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이야기라고 했으니까 두 대상 사이에서 일어난 관계의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것이 모임으로서의 B-Plan에 대한 것이므로 “나”와 이것 사이의 이야기로 풀이가 된다. 모임이 태동하고 발전하고 지속되었던 시간의 흐름을 두루 다시 짚어보면 감회 깊게 마음을 탁 치는 느낌이 아직 살아있다. “나”는 아마도 B-Plan을 좋아하는가, 부다. 그리고 이 좋아함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그려내게 한다. 모임이 어제를 반추해가고 오늘로 생동하게 나타났을 때 나는 겸허하고 기쁘게 이 모임의 전부를 미리 축복한다. 왜냐하면 축복을 제쳐두고는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기 때문이다. 축복의 가장 좋은 방식은 혹시 그것에 대한 약간의 추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추억을 추려 다시 모아보는 것이 아마 “나”가 B-Plan에 대한 이야기쯤 될 것이다.
실존과 존재감
실존이란 실제로 존재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존재감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 “나”가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나름대로 느껴내는 스스로의 느낌일 것이다. 실존과 존재감 사이에서 일어난 긴장과 균형의 무너짐 같은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추구하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나”가 모여서 B-Plan이란 모임이 생겨났다. B-Plan은 바로 실존과 존재감 사이의 불균형이 일구어낸 작품에 다름 아니다.
자초지종을 얼추 서술해보면 이러하다. 북경이라는 황성의 한 모퉁이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소주 한잔 들이키던 컬컬한 자리를 빌려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것을 찾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2003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유달리 강하게 “나”-“남”의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다시 통합하도록 회자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우리는 이 젊은이들을 조선족이라고 칭하고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북경의 조선족 젊은이”들이었다.
젊은이는 항상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틈을 메우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틈을 젊은이들은 “정체성”에 대한 확인과 구체화로 이룩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행동에 옮겼다. 모임을 만들었으니까 이름을 붙이게 됐는데 지금을 딛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그 미래를 지금부터 설계해나간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남들이 상식적으로 쉽게 찾아내는 답안인 A가 아니라 그것을 초극한 곳에서 치열하게 건져낸다는 의미에서 B-Plan으로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런 모임의 장을 만들어 하나하나의 “나”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따져보자니 심각하기만 했다. 막상 답안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지금에 와서도 쉽게 답안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다르게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실존과 존재감을 뭉뚱거려 정체성이라는 단어 하나에 집합시키고, 그 정체성을 다시 몇 개의 단어로 쪼개 해석을 하면 될 것이다. 지금 와서 정리해보니 대략 이런 몇 개 단어가 떠오른다. 정성-소통-지성.
진정성이 머문 자리
모임의 장이 B-Plan이라는 이름으로 마련되었을 때, 처음 이루어지는 것이 “나”와 “나”의 만남이다. 만남은 구체성을 띤다. 북경 왕징바닥에서도 차량과 인파가 흘러가면서 자기가 가는 길에 충실한다. 도시의 길거리는 항상 이러하다. 거기에는 만남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을 지닌 무리들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 이런 자연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한데 모으면 모임이 생겨날 것이다. B-Plan은 이 모임에 진정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했다. “나”들의 숨어있는 잠재력을 은근하게 끌어내는 저력이 모임에 있었다. “나”를 찾아내고 드러내는 과정에서 모임은 생명을 갖기 시작했다. 고군작전과 고독 및 살벌한 생존게임이라는 현대인의 무의식적인 생존본능을 조용하게 녹여내어 따끈한 정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진정성이 필요했다. 모임은 이것을 감당해냈고 이 진정성의 의미를 구체적인 모임내용으로 담아냈다. 여러 특강이 이루어졌고 상호학습이 있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모임은 맥박이 뛰는 생명체였던 것이다. “나”는 고로 이것을 진정성이 머문 자리라고 하고 싶다.
소통에서 소통으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서고 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한 것이 없고 마는 허무한 경험을 나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차라리 침묵이 미덕인 많은 경우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을 들을 상대방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밑에 깔고 나서도 우리는 말하기의 어려움으로 곤혹을 겪는다. 소통이 문제다. 그것을 시원하게 뚫어줄 자리가 필요했으며 B-Plan은 그것을 해냈다. 끼리끼리 작은 소통이 먼저 있었다. 궁합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건 그나마 쉬운 일이었다. 저력은 항상 응집되는 데서 나오는 법이다. 한번 모이고 두 번 모이고 또 다시 모이고, 그것이 질긴 엉킴으로 커져나갔다. 먼저는 막힌 곳을 뚫고, 뚫린 곳으로 많은 좋은 것들이 통하면서 전반 모임이 뜨뜻한 자리로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감동이니 격정이니 사명감이니 이러한 수식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냥 말이 오가고 돌아서서도 느낌이 강하게 살아있는 그 자체로 좋았다. 소통에서 또 다른 소통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지성은 와인 맛이다
지성은 두뇌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두뇌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감을 살려 맛보고 다쳐보고 감수를 가져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까지 온 후에, 온몸이 행복해지는 마무리까지 가야만 지성의 의미가 깊게 새겨지는 것이다. 젊은 지성에게 이것은 특권이요 의무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지성의 소외감은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모임은 그 지성을 촉발시켜 불을 붙여주었다. 성냥을 그윽하게 문지를 때 피어나는 불꽃같이 그 뜨거움이 좋았다.
지성을 다스려 섬세한 느낌을 충족감으로 받아보는 것을 모임의 “나”들은 알았다. 그 맛의 화끈함도 알았다. 잘 익은 와인을 따서 투명한 지성의 그릇에 담아내면 향기가 우선의 즐거움이요, 강렬한 색상 또한 묘미이다. 입술에 가져다대는 순간의 촉감 역시 훌륭했다. 넘겨서 발출되는 열기가 몸을 달구는 것에서 와인은 스스로를 증명해낸다. 이것이 지성의 맛이 아니었던가, 와인 맛이 아니었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러했고 또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한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젊음과 의욕도 한번 또 한 번 순환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1월 17일이 오게 되어 있다. 또 한 번의 모임이 준비되었다고 들었다. BK22라고 들었다.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임을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싶다. 동참의 느낌을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체험하고 있기에 유감 중 그 나마의 위안이다.
“나”를 찾아가는 이 과정은 아름답다. 청순함과 노련함이 어우러져 그날 저녁을 달구었으면 한다. 젊음의 이름으로!
진정성으로 소통하고 지성을 완성시켜 정체성으로 귀결시키면서 실존과 존재감 사이를 충만하게 메꾸어가기도 역시 바란다.
여러분들의 건투를 빈다.
2009. 1. 16
연운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