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國(발해,통일신라)시대의 시작
고구려유민 대조영, 발해 건국(699년)
<P>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뒤, 그 광대한 영토는 한동안 혼란기를 맞았다.</P>고구려유민 대조영, 발해 건국(699년)
<P>676년 당은 신라에 밀려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긴 다음,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운동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을 요동도독으로 삼고 유민 2만 8천여 호를 이주시켰다. 그러나 681년 보장왕은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 부흥을 꾀했다는 이유로 유배당하고, 그후 당은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무순)으로 옮겼다가 폐지했다.</P>
<P>그 무렵 요동지방의 조양(朝陽)(영주營州)에서 거란인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다. 696년의 일이다. 이진충은 반란을 일으킨 후 곧 죽었지만 그 휘하 군사들은 북경을 포위했다. 고종 대신 실권을 쥐고있던 측천무후는 30만 군사를 동원, 1년 만에 간신히 반란을 진압했다.</P>
<P>이진충의 근거지 조양에는 거란인, 말갈인, 고구려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BR>특히 고구려인의 대다수는 고구려 멸망 때 당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말갈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고구려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은 무리를 이끌고 조양을 탈출했다. 측천무후는 장군 이해고(李楷固)를 파견, 이들을 추격했다.</P>
<P>당군은 먼저 말갈인들을 격파하여 지도자 걸사비우를 죽인 다음 이어 고구려인들과 격전을 벌였다. 양군은 집안(輯安) 북방 천문령(天文嶺)에서 맞닥뜨렸다. 이때 고구려인들과 살아남은 말갈인들을 이끈 인물이 바로 대걸걸중상의 아들 조영(祚榮)이다. 대걸걸중상은 이미 병사한 후였다. </P>
<P>대조영은 ‘용맹하고 용병을 잘하여’ 무리가 그를 따랐다고 한다. 당군은 이 싸움에서 대패했으며, 적장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빠져나가 도망쳤다.</P>
<P>그후 대조영은 무리를 이끌고 고국의 옛땅으로 들어가 동모산(東牟山)(길림성 돈화 부근)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진국(震國)이라 했다. 698년의 일이다.</P>
<P>진국은 사방 5천리를 아우르고 인구 십여만 호, 병사가 수만 명이었으며 남으로 신라, 북으로 이하(泥河), 동으로 바다, 서로 거란과 맞닿았다. 이로써 대동강~원산만 이남에는 신라가, 옛 고구려 영토에는 진국이 각각 들어서 명실공히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P>
<P>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실인즉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그 북쪽 광활한 만주땅에 자리잡은 발해까지가 우리 민족사의 영역이었던 것이다.</P>
<P>한편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운동이 거세어질 것에 대비,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요동으로 보내 소고구려국을 세우게 했다. 소고구려국은 진국의 성장을 막고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기 위한 천당적 정권으로, 독자적인 독립국가였다고 할 수 없다.<BR>동모산 일대에서 시작된 진국은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와 송화강 유역, 한반도 동북부,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손에 넣고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P>
<P>당은 어쩔 수 없이 사신을 보내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했다. 이는 진국의 세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때부터 진국은 ‘발해’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발해인들은 자신을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일본과 주고받은 국서를 보면, 발해왕이 스스로를 ‘고(구)려국왕’이라 하고 있다.</P>
<P>719년 대조영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고왕(高王). 뒤를 이어 태자 대무예(大武藝)가 왕위에 올라 무왕(武王)이 되었다. 732년 무왕은 장군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당의 산동반도 등주(登州)를 공격케 했다. 당은 신라를 움직여 발해를 공격했지만 추위와 폭설로 신라군의 반 이상이 얼어죽고 말았다.</P>
<P>당은 신라와 발해의 대립을 조장했다. 중국이 이민족에게 흔히 사용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었다. 처음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 신라는 대조영을 진골에 해당하는 대아찬 벼슬에 봉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발해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자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견제, 대립하게끔 되었다. 이에 맞서 발해는 돌궐, 일본과 화친을 맺었다.</P>
<P>발해의 전성기는 제10대 선왕 (818~830) 때이다. 최대의 판도를 이루고 5경 15부 62주를 설치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당시의 발해를 두고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新唐書)>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했다.</P>
<P>발해의 주민은 고구려인과 말갈족이었다.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으며, 두만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철을 개발,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다.</P>
<P>당시 산동반도 청주에는 발해관이 설치되어 무역창구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재구성한 발해의 문화가 찬란히 꽃핀 시기도 선왕 때이다. 발해의 수도 상경(上京)은 만주지역 문화의 중심지였고, 발해의 문화는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P>
<P>907년 세계적인 대제국을 자랑하던 당이 무너지고 중국대륙은 한동안 분열기를 맞았다. 그 틈을 타 몽고 동부의 초원지대에서는 거란이 급성장했다. 지도자 예리아포치(耶律阿保機)는 916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거란이라 한 다음 동쪽으로 세력을 뻗쳐 발해를 위협해왔다.</P>
<P>그러나 발해의 지배층은 권력투쟁에만 몰두,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나머지 926년 거란이 수도를 포위하자 3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229년에 걸친 발해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예리아포치는 발해를 동단국(東丹國)이라 고쳐 자신의 맏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고구려계의 발해 유민 가운데 상당수는 고려로 넘어갔다.</P>
<P>발해가 거란의 손에 무너진 뒤, 고려와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지 못했다. 발해의 역사와 그 문화유산은 계승되지 못했으며, 발해의 땅 만주 역시 우리 역사무대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P>
<P>한동안 발해는 잊혀져 있었다. 그런데 1784년 조선 후기 실학자 중의 한 사람인 유득공(柳得恭)이 그의 저서 <발해고(渤海考)>에서 발해사의 의미를 이렇게 시원히 밝혀 놓았다.</P>
<P>“고려가 발해사를 수(修)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던 까닭을 알 만하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고구려)가 망한 뒤, 김씨(통일신라)는 그 남(南)을 유(有)하고, 대씨(발해)는 북(北)을 유하여 발해라 하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의당 남북국사를 유해야 할 것이나, 고려가 이를 수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무릇 대씨란 어떤 사람인가. 곧 고구려의 망인(亡人)이다. 그들이 소유했던 땅은 어디인가. 곧 고구려의 땅이다.”</P>
<P>우리 역사 교과서가 발해를 민족사의 일부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이 끼친 해독이 청산되지 못한 때문이었다. </P>
<P>발해에 대한 국내의 역사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구당서><신당서> 등 중국 측 기록과 <속일본기> 등 일본 측 기록에 단편적 자료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BR>최근 중국과 합동으로 발해 유적발굴이 이루어졌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제대로 되찾으려면 중국, 북한, 러시아와의 공동연구가 꼭 필요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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