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이동렬 장편소설 연재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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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유수(이동렬 장편소설 연재 33)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9.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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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나는 넌출들에 주렁진 포도송이를 보았다. 검붉은빛을 띤 송이에 잎새 사이로 곱게 새여든 달빛이 환영처럼 연연히 비껴있다. 고향, 그녀네집 뜨락의 포도넌출이 떠올랐다. 그 아래에 앉아 복선녀는 책을 보고 기타를 치고 소일을 했다. 그녀는 자기 피부색에 맞춰 흰옷을 즐겨입었다. 흰옷, 흰그림자, 흰달빛, 흰웃음, 희고도 길게 이어지는 키스신, 기억은 가끔 희뿌옇다. 때론 X광사진같이 떠오른다. 그속에 움직이고 얼키고 숭얼거리는 그림자가 있다. 본능같고 생명의 원초같은, 그녀와 내가 이 세상을 찾아오게 한 고향을 잊을수 없다. 그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착각을 한다. 이 밤과 이 뜨락, 달빛과 포도넌출, 술과 그대 복선녀, 나는 어차피 어리석은 놈인지 모른다. 내 갈비뼈 밑으로 피가 흐른다. 엿같이 진뜩진뜩한 선홍색의 혈장(血漿)이, 로출은 삼가해야한다.

나는 애써 흥분기를 가라앉혔다.

󰡒아까 보니 벽에 기타가 걸려있더구나. 소리 한번 진하게 듣고싶다.󰡓

󰡒나에게 남은 고향의 유일한 재산이다. 서울에 와서 한번도 쳐보지 않았어, 주로 그 사람이 치고있다. 우리 남편, 프로라면 꽤 프로야. 난 칠줄 모른다고 능청을 떤다. 웬지 치고싶지 않더라…무슨 곡을 칠까, 너두 이젠 배웠지?󰡓

당신은 벗겨온 기타를 내밀며 미소했다.

나는 줄이 손끝에 닫자 본능적으로 한곡을 쳐나갔다.

󰡒무슨 곡이냐?󰡓

󰡒선구자의 노래, 일명 용정의 노래라고도 하지.󰡓

󰡒아, 그래? 박대통령이 즐겨 불렀다는?󰡓

󰡒그건 모르겠다. 자, 니가 한번 해봐라. 락화류수, 듣긴 쉬워도 정작 치자니 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르겠더구나, 자꾸 틀린다.󰡓

󰡒그럴게다, 노래를 듣고 심란해서 어쩌자구?󰡓

당신은 기타를 타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흘러간 선률이 바다너머 아득히 이상한 기류를 타고 회선해오고있었다. 락화야 류수야, 나의 꽃은 어디에 가 떨어졌고 또 락화는 류수에 실려 지금 쯤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연주를 맞치자 당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옛날생각이 난다. 니네 엄만 목소리 참 고왔지, 잘 계시지?󰡓

󰡒그럼, 얼마나 정정하다구. 가슴에 항상 그 남자 사진 품고지내신다.󰡓

󰡒그 남자라니? 오, 전장에서 죽었다는 약혼남, 그 군인?󰡓

󰡒그래, 바로 그 군인, 아직도 그 사람 산소에 다닌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생각이 안나느냐, 아버지한테 미안하지 안느냐고 물었지. 허, 뭐라한줄 아냐? 난 니 아버지한테 할건 다했다. 안해로서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사랑했던건 아니다. 우린 부부란 이름으로 같이 살았을뿐이다. 너네 아버지한테도 사랑했던 녀자가 있고 나한테도 사랑했던 남자가 있으니 누가 누구한테 빚진건 없다. 내 생애에 사랑은 아마 한번이면 족한가 보다. 니네 아버지나 나나 다 그런 사람인것 같다. 이 사진을 보면 난 아직두 약혼시절의 새기(처녀)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금시 새파랗게 물들고 두근거려진다. 이건 내가 무덤까지 갖고갈 사진이다…마, 그러지 않겠어? 대단도 하시지?󰡓

󰡒사랑이란 진정 그래야하는것인지 모르겠구나. 엉간히 부럽다!󰡓

󰡒부럽긴? 하긴 나두…그렇지, 좀?󰡓

󰡒그래, 그래서 난 니네 엄마가 밉다가도 존경이 간다. 난 그런 녀자 못되니까. 정말 무서운 분이야. 그에 비하면 우리 마음은 공작새나 숫닭의 깃털같지, 아무리 아름다운 깃털을 가졌다고해도 바람만은 감당못해요. 그래서 난 니한테 항상 미안했었다. 이 기회를 빌어 정말로 사과할께, 용서할거냐?󰡓

󰡒글쎄, 생각 좀 해보구, 용서 안하면? 허허, 이미 이렇게 찾아왔잖냐?󰡓

󰡒그래, 용서해라. 서울에서 살다보면 용서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살아왔다고해도 이곳의 빠른 절주와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자면 혼자서는 안되지. 서로 믿고 어우러지고 힘을 빌려줘야 살기 쉬워지지!󰡓

눈을 빛내던 당신이 내 이마에 눈도장 박아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왜 묻지 않지, 아까 진수오빠 본 얘기를? 서울녀자와 동행한 사람, 또 누구겠니? 니두 너무 잘알고있는 녀자더라.󰡓

󰡒녀자?…누구? 유진씨?…󰡓

󰡒아니, 니가 좋아했던 녀자? 난 다 알고있다…󰡓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좋아했던 녀자라니?

