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펜을 잡은 나의 손이 또 멈추어졌다. 오래오래 한가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내 몸과 내 눈을 스쳐간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생령들이여. 구름처럼 잠간 머무렀다가 떠나간 내 령혼의 주재자들이여. 당신들의 넋과 그림자와 입김은 상기도 광막한 동북평원 허허벌판에 떠돌고있다. 나의 꿈결이 질펀히 흐르고 엄마의 십팔번지 락화류수멜로디가 곱게 여운져 있노라…
나는 가끔 상야(上邪)를 읊고싶다. 내가 보지못한 갸냘픈 녀인은 우리 할매가 천집의 바늘을 얻어다 만든 천도끼를 꿰차고서 또 관악보살님께 백일기도를 드려서야 하느님의 점지를 받아 이 땅에 다녀오신 우리 아버지에게 얼마나 간곡함을 남기셨던가!
―기약없는 당신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먼저 떠나갑니다. 혹시 저쪽 세상에서 절 기다리고있을듯 싶어 마음이 급해집니다…하늘이여! 내 그대를 사랑하오. 그 사랑 오래오래 변함 없으리! 산에 봉우리 없고 큰강에 물마르고 겨울에 우뢰울고 여름에 눈내리고 하늘땅이 딱 붙어야 그대와 갈라지리!…
나는 진호형엄마가 의식을 놓던 마지막 순간이 너무 안타게 생각된다. 나는 믿는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영원하다는것을,
나는 그 녀인의 나그네와 결혼한 우리 엄마생각도 한다. 당신은 울아버지를 너무 모질게 대했다. 산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사랑했다. 그토록 매정한 가슴에도 열여덟 떼묻지 않은 순결이 고이 숨겨져 있다니 믿고싶지 않았다.
그래서이다. 복선녀, 당신은 당신을 싫어한 울엄마의 지조를 높이 샀다. 내 가슴속에는 당신이 유달리 즐겨 부르던 당신만의 락화류수, 가 상기도 조용히 흐르고있다…
어느날 나는 참지 못했다. 내 손에는 당신과 낯선 군인이 함께 찍은 당신네들의 약혼사진이 들려있었다. 바느질하던 당신이 삽시에 그 사진을 나꿔채 갔었다.
<<엄마, 이 남자가 그리 좋아? 이미 죽었잖어? 아버지가 얼마 잘해주는데?>>
<<얘가, 니가 뭘 안다구 그러니? 내 가슴속에서는 그 사람 영원히 살아있다! 사랑이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니? 진정한 사랑은 한번이네라. 다시 내 물건에 손댔다봐라?>>
당신은 성을 내면서 얼굴을 붉혔었다.
그말을 듣고 복선녀도 나를 정시했다. 죽음과도 관계가 없는, 이 세상에 한번 밖에 없는 사랑을 우리도 할수 있을까? 묻듯 싶었다.
솔직히, 나는 우리 사이 뭐가 문제였는지 몰랐다.
<<그럼, 갈게…>>
<<응, 잘갉>>
나는 복선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당신의 두팔은 내 겨드랑밑을 파고들어 어깨에 닫아왔다. 오른손을 가만히 도닥거린다. 엄마나 누나처럼 내 아픈 상처를 어루듯 한다. 나는 안심하고 떠날수 있을것이다.
<<달이, 보름달이 떴네…>>
검푸른 하늘에 그림처럼 뜬 달은 잘익은 능금인양 불그스럼했다. 당신은 유난히 보름달을 좋아했다. 언젠가 부끄러운듯 속삭이였다. 만월을 보면 내 속이 훤해진다. 웬지 그냥 빌고싶어져요. 내 마음 알아줄것 같구 소원 이뤄줄것 같아서! 그리고 잠간 두손 맞잡고 눈을 살풋이 감고 기도하듯 한 포즈를 취하군 했었다.
당신의 입김이 금방 내 목깃에 따뜻히 서려왔다.
<<잘가라구, 잘살라구 아마 달님이 인사하러 나왔나 보네. 그동안 아팠던것 싹 잊구 연변에 가서 새로 시작하는거야.>>
<<헌데 뭐야, 그말 좀 이상하게 들린다? 우린 잠시 헤여질 뿐인데…>>
<<널 떠나보내기 섭섭해서 그런다, 잡구싶어서.>>
이때 이삿짐을 실은 자동차헤드라이가 갑자기 켜졌다. 발동기소리가 요란히 났다. 우리는 떨어질수 밖에 없었다.
약간 들뜬듯 채랑거리는 엄마목소리가 채찍을 들어왔다.
<<진규야, 뭐하고있니? 우리 출발하자, 어서!>>
나는 참지 못하고 에시씨, 를 뱉으며 불빛에 빨려갔다. 당신은 손등으로 눈을 막고 꼼작않고 섰다가 갑자기 헤드라이트 불빛 밖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운전수 곁의 좌석에 앉았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였다. 얼핏 돌아보니 불 꺼진 초가집이 성난 짐승처럼 웅크리고앉아있다. 거대한 무덤같기도 했다. 머리끝이 쭈뼛해났다. 나는 분명 그속에 앉아있는 할매와 아버지를 보았다. 입을 꾹 다문채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해있다. 어데로 가냐, 어디로? 우리를 버리고 도망가서 니네 잘 살줄 알구? 여기가 니네 집이네라. 니네 조상들이 살아온 땅이네라. 조, 조 발칙한것들, 말 안듣네. 반드시 죄 받으리라!― 울부짖는 당신들 마(魔)의 음성이 내 가슴을 움켜잡고 마구 찢어왔다.
