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8일 독일 기행문(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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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8일 독일 기행문(上)
  • 김범송
  • 승인 2009.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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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 항공기에서 본 ‘독일문화’

5월 28일 오후 2시 인천국제공항 출발, 프랑크푸르트를 목적지로 하는 LH713 독일 항공기에 나는 여로에 지친 몸을 실었다. 7박8일 독일방문 일정이 곧 시작된 것이다. 항공기에 들어서자 독일 승무원들의 친절한 (독일어)인사와 함께 기내의 분위기는 확실히 그동안 내가 익숙해있던 동양문화와 다른 서양(독일)문화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대다수의 여객들은 낯 설은 독일인이었고, 기내에서는 2명의 한국인 남녀 승무원이 독일인 승무원들과 어울려서 여객들에게 서비스를 해주었다. 아시아 항공기가 미모의 스튜어디스 스마일 봉사로 유명하다면, 독일 항공기에서는 핸섬(handsome)한 독일남자 승무원들의 친절한 봉사가 인상적이었다.

▲ 라인강반에서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공항) 도착에 소요되는 시간은 약 11시간이며, 기내에서는 두 번의 식사와 한 번의 간식(컵라면 또는 샌드위치)이 제공된다. 기내의 한국인 여객들을 배려해서인지 (한국어)식사 메뉴가 미리 제공되는데, 메뉴에 적혀있는 한식과 중식(中食) 및 양식 중에서 개인의 입맛에 따라 기내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아시아 항공기와 다른 점이었다. 비행기가 출발해서 약 1시간 후 음료와 늦은 정심식사가 제공되었는데, 옆자리의 김원희(흑룡강신문 독일지사장) 선생의 도움으로 독일 맥주와 쇠고기볶음의 (중식)국수를 선택했는데, 맥주와 국수 맛이 모두 일품이었다. 5~6시간 후 제공된 저녁식사로 돼지고기볶음의 김치(밥) 한식과 독일 와인을 선택했는데, 동서양의 음식문화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저녁식사 후 여객들의 휴식을 위해 승무원들은 기내의 등을 끄고 밝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게 하면서 인공적인 ‘밤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시아 항공기가 기내에 설치된 여러 개의 TV시설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동시에 방영하는 것이 특징적이라면, 독일 항공기에는 앞좌석의 뒷면에 (여객)본인의 애호와 취미에 따라 (영화나 드라마 등)프로그램을 임의로 선택해 시청할 수 있는 소형 TV세트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 또한 동서양의 문화차이로 개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와 정서를 실감할 수 있었던, 필자가 체감한 ‘독일문화’이기도 했다.

2. 독일 뤼데스하임에서의 2박3일 심포지엄(강연회)

금년 3월 필자는 6.15 유럽공동위(6.15 공동선언실천 유럽지역위원회) 박소은 위원장으로부터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해외동포와 민족통일>이란 심포지엄의 주제발표자로 초청을 받았다. 6.15 유럽공동위는 민주와 통일운동 단체들과 관련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2005년에 베를린에서 결성된 한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목적하는 통일운동연대조직으로, 초대위원장에 박소은 여사가 선임되었다. 금번 심포지엄은 6.15공동성언 9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6.15 유럽공동위의 주최 하에, 초청 연사(演士) 위주의 강연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금번 독일 방문일정 중, 라인강변의 유명한 포도주 산지 뤼데스하임에서의 2박3일 강연회 행사가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독일 중부에 위치한 소도시 뤼데스하임은 세계 최대의 포도주 박물관, 유명한 힐데가드 수녀원과 관광명승지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도시이다. 5월 31일 오후 2시 “중국동포와 한(조선)반도와의 상생관계”의 내용으로 필자가 강연했는데, 오전 중 일정으로 12km의 라인강변 도보 산책과 유적지 답사로 모두들 피곤해할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했지만 발표와 토론 중에 졸고 있는 이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금번 독일 강연회 특징은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참가자 전원이 발표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고, 포도주 시음과 도보 산책 및 와인파티를 곁들여서 여유롭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내용의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한국의 심포지엄과는 대조적이었다.