󰡒호, 내 사촌동생 선화더라. 온다 어쩐다 까닥 낌새도 없이 건너와서 저리같이 묻어다닐줄 누가 알겠냐? 못된 기집애, 대채 무슨 꿍꿍인지 속을 알수 있어야지? 진수오빠는 몸이 안좋아보이더라. 다들 꼭 잡았어야 했는데, 슈퍼에 들어갔다 금방 나오더라구. 글쎄, 신호등도 채 바뀌여 지지 않았는데 차를 출발시키지 않겠어? 그래 이것저것 고려없이 무작정 따라 붙었지.󰡓

차는 서울녀자가 몰았다. 치머리를 했고 흰티에 흰바지를 입고 목에 연분홍 솔을 걸쳤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얼굴은 모나보였다. 행동이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고 배운녀라 짐작되였다. 그에 반해 복선화는 출국전에 보았던 입성 그대로였다. 연한 분홍색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 터프하게 파마를 했었다. 좀 뜬 풍치였다. 사내의 차림새는 초라했다. 나들이 옷인지 작업복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회색 블라우스라는 편이 옳았다. 마른 몸매가 솔 너른 옷에 가리워져 후줄근해보였다. 더부룩한 머리를 깎지 않는 리유가 궁금해났다. 반쪽얼굴에 오후 네시, 느긋하다 할수 없는 해빛이 너울거렸다. 각이 지고 꽛꽛하고 랭철한 표정의 여광이 빛속에 흩어져 갔고 자조하듯 흐물거리는 여음이 빛결을 타고 가슴에 맞쳐왔었다. 소시적 오래전에 보고 겪어왔던 그만의 이미지였다.

은회색의 승용차가 출발했다. 따라붙기 쉽지 않았다. 서울역, 영등포, 구로, 대림을 거쳐 미끄럽게 빠져나갔다. 자신이 물살을 타는 빙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 반짝이는 표적을 따라갔는데 어디쯤에서 외려 자기가 표적이 되버린것 같은, 빙어는 그래서 자기가 어디로 뭘하러 가는지 몰랐다. 먹이는 없었다. 흐르는 물살을 타고 노닐며 심심해져있을뿐, 눈에 보이고 스치는것들은 빛속에서 노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유하고있었다. 빙어는 문득 다른것의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역시 작고 반짝이는, 그놈한테 자기 그림자와 냄새가 있다고 판단한것, 따라가면 자기 실체나 영문을 알수 있으리라…

당신은 조만에 들어보지 못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서울에 와서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했거든. 내가 낯선환경과 낯모를 사람들속에 있어야할 리유같은것, 건데 리유는 생각 안나고 본능만이 감지되고 빛나더라. 그게 옳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또 틀린것도 아니더라. 좀 헷갈리지?…이곳에 와서 나는 별의별 교포들을 다 봤다. 서울은 그들한테는 법이나 도덕, 주위 친지나 친구들의 규제와 감시, 억제의 눈총이 전혀 없는 맹지나 다를바 없지, 물속의 빙어같이 자유로운 곳이구. 그래도 욕구를 해소하고 욕망을 충족시켜야 자유가 체현되겠지. 그래서 말인데 이곳에 나와 몇년씩 있게 된 사람들한테는 뭔가 새로운 관념들이 자리잡게 되나보다. 우선 돈벌이만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란것을 깨닫게 되지! 한 일년쯤 정신없이 벌어 빚을 갚고 이삼년째쯤 벌어 주택을 마련하고 삼사년쯤 벌어 여유가 생기고 나면 숨이 나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지. 누구는 허리가 굽어졌고 머리 희어졌고 이빨이 빠지고 얼굴에 주름투성이가 되어 팍팍 늙어버렸고, 누군가는 병들어 기신거리고 누군가는 병들고 사고를 당해 이미 저 세상에 가버렸고, 무심결에 돌아보니 세월은 기막히게 빨리 흘러가버렸지 뭐냐? 그러니 다들 조급하고 당황하고 허망하고 무서워지지 않을수 있겠어? 그러니 서로 어울어지기를 원하는거라구. 혼자는 너무 힘들고 고독한 세상이니까, 곧 빙어가 되는거지, 본능의 빙어갉󰡓

