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자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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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자녀 교육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9.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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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의 수필 146>
 

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우리 선조들의 자녀에 대한 가정교육 방법은 매섭도록 엄격하였다. 자세가 바르지 않아도 지적하고, 태도가 공손하지 않으면 야단을 쳤다. 말소리가 커도 걱정하고, 어쩌다가 쌍말이나 욕이라도 한 마디 하게 되면 엄청나게 꾸지람을 주곤 하였다. 손발 하나 움직이고 말 한 마디 하는 것까지 일일이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일렀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흘리면 밥알 하나라도 주어먹게 하고, 먹기 싫다거나 맛이 없다고 먹다가 남기는 것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로 가르쳤다. 쌀 한 톨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수고가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밥을 뭉기거나 헤젓지 말며, 크게 뜨고 흘리지 말며, 기장밥을 먹음에 저로 먹지 말며, 국거리를 입으로 후려 먹지 말며, 젖국을 마시지 말며, 음식을 먹게 하면 비록 즐기지 아니하나 반드시 맛보고서 기다릴지니라.…” 등을 그분들은 몸소 실천하고 생활하게 하셨다. “남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을 적에 국에 장을 타지 마나니, 손님이 국에다 장을 타거든 주인이 음식을 제대로 할 줄을 모른다고 사례하게” 될 상대방의 미안해 할 마음까지도 고려하며 사셨던 것이다. 밥상머리에서부터 자녀들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식사 도중에 누가 찾아오면 반드시 가족들의 음식을 덜어 함께 먹었고, 따로 상을 차려내야 할 경우에는 반찬은 반드시 나은 것으로 대접하게 하곤 하였다. 채소나 과일이라든지 떡이나 부침 한 조각이라도 남에게 줄 때에는 언제나 좋은 것, 반듯한 것으로 보냈다. 과일도 모양이 좋고 빛깔이 고와 탐스러운 것은 손님 대접이나 선물용으로 유념하여 두고, 벌레가 먹거나 한 쪽이 썩은 것은 도리어 맛이 더 좋다면서 가족들이 먹도록 하는 것이 그분들의 삶의 태도요 방식이었다.

   또한 어디를 가게 되면 반드시 말하고 가고, 돌아온 뒤에는 꼭꼭 다녀왔노라고 고해야 하며, 때로는 한 일에 대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뒷동산에 놀러가거나 이웃에 잠시 마실을 가는 경우에도 같았다. 아무리 재미있게 지내도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하고, 밤이 이슥하도록은 놀지 못하게 하였다.

   어쩌다가 행동이 크게 어긋나거나 하라는 일을 해놓지 않으면 벌로 밥을 굶기거나 문밖출입을 못하게까지도 하였다. 배고픈 시절에 굶게 하고, 한참 뛰어놀기를 잘하는 어린 시절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그것을 벌로써 내리는 것이었다. “일을 안 한 사람은 밥도 먹지 마라”는 말은 당연하게 여겼으며, 몰래 누룽지나 죽 한 그릇이라도 가져다 준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을 들어야 하였다.

   자녀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교육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몸이 좀 아파도 일에는 빠지게 할망정 서당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 것에는 용서가 없었다. 그것은 훈장이나 선생이 결정할 사항이지 부모가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녀가 성장하면 이름 있는 선생님을 찾아 멀리 떠나보내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결혼을 시킨 뒤 얼마 후에 타지로 보내어, 학문보다는 신혼의 신부 생각에 괴로워하여도 집에 오지 못하게 하였다. 청운(靑雲)의 큰 뜻을 품고 공부하는 사람이 그만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서는 아무 일도 해낼 수가 없다는 가혹한 방침이요 가르침이었다.

   우리 선조들의 자녀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서너 살 때 밥상머리에서부터 장가들고 자식을 낳은 뒤에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나이와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엄격한 교육방식은 어린 자녀들이 따르고 지켜내기에 무척 힘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 하며, 무엇을 하고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나아가 자기가 할 일은 어떠한 고통과 힘겨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내게 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생활 자세를 갖추게 하였다. 그런 속에서 그들은 어떤 일을 스스로 해내는 고통과 함께 그에 따른 성취감도 크게 느끼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취감이 자주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들은 삶에 대한 자신감과 삶의 행복을 맛보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태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으로 편안하게 살게 하고, 할 수 있는 한 하고 싶은 일은 다 할 수 있도록 무조건 도와주려고만 하는 태도인 듯하다.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 생활도 최고급품과 최상의 시설을 갖추어 주고, 가장 좋아하는 대로 편안하게만 해주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렇게 해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최고의 도리요 최상의 자녀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을 자기 자녀들만은 최고로 누리도록 하고, 그렇게 해줌으로써 자녀들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자녀들이 잘못한 경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무엇이 잘못이고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생각지 않는다. 실수의 과정과 영향, 잘못에의 반성과 새로운 다짐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짜증과 화를 내는 자녀의 기분을 달래고 풀어주려는 데에만 급급하다.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감싸고 용서하는 데에만 마음을 쓸 뿐 꾸중이나 벌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바라고 하고자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 주고, 어떠한 잘못이나 실수도 모두 용서하고 감싸주려는 입장만 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애정을 빙자한 과보호와 무한한 시혜(施惠)만이 훌륭하게 자라게 하고, 무조건적인 두둔과 용서가 자녀의 기(氣)를 살리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조부모에게 맡긴 자녀는 대개가 버릇이 없다고들 한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보다도 더 손자녀들을 귀여워하고 잘 용서하기 때문이다. 아비 없는 자식은 버릇이 없다는 말도 있다. 그들은 아버지보다 엄하지 않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흔히 제멋대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애정에 눈먼 과보호와 무조건적인 시혜와 용서는 곧 아이들을 버릇없게 만들며 약하고 삐뚤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에 대한 엄격했던 선조들의 교육태도는 배우고 참고해 볼 일이다. 다만 너무 엄격한 것과 지나친 책임 추궁만은 적절히 조절해서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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