강연회를 통해 필자는 독일동포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소박하고 겸손하며 관용적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같은 해외동포로서의 동질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강연회 진행 중 와인파티와 (강연회)마무리에서 두 번이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참가자 전원이 손잡고 합창하는 장면을 보면서, 해외동포를 비롯한 7천700만 한민족의 화해와 단합 및 민족통일을 갈망하는 그들의 진솔한 염원을 절감했다. 특히 강연회 마무리(합창)에서 통일을 소망하며 열심히 부르는 연세가 지긋한 독일동포어르신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고, 작금의 경색된 남북관계와 ‘요원해지는 통일’을 생각하니 더욱 만감이 교차되었다.

3. 독일의 한인 1세대, 광부와 간호사

현재 독일에는 1960~70년대 독일(주로 서독)로 이주한 광부와 간호사 주축의 1세대를 중심으로, 약 5만명의 한인(수백명 중국동포를 포함)들이 생활하고 있다. 1963년에서 1977년까지 약 2만명의 한국인들이 독일에 노동이민자로 진출했다. 하지만 당초에는 정책적인 모집대상국이 아니었던 한국인의 이주는 거의 전적으로 광부와 간호사라는 직업으로 제한되었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엄격한 순환시스템 하에서 그들은 이주민의 설음을 겪어야 했다. 3년 동안 고정된 일자리에서만 일해야 했던 그들은 초기에는 복지혜택(연금, 자녀수당, 별거가족수당, 노동보호조치 등)을 받지 못했으며, 비유럽 출신의 ‘소수인’으로서 주류사회에서 배제되는 사회적 기시와 일상차별을 경험해야 했다.

존경스러운 것은 광부와 간호사 중심의 한인 1세대 이주민들은 단합과 집단적·공개적 정치투쟁을 통해 합법적인 체류(영주)권을 얻어냈고, 근면한 노력과 인내로 결국 독일인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각종 서명운동과 다양한 한국인 공동체의 결속 및 독일사회에 대한 열린 관심 등은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으며, 이는 한인 이주민의 45년 이주사와 다양하고 복잡한 이주역사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젊은 광부와 미모의 간호사들 사이에는 자연적이고 필연적 결합이 이뤄졌고, 이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은 오늘날 한인 2세대들이 ‘차별 없고’ 공정한 처우 하에 독일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았던 것이다.

현재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한인 1세대들은 여전히 한민족의 생활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고 있지만, 이들 1세대와 이미 독일 주류문화에 적응된 2세대들 사이에는 문화적 갈등과 삶의 가치관 및 조국관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해외동포로서 그들 역시 정체성의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금번 강연회 참석자 중에도 광부와 간호사 출신의 1세대 어르신들이 오셨는데, 필자는 그들의 언행에서 작금의 경색된 남북관계를 안타까워하면서 한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갈망하는 염원을 체감했다. 한편 후대(2세)들이 현지 독일인과의 결혼으로 점차 주류사회에 동화되어 가는 현실에 애태우는 그들의 모습이 별로 ‘남의 일’ 같지만 않게 느껴졌다.

4.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존하는 기독교국가

작금의 유럽사회는 서·남유럽은 천주교, 영국과 북·동유럽은 개신교 위주로 두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독일은 이 양대 종교가 ‘병존’하는 기독교국가로 로마 근처의 남부지구는 천주교, 북부는 개신교 위주로 신구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 필자는 북부도시 쾰른과 남부도시 뮨헨에서 성당·교회가 독일인들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체감했다. 한편 개인주의가 군림하고 있는 독일사회에서 종교가 끼치는 영향력을 감지했고, ‘종교역사를 모르면 유럽(독일)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속언의 의미도 다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체사회의 신·구교 공존은 종교개혁 이후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종교전쟁을 거쳐 피의 대가를 지불한 후 비로서 이뤄진 결과이다. 현재 기독교(천주교·개신교)는 유럽인들의 삶의 가치관을 좌우하는 ‘정신지주’로, 그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100만이 넘는 대도시 쾰른에서 필자는 유명한 (천주교)성당을 견학했다. 쾰른 대성당은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관할하고 있으며, 쾰른 시민들의 믿음과 인내로 세워진 그리스도교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세계문화유산인 쾰른 대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기념물이자 쾰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유네스코로부터 “인간의 창조적 특징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쾰른 대성당은 북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 교회건물이며, 거대한 쌍둥이 첨탑(尖塔)으로 인해 세계의 모든 성당 중 가장 거대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김원희 선생으로부터 성당의 역사와 종교문화에 대한 해박한 해설을 들으면서도 유럽 종교역사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필자로서는 아리송하기만 했다. 따라서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의 뜻을 실감했고, 향후 유럽역사와 종교문화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충동을 받았다.