󰡒그래, 그렇겠구나…󰡓

󰡒난 갑자기 그들을 추적하는 자기가 우서워지더라. 빙어가 빙어를 따라가면 뭐가 있겠냐? 흠, 그냥 빙어를 볼뿐이겠지. 내가 낯을 익힌 사람과 내 사이에 엉켜있던 과거의 분위기나 냄새 같은것, 빙어의 의식은 아마 니가 말하던 무슨 본연에로의 귀환인지 모르겠다. 그 뒤를 따르며 난 그냥 추억에 빠지고싶었던가봐…호, 나 참 헷갈리게 놀지? 왜 이런지 모르겠어. 자신감이 없어지구 귀찮아지구 뭘 자꾸 잊어버리구…쉬는 날 문을 나서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가방만 들고 쇼핑하러 다닙네 하구…그러다가도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가고 묻게 되지. 내가 누구일까? 왜 여기와서 이러고 있지? 하고 말이다…󰡓

당신의 사고는 분산되고 흩어져있고 말도 많아졌었다. 수학적인 사고방식보다 사이비나 아마추어적인 철리와 형상적인 사고에 신경이 움직이고있었다. 나를 몰린 그녀의 세월이 왕창 흘러가버린것일까?

󰡒이상해할것 없다. 나도 그럴때 많은데뭐.󰡓

󰡒그래? 우리 나이 벌써 그렇게 먹었는가, 어쩌지?󰡓

󰡒상심할것 없지, 넌 아직두 예전의 너같구나뭐, 별로 변하지 않았어요. 그래 진수형과 선화를 만나긴 만나보았냐?…어디에 집 잡고 있던데?󰡓

󰡒이 정신보지? 호호, 관악산아래까지 따라갔다.󰡓

󰡒뭐, 관악산까지? 그래서?󰡓

나는 할매와 천도끼생각이 은연중 떠올랐다. 관악산부처님을 찾았다고 했으니까. 관악산과 우리 가문은 닫는 끈이 있어보였다.

당신이 손사래질을 했었다.

󰡒아이, 신경나게 관악산아래 보리밥집을 찾아가지 않겠냐? 산마을 보리밥집이 있더라구. 보리밥에 산나물무침 같은 반찬 대여섯 가지가 전부인데 손님들이 한정없이 밀려들더라. 기 딱 막혀서…보리밥집은 관악산 등산로와 닿아있더구나. 한 서너시간 쯤 등산을 하다보면 절벽이 나지는데 벼랑가에 절이 있다나? 보리밥집은 삼면이 산에 포근히 에워싸이고 북쪽만 개활지로 터이었는데 틀림없는 명당자리더라. 벼집으로 이영을 하고 한쪽켠에 물레방아를 설치해 돌리구 메돌을 쌓아 탑이나 담장을 만들고 장승을 조각해 세워놓고 대문곁에 놓아둔 큰항아리에 물고기를 길러 애들이 드나들면서 장난을 치게 하고 쌍기둥에 나란히 생화바구니를 걸어놓고…니형은 정문 맞은켠 단풍나무아래에 앉았있더구나.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는 모습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더라. 다리 쉼을 할까? 나는 차안에서 나오지 않고 가만히 관찰했다. 곁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구 니형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더라. 시종 바보같이 한 자세를 하고, 자신이 이곳에 온 리유를 몰라 굳어진듯 답답하고 측은해 보이더라. 옛날의 니형 생각이 나지 안겠어? 눈알이 팽팽 돌고 사람을 놀리듯 입가에 늘 조소를 머금군 했었지. 난 내눈이 잘못 되였는지 니형한테 문제가 생겼는지 의심이 들더라…산이 높으니 해가 인차 질것 같더라. 그제야 정문에서 선화가 나오더라. 걔가 뭐라고 하자 니형은 곧 선화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더라.󰡓

󰡒별일이네. 자, 물이나 마시구…󰡓

나는 당신이 숨을 돌렸으면 했다.

당신이 정문을 들어가보니 보리밥집구조가 특이했었다. 초가가 미음자(ㅁ) 모양 지어졌는데 가운데의 작은 뜨락에는 유별나게 큰가마를 구멍내 뻬치가를 쌓고 독으로 굴뚝을 올렸고 곁에는 장식삼아 쓰도록 만들어놓은 등대가 있는데 누런 물주전자와 밤색 질그릇들이 즐비하게 쌓여져있었다. 처음 보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이런 집과 물건들을 써온것 같은, 소박하고 눈시고 정신이 황홀해났다. 누군가 훔쳐보는것 같아 돌아보니 그런 손님은 결코 없었다.

당신은 끼웃거렸다. 누군가 불시에 마주쳤는데 보니 예쁜 아가씨였다. 보리밥집댁의 따님일까? 홀연 그녀가 전생의 자기같이 생각되였다. 전생에서 자기가 살던 곳이 이곳인지 내가 지금 전생에 살고있는지 분별이 안갔었다.

뒤뜰은 엷은 돌조각으로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 곱게 담장을 쌓았다. 감나무가 마춤한 곳에 이쁘게 우거져있고 단풍이나 오갈피들이 구석을 록빛으로 가득 채우고있었다. 굵은 통나무를 켜서 만든 의자와 상이 가운데 공간들을 차지하고 사이사이 갓쓴 둥근등이 벌써 벌겋게 밝아있다. 선화는 보이지 않고 진수형만 홀로 상 하나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당신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전혀 낯선 사람같았다. 눈을 가슴츠레 뜨고 당신을 노려보고있잖는가!

