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나는 와이프와 통화를 했다.
<<그래서요?…호, 느낌이 어떻슴다, 서울에 간 느낌이?>>
<<허엇, 뭘 알고싶소?>>
나는 와이프가 묘하게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귀가 말려올라갈듯 볼이 살짝 패인다. 눈이 빛나며 야릇한 정기가 감돈다. 가끔 그런 웃음이 나를 감동시킨다.
<<당신 지금 웃고있소? 진이가 영어공부하다 당신 바라보고있고?>>
<<귀신이네, 어찌 암다?>>
<<그냥, 느낌이지. 당신과 우리 딸에 대한…이곳에 온 느낌이 어떠냐구? 옛날 선바위아래서 한밤중에 당신더러 별 헤는 밤 읊어달래했던 생각이 나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 합니다…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읊기를 멈추었다. 북간도, 그리움, 스러지는 생명의 아픔과 소망, 그 모든 감성들이 느닷없이 내 가슴을 움켜잡아왔던것이다. 나는 나일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갑자기 신호가 끊어진데 당황했다.
<<여보세요?…여보세요?…>>
나는 집의 전화기문제인지 와이프의 소행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그냥 열혈의 다 자라지 못한 문학청년일까? 아무렴, 우리 족속의 중심지에 서서 나같이 한가히 시나 읊고있을 놈은 없을것이다. 그런데 뭘 알고싶었을까?
나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아닌것을, 여기오니 그냥 당신이 그립다고 말했을뿐인데…?
순간 와이프와 복선녀의 얼굴이 엇갈려왔다. 암, 그러니 의심 품을수도 있다.
<<이번에 가면 좋겠슴다 네? 그 녀자도 만나겠으니…>>
와이프는 짐을 챙기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혹, 질투하는거 아니지? 설사 만난다해도, 그런 감정으로 만나는게 아니라구. 그저 회포나 풀고 인사로 그칠것이니 시름놓소. 나한테는 오로지 당신뿐이요.>>
<<오머, 누가 질투한다고 그럼다? 회포나 실컷 푸세요…시름놓구 말구요.>>
나는 와이프를 조용히 끄당겨 품었다. 어깨에 턱을 얹고 볼에 입술을 갖다댔다. 여전히 탱탱하고 싱그런 살결이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향기있고 따뜻한것을, 내가 지켜야할 이 세상 유일한 당신인것을, 잔잔한 투정이 오히려 귀엽기만 하다.
그날 해질무렵, 우리는 선바위정상에 올라갔었다. 기막힌 노을이 륙도하에서 리듬을 얻어가지고 오봉산기슭에 황금빛을 뿌리다가 급기야 쏟아져내려 인가와 산천초목들에 불그스럼한 면사를 씌워왔었다. 와르르 무너질듯 싶은 선바위아래에서 붉은 여우가 언뜻 꼬리를 감추듯 이상한 환각이 일었다. 장재촌 와이프네 외가집, 로인들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빈집은 세월의 바지자락을 추스러지 못하고 무너질듯 아슬해 보였다. 불을 때 습기를 없애고 흙내 흠씬 맡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이십여일을 보냈다.
<<난 모르겠슴다. 밥두, 채두, 당신 자시구 싶은데루 해서 잡숨다 네?…>>
와이프는 구들에 이불을 펴놓고 퍼드리고 누워있었다. 브래지어에 팬티만 걸치고 풀어 헤친 머리를 방치해둔채로 네활개를 뻗고있었다. 녀체가 그토록 랑자할수 없었다. 그러기 열흘만에 비로소 몸건사를 하기 시작했다. 몸에 찌든 오사까의 콩크리트냄새를 얼마쯤 빼고 흙기운을 보충한것일까. 붓기가 빠지자 생기 오른 얼굴이 한결 보기 좋았다.
<<이제 좀 살것 같슴다…>>
와이프는 눈꼽을 쥐여뜯고 입귀에 미소를 피웠다.
우리는 산의 정상 큰바위를 찾아앉았다. 락조는 산새의 지저귐마저 잠재우며 여광을 거두어가고있다. 바람은 자고 스러지는 빛은 애달프고 못내 안스러워났다.
와이프가 중얼거렸다. 낮으막하니 놀라듯,
<<세상, 참 조용함다. 이리 좋을수갉호, 이렇게 조용할수 있음다?>>
<<그래말이요, 시골이니까…고향생각, 옛생각 절로 나네…>>
<<그 녀자…그 녀자 생각도 함다?>>
와이프는 갑자기 민감하게 반응했다. 곧 자조하듯 피식거렸다.