독일 남부도시 뮨헨을 관광하면서 필자는 ‘성당의 존엄’을 더욱 체감하였다. 로마와 근접한 뮨헨에는 유명한 성당이 적지 않으며, 특히 로마교황(베네딕토 16세, 독일인)이 추기경으로 재직했던 뮨헨 (광장)성당은 유명한 관광지로서 가톨릭 신자들의 동경하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광장중심에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첨탑이 있었는데, 독일인들의 심목 속의 교황의 위치는 그만큼 중요했고 교황이 ‘독일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 도시중심에 가장 멋진 건물이 교회거나 성당이라는 점에서도 기독교국가의 특징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편 유구한 역사와 함께 거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천주교 성당은 아주 화려한 반면, 개신교 교회는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원희 선생의 해설에 의하면, 독일교회는 국가에 종교세를 바쳐야 하며 독인의 신부와 목사들을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해주기에 ‘공무원’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이는 ‘종교관리’ 차원에서 과거 히틀러 집정시기에 제정된 것이지만, 현재까지 그 관례가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5. (독일)중국식당에서 본 중국인의 상술(商術)

독일 음식문화에 바로 적응하지 못한 필자는 금번 독일여행 중, 모두 4차례에 걸쳐 중국인이 경영하는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네 곳이 모두 중국남방(절강·광동)에서 온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역시 남방사람들이 북방인들에 비해 (음식)장사를 잘한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중국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김원희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중국음식은 현지의 독일인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것은 중국요리가 독일인의 구미에 맞고 요리(고기)의 양이 많으며 맛도 일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몇 차례의 중국음식점에서의 (식사)체험을 통해 독일인들이 중국요리를 즐겨먹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더욱이 감복한 것은 그들이 경영하는 중구음식점에는 그들만의 경영노하우가 있다는 점에 탄복했고, 중국요리는 유럽에서도 통하는 ‘세계적 음식’이라는 것을 새삼 체감했다.

필자는 현재 김원희 선생이 거주하는 북부도시 졸링본에서 그들 부부로부터 (독일인)부인의 단골로 다닌다는 중국음식점에 초대를 받았다. 식당은 깨끗했고 식사를 하고 있는 독일인 고객들이 여러 상이 있었다. 뷔페는 요리종류가 다양했고 가격도 저렴했으며, 국내의 중국요리에 비해 맛이 좀 담백하였다. 필자가 중국말로 인사를 하니 절강 항주에서 왔다는 식당주인 부부는 반갑게 맞아주었고, 식사가 끝날 무렵 중국산 와인 세잔을 우리에게 ‘덤’으로 주었다. 더욱 감복했던 것은 디저트로 받은 과자마다에 ‘고객의 행운을 비는’ 덕담들이 독일어로 깨알 같이 적혀진 작은 종이쪽지가 들어있었다. 흥미진진하게 그것을 꺼내서 읽고 그 내용을 필자에게 설명해주는 金 선생 부부를 보면서, 손님을 끄는 중국인의 경영상술에 내심 감탄했다.