󰡒어머, 진수오빠, 오래간만이네, 반가워요…왜 여기에 와 있지요?󰡓

당신은 입안이 바싹 말라왔었다.

󰡒응, 널 기다리고있다.󰡓

󰡒뭐, 저를요?󰡓

󰡒그래, 글쎄, 니가 자꾸 따라오니까 신경 안나겠냐?󰡓

󰡒오빠…󰡓

무릎에 맥이 빠진 당신은 걸상에 주저앉고말았다.

󰡒오빠두 왜 이래? 섭섭하네, 나 복선녀 못알아봐요? 마치 낯선 사람 대하듯 하네…오빠가 너무 소식없구 선화 저 기집애두 오면 온다 말도 없이 저리 쫓아다니니 궁금하지 않겠어? 오늘 진규씨가 오기에 마중나가야 하는데 도중 이렇게 빵구났잖구뭐야? 왜 소식 끊구 살아요? 누군 로또복권 잡구 횡재했다면서? 혹 친구들이 떼먹을가봐 꽁꽁 숨는것 아니지?…아이, 보긴? 호호, 내 말이 심했나?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했다. 당신답지 않게 화작이 나가는게 이상했다.

󰡒걔는 왜 온다구그래? 병신같은 자식!󰡓

형이 괜히 성을 냈다. 묻는 말에 대답 안하고 눈살 꼿꼿히 세운채 당신을 노려보았다. 약간 노르무레한 빛을 띤 눈알이 벌겋게 충혈되여있다. 처진 눈두덩의 피부는 느슨해져있고 쪼프린 눈귀에 잔주름이 가득 맺혀있었다. 코는 날카롭게 빚어졌고 이마는 더 좁아보였다. 짧게 깍은 머리는 반백에 가까웠었다. 옛날의 카리스마적 풍도는 가뭇없이 사라졌고 우습꽝스런 얼굴이 광대상이였다. 당신은 갑자기 신들리게 웃고싶어졌다. 소리내여 보리밥집을 왕창 흔들고싶어졌다.

당신은 눈을 흘겼다. 입을 막고 겨우 간질을 참아냈었다.

󰡒이상하네, 대한민국이 뭐 오빠네집이라도 되는가? 오빤 올수 있구 진규씨는 못온다는 까닭이 뭔데? 것두 유명단체에서 초청하건데 왜 이리 야단이지?󰡓

짐짓 시뿌둥해서 쏘아붙혔다. 이게 아닌데, 이러자구 따라온게 아닌데? 당신은 자기가 이상해졌는지 그가 잘못된건지 생각이 돌지 않았다.

󰡒그래요? 흥, 유명단체? 지밀헐, 유명단체이면 뭐해?…그눔은 낯에 체면을 분딱지처럼 게바르고 다니는 놈이야, 녀편네가 오사까에서 벌어온 돈으로 살놈은 아니지. 문학을 하자해도 수중에 돈이 있어야겠지? 책을 내려구 해도 그렇구 친구 만나 술먹자 해도 그렇지, 그러니 그놈은 일정이 끝나면 틀림없이 남모르는 구석을 찾아 숨을거야. 아닌척 몰래 작업복 갈아입고 나서겠지! 축축하구 더러운 작업복에 안전모를 쓰고 허리를 굽석거리며 온 얼굴에 아첨하는 빛 가득 게바르겠지! 네, 네, 하구 허둥지둥 헤덤비겠지. 빨랑거려, 교포들은 저래서 못쓴다니까. 어쩌구저쩌구 매일 욕살이나 처먹어도 찍소리 못하고 똥줄을 싸겠지! 흐흐, 미친짓이야, 다 미친짓이라구!…그놈은 그러다 다칠수도 있구 병들어 죽을수도 있구 잘란 돈버는 재미에 오년이구 십년이구 이 바닥에서 굽석거리면서 뒹굴수도 있지! 세월이 흘러 어느날 거리에 나가보면 어떤 낯익은 녀석이 술에 취해 비칠거리고있는 꼴을 보게 될거야. 아마 구석을 못찾아 쩔쩔 매다 아무데나 대고 오줌을 질질 갈기겠지! 세월은 그놈을 바로 그런 꼴로 만들어버리겠지! 흐흐, 병신같은 놈, 제 주제에 문학이 뭔지 알구 덤벼요? 가난과 선비정신이 없이 지놈이 개떡같이 문학을 어떻게 한다구? 흐흐흐.󰡓

