눈물이 그칠새 없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한 달이 넘어가도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충고로 그 녀와 찍은 모든 사진과 그녀가 나에게 준 모든 물건들을 가위로 잘게잘게 짜르면서, 공동변소에 버리면서 "썩 물러가라!" 고 욕을 퍼부었다. 신기하게도 눈믈은 거짓말처럼 금방 말라 버렸다.

꿈도 많고, 깔깔 잘도 웃고, 그렇게도 행복한 가정생활을 동경하였건만 너울 한 번 못쓰고 요절했으니......

끼끗한 재목은 먼저 베어가고(죽고) 구부렁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하늘 나라에서 제발 행복하게 살거라!

3. 김진화

  ▲ 용정의 일송정
진화의 어머니는 충청도 출생, 아버지는 서울출생인 요리사셨다. 한때는 길림성의 추천으로 인민대회당에서 한식을 하셨는데 2남 3녀를 두셨다.

진화네가 우리넷과 다른 점은 "닦는다"를 "훔친다"고 했고, 즐겨 김치를 보글보글 끓여 드시는 것 뿐이었다. 동네에서 어른들은 서로를 북선사람, 남선사람이라 불렀다. 북도치, 남도치란 말은 들은 기억이 없다. 한 동네에 중국집이 한 두집만 있어서인지 우리와는 전혀 다른 思維와 방식으로 살아도 민족간의 갈등은 없었다.

남과북을 고향으로 둔 사람과 중국사람들 사이에 사소한 일로 다퉈도 언제 그랬냐 싶게 금방 화해하군 했다. 할일이 태산같은 오늘에 같은 단군의 후손들끼리 쪽에 쪽을 캐는데 왜서 이렇게도 이골이 나 있고 목숨을 거는지, 나는 죽여도 모른다.

진화는 우리 넷중, 오리무리에 든 수탉처럼 쭉쭉빵빵 잘도 빠졌고, 생김새는 위그르계처럼 어글어글한 쌍겹눈, 높은 코, 도톰한 입술을 소유하고 있었다. 총명해서 공부도 잘했고 용정2중 문예 선전대의 골간으로 안무도 했다.

아마 문혁이 없었으면 공무원이 아니래도 안무가는 되지 않았을가 싶다. 우린 서로의 집체호를 찾아가 보기도 했고 농촌에서 올라와 출근하면서 휴일엔 붙어 살다시피 하면서 작은 용정시내가 좁다고 활보했다.

진화는 친척의 소개로 길림시에서 간부로 있는 (연변사람)총각과 만나 결혼 후 길림백화점에 조동되어 갔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북경의 중점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마카오에서 근무하고 있다.

진화는 오늘도 남편과 3형제자매들과 함께 수년째 한국에서 일하면서 마대로 돈을 끌어 담고 있다.

4, 허춘화

춘화의 아버지는 솜틀공장의 부기원이셨는데 2남 4녀를 두셨다. 단정한 오관, 커다란 쌍겹눈,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착하고 말수 적은 애였다. 눈만 떨어지면 우리네보다 집도, 마당도 큰 그의 집에 가서 놀았고, 쩍하면 기찻길 건너 솜틀공장에 가서도 놀았다. 농촌에서 올라와 도문에서 직장생활을 하였고, 같은 직장동료와 결혼했단다.

아주 오래전, 거리에서 인자하신 춘화의 어머니와 만나서 안부를 물으니 "둘째애를 낳다 칠성판에 오를번 했단다(죽다 살아나다)." 고 말씀하셨다. 용정에서 몇차례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모두들 그 녀의 소식은 모른다. 아마 어데선가 잘 살고 있겠지! 마음에 항상 그리고 있는데 언젠가는 만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 . 나

나의 아버지는 량식국에서 근무하셨고. 1남 4녀를 두셨다. 당시 량식국은 현정부(일본총영사관)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단층집에 있었는데 바로 앞이 영사관의 취조실이었다. 동생과 나에겐 그 주위가 놀이터였다.

우리 다섯 친구중 유일한 못난 새끼오리인데다 내성적이고 말재간이 없는 나는 제일 메케(멍청=바보)했다. 어릴적부터 아무 욕심도 없고, 무슨 생각도 없었다.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비술나무에 오르고, 돌차개 하고, 홍군백군을 따라했던 기억밖에 없다.

우리년대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배우자를 자기타입에 맞는 사람으로 찾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나처럼 똑똑하지도, 사리에도 밝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처럼 노실=부실한 사람한테 마음이 끌리던 시대였다.

과년한 나이로 다 큰 두 여동생과 부모님의 눈치가 보여서 외지총각과 결혼한다더라고 해서 딸 하나를 낳았다. 딸은 수년째 선전=심천에서 살고, 나는 이렇게 한국에서 강산이 변하도록 살고 있다.

연변동포들의 90%가 독생자녀이다. 중국인과 달리 왕자, 공주로 키우고 과잉보호를 해야기에 밑지는 장사라 둘 낳을 엄두를 못낸다. 그 하나마저 키워 놓으면 세상이 좁다고 모두들 중국내륙이나 외국에 나갔다. 나의 모든 조카들과, 동창생들의 절대 다수 자녀들은 용정에 없다. 우리들이 연변에 가서 뭘 좀 해 볼려해도 인력이 없다.

우리와 우리들이 빠져나간 기름진 자리를 중국 각지에서 온 왕서방, 계획생육(1자녀)을 피해 연변에 숱하게 밀려온 왕서방님들로 몇 배로 채워졌다. 호적에 올리지 못해도 뼈만 자라면 상등 노동력이 된다. 연길, 용정의 슈퍼마켓 등의 經商은 그들의 대가족과 한화로 매우 흥성하고 있다.

우리가 떠나도 다행히 그네들이 있기에 옥토는 여전히 오곡으로 설레이고 있고, 이름난 연변의 황소들은 살찌고 있다. 연길에 있는 나의 집도 수년째 중국인이 세들어 있고, 월세돈은 한 조선족에 기부금으로 쓰이고 있다.

남북통일을 대비하여 연변의 동포들은 땅만은 지킬지어다. 통일하기 전까지 오지인 연변을 고집하기 보담 모두들 중국내륙으로, 세계로 뻗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180만의 중국동포들은 불루오션인 중국에서의 귀한 인적자원이고 메드인 코리아의 홍보대사이다. 한국의 국익을 위하여 한국에 오래 거주한 중국동포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하여 한국과의 끈을 놓아 한족으로 동화되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하며, 그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민주화 의식을 키워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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