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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역사 유적지나 문화 지역을 돌아볼 때, 나는 가끔 당시의 역사와 유물 유적들을 이해하는 것 말고 거기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얻었을 경우에는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구나 여기면서 흐뭇해하곤 한다.
이러한 태도는 여행을 다닐 때에는 물론, 일을 보러 다른 곳에 가게 되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것을 예사롭게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이름난 것이 아니고 설령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때로는 생각잖게 좋은 느낌과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강원도 치악산의 신선대(神仙臺)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 그곳을 찾아갔을 때 절벽 밑에 놓인 여러 개의 초와 흘러내린 촛농들을 보고는, 치성을 드리고 기원을 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절벽으로 생각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수도를 하던 곳이라는 전해 오는 말을 듣고도,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대꾸하면서도 시큰둥하였었다.
그런데, 신선대의 생김새와 주변의 여러 여건들을 눈여겨 살펴보고서는 이곳이 수도하는 곳으로는 참으로 적합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여건과 상황들이 수도에만 전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뒤로는 수직의 바위 절벽이고, 마당 앞에는 천길 벼랑이다. 거의 수직인 신선대 바위는 높이가 15m 정도이고, 가로는 10m가 넘는다. 올려다보기만 해도 그 큰 규모에 저절로 위압감이 느껴진다. 함부로 언행(言行)을 할 수 없게 한다.
신선대 앞 지역은 제법 펀펀한 평지이다. 서너 평의 작은 초가집 한 채는 그런 대로 세워질 만한 공간이다. 그러나, 평지 끝 부분부터는 황골 골짜기로 수십 길의 벼랑이다. 까딱 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은 형상이다. 일분일초라도 방심하거나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졌다가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주고 있다.
신선대 앞 골짜기 건너편으로는 입석대(立石臺가) 바라보인다. 우거진 숲 사이로 보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우뚝하다. 저렇게 큰 바위도 저처럼 위험한 절벽 위에 앉아서 저토록 오래 동안 꼼짝 않고 서 있는데…. 마주 보이는 입석대를 바라보는 것도 또한 수도자(修道者)를 더욱 정진하도록 만든다.
주변의 경치도 뛰어나다. 특히, 봄에는 갖가지 색상으로 차이를 나타내며 펼쳐진 초록의 물결들이 빼어나고, 가을에는 희검은 바위와 검푸른 나무들에 가지각색으로 물든 각종 나뭇잎들의 단풍 빛깔이 함께 어우러져서 절경을 이룬다. 이것은 자연의 오묘함과 신비를 느끼게 하고, 또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여러 여건과 상황을 살펴보면서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은 암자를 짓고 조용히 수도하기에 오히려 가장 알맞은 곳이다. 주변의 여건과 상황이 정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양을 한다고 생각해 본다. 뒤에는 수십 길의 절벽 바위가 위압하듯 내려다보고 있어 조금도 해찰할 수 없게 하고, 앞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벼랑이 한 순간이라도 조심하며 근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건너편의 우뚝한 입석대는 또한 정진의 마음을 더욱 가다듬게 한다. 어찌 몇 달 몇 년의 세월로 큰 뜻을 쉽게 이룰 수가 있겠는가 반성하고 깨닫게 한다.
“외국에 유학을 보내려면 교포나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으로 보내십시오. 그리고, 어울려 지내는 친구와 또래들도 모두 외국인들밖에 없는 대학을 선택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외국어를 빨리 익히고, 외국 생활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게 하는 최선의 지름길입니다. 유학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교포의 집에서 살고, 한국인 유학생이나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이 많은 대학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일입니다.”
호주에서 십 년이 넘도록 관광 안내원 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어를 전혀 쓸 수 없는 외국인 천지에 던져졌을 때, 어쩔 수 없이 현지 언어를 배우게 되고 또한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의 생활에 쉽게 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수도(修道)를 한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데에서 시작되고, 마음을 닦는 것[洗心]은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正坐]부터 한다고 한다. 그런데, 바른 자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環境)과 상황(狀況)이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두 치워 버린 장소가 최적의 장소요, 하고자 하는 일 한 가지밖에는 다른 것을 할 수가 없게 된 여건과 상황이 도리어 최고의 성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견디어 내지 못할 정도라면 애초부터 큰 뜻을 이루기를 기대할 수가 없는 일이다. 푹신한 안락의자보다 딱딱한 의자가 공부방의 의자인 까닭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 원주 치악산 황골의 신선대는 수도하는 장소로서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양은 하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 와서 보고 생각해 볼 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