󰡒오빠…󰡓

󰡒오빠구 나발이구 난 그놈이 싫으니까 니두 자꾸 따라다니지 말거라. 대체 나한테 바랄게 뭐냐 엉? 돈? 보다시피 난 거러지이다. 옷도 변변치 못입구 남한테 빌어먹고있다. 로또 당첨인지 뭔지는 하느님이 알 일이구…그럼 나한테 정을 달라냐? 혹시 인정이나 미련이 남아있는게냐? 흐흐, 환장하것네. 인정은 언녕 국말아먹었구 미련은 쌈싸먹었으니께 남은건 쥐뿔도 없다. 내 눈에 넌 그저 스치는 풍경이다. 돌같구 나무같구 아파트같구 여늬 사람들같은…우리가 옛날에 알았으면 알았지 무슨 상관이냐? 너나 내나 우린 어차피 죽겠지, 어느날에는…글쎄, 무슨 소용이 있냐, 그게 말이다. 흐흐흐.󰡓

어디선가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몸이 추워나고 오싹거려났다. 오갈피의 무성한 잎이 당신을 빨아당기듯 유혹한다. 그밑에 파고들어가 앉고싶다. 그러면 별을 볼수 있으리라. 당신은 그한데 마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주술을 외워 마술 걸어온것 같았다. 어서 자리 뜨고싶다. 이젠 죽어도 찾고싶지 않다. 설혹 만난다해도 못본척 돌아설것이다. 돌, 나무라니?…흐흐, 그래요, 그래, 난 언녕 목석이 되였지! 그 말이 어디 틀리는가? 하긴 오빠도 랭담하고 자조적인 허무주의자로 변했군그려! 나보다 오히려 오빠가 더 불쌍해보입니다. 당신은 입가에 가까스로 연한 웃음을 게발랐다. 그의 딱딱한 인겁을 벗겨보고싶었다. 능글맞고 센스 넘치던 그는 대체 어디에 갔을까?…

화제를 바꿔야 한다.

󰡒오빠, 선화는요?󰡓

그는 너무 재미있다. 못들은척 곁눈도 주지 않는다. 꽛꽛이 쳐들린 턱에 작은 수염들이 지저분하다. 빳빳히 신경 세우고 귀찮아하는 모양새, 입귀이며 코망울을 실룩거리다가 눈을 감는다. 당신은 X광선을 빌어 그의 명상을 살펴본다. 그의 말과 생각은 일치성을 상실하고있다. 분멸없는 말은 허파에서, 생각은 심장에서 맥을 이루고있었다.

당신은 목이 잠겨 명치부위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성깔 더러운 그가 서울에서 여적 어떻게 배겨냈을까, 궁금해났다.

나는 형의 말에 어떤 진실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표현을 적라라히 드러내는, 하긴 난 참말 그런 놈일수도 있었다. 체면을 분가루같이 바르고 공사장에 나가 굽석거리는, 그때가 되면 한푼이라도 귀해지겠지, 주린 배를 달래야할테니까.

나는 약간 근심스런 표정으로 당신을 보았다.

형과 당신, 둘 다 이상한데가 있다.

당신은 나의 의혹스런 눈길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꼭지를 떼갔다.

󰡒그때 누군가 나를 툭 치지 않겠어요?― 언니, 왜 여기까지 따라와 못살게 굴어? 하고 큰소리치는 애가 있기에 돌아보니 선화기집애더라구. 입이 딱 벌어지더라. 뭐, 내가 따라와 못살게 군다? 어쩌면 둘이 꼭 빼닮은 꼴일까? 이상 바이러스에 전염된건 아닐까?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나더라. 선화가 곡주잔을 탕 놓아서야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호.󰡓

󰡒곡주잔?󰡓

󰡒그래, 손에 쟁반까지 받쳐들고 왔더라. 작은 놋주전자에 골똑 담은 막걸리이며 안주하라고 싱싱한 김치에 파전에 돈까스까지 장만해서…자주색바지에 녹색 블라우스를 입고있지 않겠어? 그건 보리밥집 홀 쇼핑을 뛰는 녀자들의 입성이 분명했다.󰡓

󰡒아하, 그러니 거기에 취직했군그래.󰡓

󰡒그랬어, 너무 신경나더라. 내가 지한테 잘못한게 뭔데 련락도 하지 않고 저러냐싶어 눈물이 쏟아질것 같았어. 내 기분이 굳든 어쩌든 상관없이 기집애는 상을 차리는거야. 언닌 참 이상해, 미행하는게 그리 재미있어? 때가 되면 어련히 찾지 않을려구? 기왕 왔으니 곡주나 한잔 하고 가요, 하는데 내가 먹을수 있겠냐?󰡓

당신은 손가락을 모아 불편해진 입을 막았다. 포도나무잎 사이를 가만히 헤치고나온 달빛에 얼굴에 그림자무늬가 일렁인다, 바람기에 바래진듯 묘한 환각 비슷이 그려진다. 누구한테도 보이지 않았던 당신의 아픔이 내 가슴결에 맞혀왔다. 안아주고 어루만져주고 싶다. 눈물을 딱아주고 눈확에 따뜻히 고인것 키스로 무마해주고 싶다. 번뇌의 며리결을 쓰다듬고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촉촉히 젖은 너의 속살을 찾고싶다. 그리하여 물새우는 옛밤으로 아득히 돌아가고싶구나. 아아,

나는 당신을 끄당겨 가슴에 품었다.