<<아닌데…그게 아닌데…나, 왜 이런지 모르겠슴다. 때때로 조금씩은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슴다. 식당에서 돈 버느라 정신없이 돌아치다가도, 이런 나를 당신이 알아줄까? 오사까에서 호강하는 줄만 알고 날 까맣게 잊고있겠지? 그리고 괜히 쿨적거림다. 내 팔자인걸, 곧 그리 생각함다. 딱히 후회는 안하지만, 힘만 내면 벌만큼 벌수 있는 오사까가 내 심성에 맞지만, 그래도 가끔 당신 생각을 함다. 글 재간있는 당신을 사랑했던 옛날이 그릴울때가 있음다. 그때 난 맑고 순진해고 정직하고 무척 지향적인 처녀였슴다. 당신의 문학재능을 무척 사랑했음다. 호, 생각남다? 당신, 그때 X잡지에 중편을 발표했잖음까? 원고료가 족히 저의 한달 로임 맞먹었슴다. 그래 다들 얼마나 부러워했음까?>>
<<그래, 그런 년대도 있었소. 헌데 지금은 문학이 밥 먹여주지 않지. 우리 족속들의 문학이야 더 말할 나위 없구, 문학해서 친구 만나 술 한잔 먹기도 바쁜게 현실이요. 그래서 당신은 날 바보로 보고있지?…아니긴? 되지도 않는 잘난 소설 왜 쓰냐구 꼬집기만 하구…사실 나도 변비에 걸린것처럼 오래동안 속이 불편해 있었다구.>>
나는 기회를 잡아야 했다. 한번쯤 진지해야 한다. 속심 나누지 않은지 얼마이던가? 온갖 사건들만이 우리 사이에 오가며 세월의 거미줄을 쳐왔을뿐,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는 없었다.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된듯 간지러워 참기 어려워났다.
<<헤, 그랬슴다, 그런줄 몰랐는데?>>
<<당신은, 지금 자신을 속이고있소. 나두 속이고…안그렇소?>>
<<글쎄말임다, 그래 엄중함―다?>>
<<아니, 난 당신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고있소.>>
나는 와이프를 슬쩍 껴안았다. 알맞춤하니 동그란 어깨에 힘이 빠져있다. 땅에 잦아들기 시작한 황혼은 까무룩이 죽을만큼 고요하고 고즈넉했다. 그래서 솔직해지고싶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함다?>>
<<조금은…가끔, 그런 착각이 인다구.>>
<<그렇슴다. 당신은, 변할줄 모름다…당신은, 그냥 당신임다. 머리를 부등켜 안고 원고지에 매달려 그냥 꿈을 꾸고있음다. 당신이 바라는것은 명성과 부겠지만, 어느 하나 이뤄지는게 없음다. 가만히 앞을 내다봐도 당신은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큼 성장할 인물은 못됨다. 건데 거기서 굳이 빠져나오지 못할 리유가 뭐임까? 세상에 길은 많고 할 일은 천지인데 하필이면 꽃조차 피우기 힘든 고목에 목을 왜 맴다? 너무 한심하잖슴까?>>
<<그래, 왜서일까?>>
사리에 맞는 와이프이 말에 나는 바보처럼 자문했다.
<<기막히네, 제가 묻슴다, 제가요.>>
<<휴, 아마 그게 내 직업이구 사명이겠지. 무얼 바라는것 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을 하는것, 꼭 하고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것, 이런걸 운명이라나?>>
<<운명 좋아하시네. 변명임다…당신한테는 현실 도피증이 있음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의 과거에 빠져있음다. 승인안함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당신은 복선녀, 그 녀잘 잊지 못하고 당신의 고향, 그 안쪽을 잊지 못하고있음다. 당신은 당신 문학의 뿌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함다. 과거에 잡혀있는 사람한테 무슨 미래가 있씀까, 아님까?>>
<<이런, 모자가 왜 그리 크오?>>
나는 놀란 가슴 감추듯 짐짓 딴전을 부렸다. 나란 사람 정말 그럴까? 와이프는 안목이 바르고 감성이 탁월했었다. 조금 떨어져 나가 나를 관찰해온것이다.
<<물론 당신은 또 변명거릴 찾을검다. 그토록 저를 생각했는데 뭘 잘못했기에 요렇게 모질게 몰아부치냐구? 전 당신의 심정을 압니다. 노력하려 무척 애써는것도…하지만 그런 감정은 인위에 가깝게 느껴짐다. 난 그런 생각이 자주 듬다. 노력해서 사랑이 됨다? 내가 견딜수 없는것은 그거임다. 감히 아니라 할수 있음다? 자기 감정을 속이겠슴다?>>
<<물론, 그게 아니지…>>
나는 벼랑끝에서 한껏 몸을 움츠렸다. 와이프보다 자신이 곱절 무서워났다. 이제 황혼의 여음은 갈무리 되고 어스럼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와이프가 그냥 악착같은 물음을 던져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묻겠슴다. 정말 알고싶슴다. 둘 말임다, 왜 갈라졌음다?>>
<<허, 뭐요? 말 안해줬던가? 가만, 이건 적반하장격이군.>>
<<그래, 원인이 뭐임까?>>
<<나두 모르오. 글쎄, 내가 갑자기 싫어졌다오.>>
나는 한풀 꺽이고말았다. 그래, 우린 왜 갈라졌을까, 갈라서야만 했을까? 우리는 묵묵히 산을 내리기 시작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