뮨헨의 광동요리점에서 필자는 중국인의 상술을 재삼 실감했다. 광동요리점은 고급레스토랑으로 실내장식이 온통 중국문화(그림)로 도배되었다. 저녁 9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어서 그런지 식당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구석 테이블에서 한국유학생처럼 보이는 커플이 식사를 하면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이 좌석을 정하자 식당주인이 직접 나와서 우리에게 독일어로 인사를 했다. 베트남에서 왔다는 종업원에게 요리를 주문하면서 우리끼리 하는 한국어를 옆에서 듣고 식당주인이 우리를 ‘한국인’으로 착각했는지, 그가 들어가서 얼마 안 되어 감미로운 한국음악 멜로디가 흘러나와서 뮨헨 맥주와 소고기 중국요리를 곁들인 식사분위기를 즐겁게 해주었다. 필자는 외국손님의 문화적 정서(음악)마저 신경써주면서 고객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식당주인의 자상한 배려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금번 독일관광 중 가장 인상적인 식사는 엥겔스 고향 부퍼탈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아시아특색’ 뷔페였다. 식당은 정심시간이 다가오자 식사를 하려고 몰려든 독일인들로 꽉 들어찼다. 한 식당에서 매콤한 한식과 구수한 중식, 담백한 일식의 묘미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게 한 한국인의 상술에 감탄했다. 한편 맥주 한 컵에 비빔밥과 볶음요리 및 (일식)스프를 포식한 후 식당주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필자는 한·중·일 삼국의 음식을 동시에 맛보게 한 한국인의 경영노하우와 손님의 정서와 분위기를 배려해주는 중국인의 상술 및 일본인의 일류서비스가 결합된 ‘아시아특색’의 음식점을 경영한다면 유럽전체에서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엥겔스 생가와 故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5월 29일, 독일에서의 첫 방문지가 바로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 부퍼탈에 있는 엥겔스(Engels Friedrich, 1820~1895) 생가(生家) 박물관이었다. 엥겔스가 태어난 생가에는 현재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세 번째 생가가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국내외의 방문객들에게 개방되고 있었다.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철학자·정치가였던 엥겔스는 칼 맑스를 협력해 과학적 사회주의 및 사적 유물론을 창시한 위인이며, 1848년 2월 맑스와 공동으로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 한편 그가 친구인 맑스의 정신적·물질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후원한 ‘푸른 잎’의 귀감으로서, 더욱 후세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사견이다.

▲ 라인강반에서 베를린 리포트 김원희 대표이사와 함께

필자와 김원희 선생이 박물관 주위를 들러보고 박물관을 참관하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관리인원이 나와서 오늘은 ‘중요한 행사’가 있어 참관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金 선생이 필자를 가리키면서 독일어로 먼 아시아 중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하면서 양해를 구하자, 관리인원은 필자에게 특별히 ‘10초 동안’ 현관에 들어와서 잠깐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잠깐 보고 나온 후 박물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검소하지만 숭엄한 엥겔스 박물관을 떠나면서 필자는 이념을 떠나서 오늘날까지 후세들이 기리고, 청사에 길이 남는 위인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잠깐이나마 ‘부질없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부퍼탈의 한식점에서 맛있는 ‘아시아특색’의 정심식사를 마치고, 필자와 김원희 선생은 서독의 수도였던 본(BOON)의 한국대사관(분관)에 임시로 설치된 故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았다. 우리는 당지 영사관 직원의 배동 하에 고인의 명복을 삼가 빌었으며, 생전에 ‘서민대통령’으로서 대북 포용정책을 펼치고 재한중국동포들을 몸소 찾아주셨던 고인의 은덕을 기렸다. 조문행사가 끝난 후 필자는 경건한 심정으로 대사관 (분향소)방문록에 첫 외국인 조문객으로 이름을 남겼다.

5월 30일 강연회가 시작하기 전, 사회자의 제의로 전체 참가자들은 묵념으로 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도를 표시했다. 또한 독일동포들이 대회가 끝난 후 근처의 분향소를 찾아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들었는데, 해외동포인 그들도 고인의 서거를 슬퍼하고 있음을 체감했다.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 집정시기 참여정부가 해외동포들에게 베풀어준 (방문취업제 등)재외동포정책의 소중함을 재삼 실감했다.

김범송 : 흑룡강신문 논설위원, 사회학 박사.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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