󰡒왜 이래, 우리 남편한테 혼나자구? 나 괜찮다.󰡓

󰡒딴 생각말어, 나한테두 와이프가 있다 마,󰡓

󰡒정말 이런것 물어봐도 괜찮겠어?…와이프 사랑해? 옛날 우리처럼, 독한 술처럼 진하게 사랑하냐구?󰡓

󰡒글쎄, 우린 사랑을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연필로 쓰고있다할까? 사랑을 연필로 쓰세요, 했잖어? 쓰다 틀리면 지우고 다시 쓰게 말이다. 사람따라 사랑의 방식도 틀려지지. 난 와이프를 사랑하고있다. 지금까진, 적어도 그렇게 믿고있다…󰡓

󰡒넌 사랑을 마치 어떤 관념으로 생각하구나. 먼저도 느낌이고 두번째도 느낌이야. 느낌이 없이 사랑한다는 말이 무섭게 들린다. 스스로 옭가미를 만들고있잖느냐?…언제부터 그랬어? 연변녀자들은 다 그런거야, 연필로 쓰다니? 번거롭고 복잡하네.󰡓

󰡒어디 연변 녀자들 탓이냐? 솔직히 이 나이에 연필로 쓰는 사랑이 힘이 들지만 서로 적응하도록 노력해야지. 감수해야할 아픔도 많고, 그래서 더 소중해지는거구.󰡓

󰡒글쎄, 난 모르겠다. 결국 단순한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두 복잡해졌구나. 내가 생각이 모자란 탓이고 사회에 적응못한 탓일까, 맘이 먼저 늙어버린것일까?󰡓

󰡒그래, 니 맘이 늙었구나뭐.󰡓

󰡒아아, 모르겠다. 난 나이 먹는것 너무 무섭다. 잠을 자다가도 그런 생각이 불시에 들때가 있지. 그래 일어나 뭐에 끌린듯 홀로 밖을 나가 쏘다니기도 한다. 몽유병환자처럼, 별이나 달을 바라보며 왕창 흘러가버린 시간을 되새긴다. 난 나 같기두 아닌것 같기두 하다. 뭐가 그리 겁나느냐? 물어보기도 하지. 자신이 유령같기도 하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야. 그래서 네거리에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싶을때도 가끔 있다. 난 살아있노라구,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도록 말이다! 집사람이 아무리 잘해줘도 세월의 한기를 막을수 없더구나. 바다 건너 이곳에 흘러와 몇년 살지 않은것 같은데 벌써 쉰에 가까워오다니? 마, 이젠 내 생애에서 좋은 세월은 다 흘러가버린것 같구나. 이말 들으면 다들 이러겠지? 뭐, 고까짓 나이 먹고그래, 륙십이 청춘이란데! 호, 그럼 이삼십대는 뭐냐? 그러니 다들 나이 먹을수록 자길 속이면 살고있는가봐, 어차피 인생은 속이며 속으며 산다고 하잖어?󰡓

당신은 나를 가만히 밀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애를 가져보지 못했기에 남보다 허탈감이 더 생기리라. 애 둘 갖고있는 남자와의 결혼이 결코 쉽지 않았을것이다. 시집에서 아무리 잘 대해줘도 자기 애가 없고보면 마음 한구석은 비어있게 된다. 그에 엉킨 내용물을 나는 보는것 같았다.

나는 기타를 집어들었다. 어느 시인의 시에 나름대로 곡을 붙혀갔다.

당신은 팔짱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서리를 쏟고있었다.

―오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은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아아,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은 다 젖으면서 피였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녀가 뒤로 다가와 내 목을 살갑게 끌어안았다.

󰡒잠간 이렇게 있자. 그 노래, 곡은 엉터리어도 가사가 맘에 든다. 내 맘에 단비 뿌려주는듯 싶네. 이러면 남편한테 미안하겠지, 그렇다고 내가 가졌던 느낌과 감정을 매몰하기는 싫구나. 난 니가 내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우리 생활에서 무엇보다 소중한것은 지기와의 만남이겠지. 넌 나의 지기가 되여주겠지? 아무런 사심이나 욕심이 없는 지기였으면 한다. 우린 누구보다 서로를 잘아니까, 오랜세월 겪어왔으니까!󰡓

당신의 입김이 서려와 내 귀볼을 간질구었다. 내 손에 잡혀진 손은 손맛이 났다. 고된 세월속에 흐트러짐이 없는 정으로 얽힌 맛!

󰡒니 맘에 내가 있다니 반갑고 기쁘구나, 난 니가 날 잊은줄 알았는데…이 세상, 난 영원히 고독한 사람인줄 알았다. 지기는 아무나 되는게 아닌가 보다. 고맙구나, 나의 지기, 나의 친구야!󰡓

󰡒나두 고맙구 감사해, 우린 좋은친구로 남을수 밖에 없구나, 괜찮겠어?󰡓

󰡒그래, 친구 좋지…󰡓

순간의 서분한 느낌이 가슴을 휑 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팔을 풀고 한껏 기지게를 켰다. 두팔을 올리잡고 몸을 뒤틀며 느닷없이 괴성을 질러댔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말았다.