나는 꼭 용서받지 못하리라는것을 안다.
아버지와 할매의 골회는 화장 그 길로 강물에 뿌리워졌다.
<<산소를 써서 누가 거둔다든? 죽은사람은 죽었지만 산사람은 어쨌든 시름놓구 살아야잖니? 싹 잊자. 이젠 이곳이 신물난다.>>
엄마는 과거와 결별하고 모든 인연을 끊으려는듯 했다. 이제 당신은 고향을 찾아가 옛추억을 더듬으리라. 당신의 락화류수 부르면서 한가이 새김질하리라. 별것 아닌 독이며 생나무까지 이삿짐에 꿍겨싣고 당신의 과거와 체취마저 아닌듯 포장해서 이땅을 빠져나가고있다. 나는 악착같은 당신의 행위와 몰인정에 너무 가슴이 아파났었다.
나는 속으로 웨쳤다. 나는 떠나간다, 하기에 나의 어제로 돌아간다. 깊은 사랑을 찾는다. 떠나기에 진정 돌아올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비로소 터득한다.
엊저녁, 복선녀 당신은 뜨락에 홀로 앉아 기타를 잡고 희미한 달빛속에 삼단같이 풀어헤친 머리를 흔들며 금방 류행을 시작한 쟈즈곡을 쳤다. 불빛에 달빛에 음률이 요란한 굿판을 벌려갔었다. 광(狂)이고 절(絶)이고 규(叫)였다. 당신 아닌 당신이 탈을 벗고있었다. 나는 한동안 탈속과 탈밖의 당신을 구분 못했다. 얼마쯤 되였을까? 이윽고 당신의 손가락끝에서 란(亂)을 일으키던 기타줄이 마침내 처러렁 울더니 끊어졌었다.
당신은 천천히 고개 들었다. 나는 어지간히 당황해났다. 나를 분간 못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당신의 그 눈길에, 당신은 속삭이듯 물었다.
<<왜 왔어? 이사간다고 인사하러?>>
<<그냥, 니하고 먼저 얘기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차마 말 뗄수 없었다구.>>
<<괜찮아, 나야 뭐―…>>
<<성났어? 성났구나 뭐.>>
나는 당신곁에 앉았다. 동그란 어깨가 내 품에 쏘옥 들어왔다. 손바닥에 받쳐진 젖무덤은 탱탱하고 그득했다. 내 본능은 더듬고 움켜쥐고 잔뜩 욕(慾)을 만들면서 자신의 원초를 찾아갔다. 나의 체질에 맞는 능동적인 살결과 입김과 신음이, 그리고 나와 함께 해온 세월의 여울소리가 나를 못살게 만들어갔다. 나는 널 갖고싶다, 미칠것 같다고 했다. 넌 연변 안간다고 맹세해놓고 왜 가느냐고 힐문했다. 탄식처럼 동을 달아갔다.
<<호, 왜 연변일까? 인심 박하다 소문난곳, 조선사람들 끼리 모여 물고 뜯고 고자질하며 싸우다 볼장 다 보는곳이 아닌감? 니도 알지만 우리 여기선 그쪽 사람들과 사돈도 안맺는다고 한다. 북경, 청도, 상해, 얼마든지 좋은 고장 많은데 하필이면 왜 거기야?>>
<<엄마가 그러는데 난들 방법이 있냐?…너, 술먹었구나.>>
<<조금, 남수랑…베갈 한병밖엡언제까지 끌려 다닐참이지, 니네엄마한테?>>
<<후, 글쎄…그렇다구 혼자 보낼수 없잖어? 나, 못참겠다.>>
당신은 그제야 뒤로 해서 나의것을 잡았다. 당신의 손에서 그것은 파렴치했고 몰상식했다. 그런데도 더 뻔뻔스레 악착같은 자신을 보이려 했고 나의 독거미를 만나려 했다. 머리 빨갛고 수없는 다리가 보라빛을 띤 독거미는 항시 그랬다. 어디선가 나타나 엉기적거리며 기어와서 가만히 살피다가 한번에 물어버렸다. 그리고 보얗게 터지는 정액속에 봄눈 녹듯 사그라져버린다. 나는 안다. 당신을 만나 치유 불가능한 환우가 된것을, 그래서 더더욱 당신곁을 떠날수가 없었다.
<<벌써…? 왜 그래?>>
당신이 당황해서 물었다.
<<몰― 라…>>
나의것은 주체할수 없이 엉겁결에 터지고말았었다.
<<휴, 난 니가 날 떠날줄 알고있었어, 오래전부터 예감을 가졌어. 널 원망 안해, 니한테는 니가 헤염치며 살아갈 물이 필요한거야. 그런 민족적인 여건과 문화적인 분위기…때문에 널 마음놓고 달갑게 보낼수 있을것 같아. 넌 잘할수 있을거야.>>
<<기다려, 내가 발을 붙힌 다음 널 데리러 올게…꼭, 약속한다.>>
<<알어, 니 마음…>>
<<기다릴거지?>>
<<글쎄…응.>>
당신은 돌아앉아 내 볼에 불같은 입술을 갖다댔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키스였다.
당신은 내 운명을 바꿔놓았다. 나는 용서할수 없다. 영원히 당신을,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