󰡒허, 왜 그래?󰡓

󰡒상처가 가셔지는것 같구나, 니 형하구 선화한테서 받은 스트레스갉너네형은 나보고 곡주 마시란 말도 없이 혼자 들더라, 안하무인격이더라. 선화는 바쁘다고 이내 사라졌구, 그러다 한마디 중얼거리더라.― 바보같이 굶긴? 사장님이 사주는데 누가 누구한테 신세진다구? 그말 듣고 난 의아쩍어났다. 사장님이 누군가고 물었지.󰡓

󰡒그럼 그 녀자가 사장이였나, 서울녀자가?󰡓

󰡒그런가 봐. 그들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구, 사장님 만나보자 했더니 일이 있어 시내로 갔데요, 부러 피한것이겠지. 오빤 어디 앓고있는것 같더라…암튼, 보리밥집댁 사장님이 보살펴주니 시름 놓이더라. 선화두 그렇구, 비록 궁금증이 다는 풀리지 않았지만.󰡓

󰡒듣던 소문과 비슷하네, 형은 괜히 우리와 정 떼느라 그러는것 같아.󰡓

󰡒정 뗀다구? 무슨 정? 원래 정없는 사람,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잖어?󰡓

󰡒뭔가 사정이 있겠지, 셋의 태도가 수상하잖어? 꼭 무슨 일이 있을꺼야. 형은 사람들 만나는것 귀찮아하고있어, 혐오스러울 정도로!󰡓

󰡒글쎄, 하긴…󰡓

나는 형의 처소를 안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였다. 아무리 어떻다해도 하나밖에 없는 형이잖은가? 나는 꼭 형을 찾아봐야 한다.

당신이󰡒참이슬󰡓소주와 XO양주를 갖고나왔다.

󰡒오늘저녁 우리 취하도록 마시자 응? 비록 술은 잘못하지만, 남편은 애들 데리고 자리를 피해줬으니 래일저녁전엔 안올거다. 괜찮아, 그 량반 날 믿는다. 믿지 못할것두 없구, 그러니 여기서 쉬라구.󰡓

󰡒그래도 괜찮겠어? 한밤중에 홍두깨에 두들겨 맞으면?󰡓

나는 놀랐다. 짐짓 놀란척했다.

󰡒너 딴 생각하면 안돼?󰡓

󰡒무슨 생각? 허허, 알았어요.󰡓

그녀는 고향소식을 무척 알고싶어했다. 누구네는 해변도시로 이사를 갔고 누구는 외국으로 나갔고 누구는 불의지변으로 죽어갔고, 그속의 중심은 남수였다. 그의 곁에는 또 우리들의 그림자가 있었다. 손을 내밀면 만져질듯 싶고 귀 기울리면 들려올듯 싶은, 고향은 우리 생명과 삶의 모태였다. 짠짠한 사랑과 아픔이 있기에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당신과 남수와의 삼각관계를 상기했다. 당신한테 보낸 구애편지를 나꿔채서 답장 꾸며보내던 고약한 일들, 당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후에 남수가 알았어, 니가 꾸민 소행인줄을?󰡓

󰡒그놈이 장가들구 나서…술장소에서 우연히 비밀을 터놓았지.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라, 불시에 귀뺨 한대를 치더라, 눈에 불이 번쩍 나게! 마, 얼마나 세게 치는지 얼얼해 나더라. 허허, 그놈이 뭐라한줄 알어? 이놈아, 지도 먹지 못하는 주제에 재는 왜 뿌리냐? 괘씸한 놈 같으니라구!…허허, 그러니 욕심이 그때까지 죽지 않았던가봐.󰡓

󰡒니가 나쁜 놈이 옳긴옳구나뭐, 아이구 배야!󰡓

복선녀는 복장을 끌어안고 한동안 숨도 못쉬였다.

󰡒참, 그놈한테 전화해볼까?󰡓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좀 늦은 시간이다. 밤 열두시반, 거긴 밤 열한시반, 이 시간이면 그놈은 언녕 꿈나락에서 헤매고있을것이다. 신호가 오래오래 울려갔다. 잠이 덜깬 그의 목소리에는 고향의 어둠이 묻어있다. 칠흑같은 어둠은 서너발자국 앞도 분별이 어렵다. 달이 떴으니 지금은 방안이 희읍스럼하리라. 창밖의 달빛은 서리 내리듯 할것이다.

녀석은 뜨직거리며 하품을 하고 어눌거렸다.

󰡒짜아식, 서울 가더니 금방 올빼미가 됐냐, 지금 몇신데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임마, 누가 니 목소리 듣고싶다고해서 한다. 잠간, 바꿔줄게.󰡓

나는 당신한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둘은 뭐라고 한참 주고받았다. 핸드폰이 다시 넘어왔다. 당신은 입에 손등을 가져다댔었다.

󰡒임마, 뭐라했기에 선녀가 날 웃니 응? 입 못다문다, 쩟, 쩟.󰡓

󰡒으메, 너희들은 참 좋것다. 행복하것다. 무슨 놈의 질긴 인연이기에 서울 가자 왕창 붙어버렸냐 응? 이 한밤중에 둘이 웬일이람? 의심타, 정말 의심타! 괜히 다리몽댕이 부러지지 말구 조심하거라, 잉?󰡓

간간대소하던 친구가 갑자기 긴 탄식을 내뿜었다.

󰡒너 부산 갈일 없지? 어, 서울 올라온다니까 서울에서 찾아보면 되겠네. 우리 녀편네말이다. 어디 아픈지 쿨적거리더라. 지말로는 괜찮다고 하나 걱정이 되여 어디 손에 일이 잡혀야지, 니 한번 찾아볼래? 그럴수 있것냐?󰡓

󰡒뭐, 울기까지 하더라구? 며칠전에 통화할도 펀펀하던데?󰡓

나는 남편 보고싶으니 괜히 화작 쓰나 보다, 래일아침 확인해보겠노라고 했다.

󰡒야, 야, 내 간떨어질라, 당장 돌아오라고 호령했다 마. 부탁할게, 고맙다.󰡓

나는 불안에 떠는 친구를 웃을수 없었다.

서울의 밤은 깊어만 갔다. 어느덧 자정을 넘기고있다. 한낮의 후텁지근한 열기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샤와를 하고 나오자 복선녀가 잠옷을 챙겨주었다. 남동생이 입던 옷이라 한다. 당신 어머니와 남동생이 3년 머물었다 다녀간것을 나는 알고있다.

당신이 잠옷을 입은 모습 나는 처음 보았다. 브레지어와 반쯔가 은은히 내비치는, 나는 약간 불안스럽고 싱숭생숭해났다. 당신은 손으로 가슴을 막았다.

󰡒호, 괜찮지? 나 안그면 못잔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가봐.󰡓

󰡒괜찮어…잘자, 니손 좀 잡아보고싶다.󰡓

그녀가 주저하다 손을 내밀었다. 나른한 손에 긴장감이 감돌고있다. 느닷없이 심장이 후두둑 뛴다. 명치끝에 뜨거운것이 치받쳐 올랐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있는 자기를 본다. 이러면 안되는데도 잊지 못한다, 이렇게 만나고있다!

󰡒난…󰡓

󰡒알어, 말말어…우린 지기니까,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래, 잘자. 허, 아쉽지만은!󰡓

그말을 하고 나는 멋적게 웃어버렸다.

당신도 눈을 흘기더니 손등을 입에 가져갔다.

나는 오래동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옷을 벗어던지고 빤쯔바람으로 뒹굴었다. 허연 달빛이 포도넌출우에 부서지고 엉켜있다. 창밖은 희뿌연 기억처럼 나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어가고있었다.

불현듯 당신의 그림자가 그속에서 나붓기고있다. 포도넌출밑에 가 앉다가 일어나 뜨락을 거닐더니 하염없이 달을 올려다 본다. 정처없이 뜨락을 배회한다. 꿈일까 생시일까?…

복선녀, 당신은 무(舞)의 달빛인양 창가에서 나붓기고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목이 말라 깨여났다. 뒤골이 욱신거렸다. 해살이 눈에 부서지며 어릿거렸다. 나는 알몸인 자기를 발견했다. 팬티는 침대밑에 뒹굴고있었다. 옷을 주어입고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밖을 보니 달빛의 마에 걸렸던 어제밤의 포도넌출은 푸른빛을 한껏 뿜고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벗고잤다는것, 나는 죽어도 영문을 알수 없었다.

차차 기억의 쪼각들이 어슴푸레 맞붙어갔다. 잠옷을 입은 당신이 뜨락에서 매삼거렸다. 나도 유령같이 문밖을 빠져나갔다. 당신은 사뭇 나를 못본척한다. 수작을 걸어도 반응조차 없었다. 당신은 기도하듯 합장하고 달님을 바라보기도 하고 춤추듯 팔을 휘젖기도 했다. 몽유하는 천사같았다. 달빛과 흰옷,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필림은 이제 끊어지고 없었다. 술을 너무 많이 섞어마신 탓이라 생각했다.

나는 당신 보기가 걱정스러웠다. 당신도 침실문 두드리지 않았다. 배안에서 거위가 울었다. 정지로 나가야 했다. 다행히 당신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금방 밥상우에 얹혀있는 메모지를 발견했다.

― 잠간 나갔다가 점심전에 돌아올게. 친구와 데이트선약이 있어서, 니가 좀 봐주라. 반찬 몇가지 장만해 놓았으니 전자레인지에 덥혀 먹으면 된다. 미안, 심심하면 책이나 찾아 읽어보렴. 선녀가.

* 우리 남편더러 래일저녁에 오라고 했으니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나는 입가장에 서글픈 웃음을 베물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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